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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19. 2022

누런털 괴물에게 잡혀가다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8

무작정 달리는 동안 뒤돌아갈까 생각도 했었다. 아직 앓고 있을 토트에게 약초를 가져다 주어야 한다. 하지만 단순한 감기일지도 모른다. 하루 정도 안 먹고 배변만 잘 하면 괜찮아질 것이다. 토트에게 오늘 하루 동안은 아무것도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해두긴 했었다. 형제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이의 집에 계속 있다간 굶어 죽진 않더라도 버즈와 포시의 폭력에 골병이 들거나 화병으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아리는 그냥 가던 방향으로 계속 뛰어갔다. 하이의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습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가 궁금해서였다. 풀과 진흙만 있던 습지가 끝나고 키 큰 나무들이 자라난 숲이 시작되었다. 축축하고 푹신한 땅은 차차 마른 흙이 덮인 단단한 땅으로 변해갔다. 큰 나무 발치에서 향기로운 버섯들을 발견했을 때는 얼른 먹어보고 싶었지만 버섯은 함부로 먹지 말라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나뭇가지들마다 막 새로 돋은 연둣빛 새싹들이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키 작은 덤불들 사이 보드랍고 촉촉한 흙들이 쌓인 곳에는 아리가 생전 처음 보는 이름 모를 봄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다섯 장의 흰 꽃잎이 별 모양으로 피어난 꽃도 있었고, 세 장의 꽃받침 위에 역시 세 장의 자줏빛 꽃잎을 단 꽃도 있었다. 보드랍고 납작한 연둣빛 이파리에 보라색 꽃봉오리와 파란색 꽃잎들이 조롱조롱 달린 꽃도 있었다. 은은하고 상쾌한 향기가 나는 것으로 봐서 먹을 수 있는 풀이라는 확신이 든 아리는 가까이 다가가 가장 어린 잎을 한 장 따먹어 보았다. 약간 새콤했지만 맛있었다. 아리는 작고 파란 꽃도 하나 통째로 따서 입에 넣어 보았다. 꽃잎이 녹으면서 입안이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찼다. 그래, 이제 난 이 꽃을 먹고 살면 되겠구나. 야생 부추와 국화순 따위로 버즈와 포시에게 맞으며 살 필요가 없다. 


야생화 관찰에 빠져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던 아리는 눈 앞에서 아주 작은 도랑을 만났다. 바닥에 자갈들이 깔려 있어서 물은 맑고 깨끗했다. 호숫물과 같은 냄새가 나는 걸로 보니 호수로 흘러 들어오는 강의 지류인 것 같았다. 그 작은 도랑에는 사람들이 만들어둔 작은 나무 다리가 있었고, 나무 다리는 사람들의 산책로로 이어졌다. 이제 곧 해가 질 시간이어서 지나다니는 사람도 드물었다. 아리는 한참 동안 헤엄을 치지 못한 것이 기억나서 당장 도랑으로 뛰어들었다. 물에 몸을 담그니 시원하고 상쾌했다. 얼굴을 물속에 묻고 세수부터 한 다음, 손으로 온몸에 물을 끼얹어 포시와 싸우느라 뒤집어쓴 진흙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이제 손이 조금씩 날개로 변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엄지손가락에서 날개들이 돋으려는지 손톱 위쪽이 간질거렸다. 엄마가 말해주었다. 자라는 동안 엄지손가락도 짧은 깃털들에 덮일 것이고, 손등에서도 기다란 깃털이 자라나올 거라고. 엄지 손가락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능력을 포기하는 대신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수 있는 마법 같은 능력을 얻게 되는 거라고…. 정말 그런 날이 올지 믿기지가 않았다. 


진흙을 모두 떨어내고 머리부터 온 몸을 흔들어 몸의 물기를 떨어내고 있을 때였다. 등 뒤쪽에서 첨벙 소리가 나면서 뭔가 물을 튀기며 달려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아리의 몸을 덥석 물어올렸다. 아리는 죽을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이제 나 죽는구나! 엄마, 나 좀 살려줘요! 단단한 이빨들에 잡힌 아리의 몸은 이제 곧 갈갈이 찢겨나갈 것이다. 엄마는 인간을 조심하라고 했고 하이는 인간을 따라다니는 사냥개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는데, 깜박 방심한 새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다. 집 나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죽게 되다니, 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줄 아빠도 없고, 난 정말 연약하기 짝이 없는 병아리였구나! 사냥개가 내 몸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 목구멍으로 삼키면 얼마나 아플까! 아리는 극심한 공포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정신이 든 아리는 아직도 자기가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냥개가 몸을 물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통증은 없었다. 개의 입천장은 딱딱하지 않고 보들보들했고, 아래쪽의 혀도 꽤 탄력 있고 푹신했다. 배가 고프지 않았던 건지 아직 아리를 삼키지 않았다. 아리를 산 채로 입에 물고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아리는 이전에 붉은 여우가 새벽에 얼룩다람쥐를 잡아서 입에 물고 가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새끼들에게 먹이러 가는 길인 게 분명했다. 그 얼룩다람쥐는 분명히 죽어 있었다. 그 얼룩다람쥐가 살아있다면 새끼들 앞에 내려놓는 순간 재빨리 도망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냥개의 행동은 참 이상했다. 이제 아리는 눈을 뜨고서 목을 살짝 움직여 사냥개가 걸어가는 방향을 살펴볼 정도로 여유를 되찾았다. 아직 조금은 더 살아서 이 세상을 구경할 수 있는 거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세상이 더 신기하게 보였다. 사냥개의 눈높이는 아리의 키보다 높았으므로 마치 낮게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야생화들을 구경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보였다. 에구 쯧쯧, 하며 아리를 보고 혀를 차는 새들도 있었다. 머리가 새빨간 딱따구리였다. 넛햇치도 딱딱한 나무줄기에 거꾸로 매달린 채 아리를 쳐다보았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니 아가야, 엄마는 어디 있니? 아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지가 구불구불하게 뻗어나간 나무도 있고,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키가 큰 나무들도 있고, 이미 죽어서 비스듬히 누워 딱정벌레와 다람쥐들에게 집과 먹이를 제공하는 나무도 있었다. 나뭇잎 모양도 수피의 무늬도 너무나 다양했다. 갖가지 나무와 풀이 어우러진 숲의 향기들을 담은 시원한 바람이 아리의 얼굴을 스쳐갔다. 처음으로 그 바람 속을 날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이 바람을 온몸에 느끼며 난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이젠 그것도 그냥 한 조각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오르듯이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이 부러워졌다.


좁은 숲길이 차차 넓어지면서 저 멀리 나무들을 베어낸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회색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개는 집이 나타나자 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달려가고 싶지만 아리 때문에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아리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이 모든 새로운 것을 접하자마자 죽어야 한다는 게 억울할 뿐이었다.  


“니카! 오늘은 뭘 수집해왔니? 오늘도 지오드를 찾아왔니? 그 돌은 이제 우리 집에 아주 많잖아!”


짧은 머리에 돋보기 안경을 쓴 통통한 할머니가 집 앞 창고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다가 개를 발견했다. 이름이 니카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리는 아직 이 개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니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창고를 지나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창고 옆에는 철조망으로 된 넓고 큰 우리가 있었다. 그 안에는 색깔과 모양, 크기가 다양한 기러기들이 잔뜩 있었다. 새들은 니카와 아리를 보고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아리는 그 속에서 자기만한 크기의 새끼들이 네 마리나 있는 것을 보았다. 몸 색깔은 연한 노랑색이었으며 모두 분홍빛 부리와 발을 가졌다. 니카가 우리 중앙쯤에 서서 기다리자 할머니가 니카를 따라왔다. 


“거기 문은 왜 열어달라는 거니? 아하…니카, 너 야생 아기 기러기를 주워왔구나! 이리 와서 내 손에 내려놓으렴!”


할머니가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두 손바닥을 둥지모양으로 모아 내밀었다. 사람의 손바닥에는 날개 같은 건 없었다. 털도 깃털도 없는 손바닥에 손가락이 무려 다섯 개나 달려 있었다. 그런 손가락들이 순식간에 둥지 모양으로 변신하는 게 신기했다. 니카가 입을 벌려 침으로 범벅이 된 아리를 할머니의 손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아리는 눈을 들어 개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다. 하이가 말한 사냥개는 귀가 쫑긋하고 피부가 검고 매우 사납고 무섭게 생겼다고 했는데 니카라 불리는 이 개는 그렇지 않았다. 우선 동그랗고 커다란 검은 눈에는 사나운 기운이라곤 보이지 않았고, 검고 큰 코가 달린 기다란 주둥이와 동그스름한 이마에는 병아리 털같이 보드랍고 짧은 갈색 털이 덮여 있었으며, 검은 테두리가 진 얇은 입술은 살짝 아래로 벌린 폼이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귀는 커다랗고 축 늘어졌으며 귀와 온 몸이 곱슬곱슬하고 기다란 황갈색 털로 덮여 있었다. 이빨이 크고 튼튼하긴 했지만 입에서 피비린내 같은 게 나지 않는 걸로 봐서 짐승을 잡아먹고 살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한 손으로 아리를 받쳐든 후 나머지 손으로 니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개는 입을 더 벌려 환하게 웃으며 마구 꼬리를 흔들었다. 


“니카, 하지만 이 기러기는 우리가 키우는 거위가 아니야. 우리 거위들은 부리가 분홍색이잖아. 이 아이는 부리와 발이 검은 색이고 머리랑 등도 거뭇거뭇하잖아…. 거위들은 나는 법을 잊은 지 오래 됐지만 이 아이는 다 크면 날아갈 수 있단다. 이 아이를 설마 제 엄마에게서 훔쳐온 건 아니겠지?”


할머니가 다그치자 니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아리의 몸을 자기 눈높이까지 들어올려 세밀하게 여기저기를 살펴 보았다.  


“귀엽게 생긴 아이네. 아마 길을 잃었었나 보다. 제 어미가 곁에 있었더라면 니카가 데려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겠지. 일단은 우리 집에서 며칠 돌봐주자. 마침 얼마 전에 태어난 새끼들이 있으니까 친구할 수 있을 거야. 병아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물어온 건 참 잘한 일이야. 역시 너에겐 리트리버의 본능이 남아 있구나. 옛날에 너의 조상 리트리버들은 주인이 사냥감을 총으로 쏘아서 맞추면 달려가서 그 새의 몸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고 오는 일을 했었지. 착하다, 니카!”


착해 보이는 이 개는 사냥개가 아닌지도 모른다. 사냥개가 아니라 리트리버라고 하지 않는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말한 대로 직접 사냥을 하는 개는 아닌 게 분명하다. 할머니가 앞치마로 아리의 몸에 묻은 개의 침을 닦아주었다. 


“네가 물고 오느라고 아무래도 어깨가 눌렸을 수 있으니까 일단 하루 이틀 집 안에 두고 상태를 관찰해보자. 치료해 줘야 할 데가 있으면 해주고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인다 싶으면 그때 다른 새끼 거위들이 있는 우리에 넣어주도록 하자.”    



할머니는 아리를 조심스레 안고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아리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집에는 높은 천장이 있었고 내부 공간이 꽤 넓었다. 겨우 할머니 한 사람과 개 한 마리가 살기 위해 이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벽에 난 투명한 창으로 밝은 햇살까지 비쳐 들고 있었다. 이런 둥지를 짓다니 사람들은 참 대단하구나. 아리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살피느라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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