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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20. 2022

험한 세상의 피난처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9

아리는 며칠 동안 할머니의 집 안에서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할머니는 작은 욕조에 물을 채워서 아리가 맘껏 헤엄칠 수 있게 해 주었고, 맛있는 달래와 민들레를 잔뜩 갖다 주었다. 부엌문 앞에 니카의 보금자리가 있었는데, 할머니는 바로 그 옆에다 동그랗고 푹신한 방석을 깔고 아리를 눕혔다. 니카의 입에 물려 오는 동안 멍이 들었던 어깨 죽지에도 뭔가 끈적한 것을 발라주었다. 


아리는 깨끗한 방석에 누워 난생 처음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잤다. 호숫가에 살 때는 밤이면 추워서 형제들과 몸을 붙이고 자다가 몇 번씩 잠을 깨곤 했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집 안에서는 밤에도 춥지 않았고, 비나 바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호시탐탐 아리의 목숨을 노리는 너구리나 매나 여우를 살필 필요도 없었다. 잠든 동안에는 모든 괴로움과 걱정도 사라졌다. 아리는 잠시 일어나 물을 마시고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면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자도 자도 계속 졸렸다. 엄마의 날개 속에 묻혀서 자는 꿈에서 깨어난 아리는 자신이 니카의 푹신한 가슴털 속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숨쉴 때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니카의 가슴에 기대 자니 엄마 품에서 자는 것만 같았다. 사흘 만에 비로소 아리는 정상적인 기운을 되찾았다. 몸도 가볍고 어깨도 아프지 않았다. 이대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니카를 깨운 다음 할머니가 일어나실 때까지 집안을 마구 뛰어다녔다.  


“아가야, 이제 완전히 기력을 회복했구나! 네 엄마를 찾아주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고, 어른이 될 때까지 당분간 우리 집에서 사는 수밖에 없겠다. 이제 새 친구들을 소개해줄 테니 잘 지내야 한다. 가족이라고 생각해라.”


할머니는 아리를 가슴에 안은 채 창고 옆 축사로 데려갔다. 철조망으로 된 축사 문을 열자 문 앞에 몰려 서 있던 거위들이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왔다. 키가 크고 곱슬거리는 하얀 털을 나풀거리는 새 한 마리, 백조처럼 부리 위에 혹이 있고 거대한 몸집이 흰 털로 덮인 어른 새 네 마리와 새끼 네 마리, 분홍빛 부리에 잿빛 몸을 가진 새 다섯 마리였다. 그들은 집 뒤에 있는 작은 연못을 향해 달려가느라 아리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할머니는 다리가 아픈지 무릎을 조금씩 절면서 아리를 못으로 데려갔다. 니카가 옆에서 할머니와 아리를 호위하고 있었다. 못이라고 해 봤자 작은 방 하나 크기 밖에 되지 않았지만 새들은 첨벙거리며 세수를 하고 온몸을 씼어 댔다. 못 근처에 물이 채워진 푸르스름한 플라스틱 욕조가 하나 있었는데, 그 물속에 하얀 새 한 마리가 홀로 들어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아가야, 일단 저기 가장 나이가 많은 이웃부터 소개해주마. 참, 이들은 모두 너랑 조상은 같지만 너처럼 야생으로 살아가는 기러기가 아니라 ‘거위’라고 하는 새들이야. 힘들게 먹이를 찾아 먼 길을 여행하는 삶 대신 사람들과 협력해서 사는 방법을 택한 새들이지. 사람들은 거위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거위들은 알을 제공한단다. 저기 푸른 플라스틱 욕조에서 홀로 목욕을 즐기고 있는 거위 보이지? 저 거위 이름이 ‘폴’이다. 원래 폴의 종족이 ‘세바스토폴’이라는 긴 이름을 가졌는데 폴로 줄여서 부르지. 몇 달 전 폴의 아내 바스가 코요테에게 물려 죽은 후로 성격이 예민해졌어. 카운티 축제 때 예쁜 거위 선발대회가 있는데 매년 폴과 바스가 번갈아 1등을 했었어. 예쁜 털을 유지하기 위해선 물도 많이 마셔야 하고 목욕통도 특별히 깨끗해야 하지.”


할머니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폴이 고개를 높이 들어올리며 날개를 퍼덕였다. 아리는 그런 깃털은 처음 봤다. 작은 물방울들을 튀겨낼 때마다 고불고불한 깃털들이 투명한 꽃잎처럼 하늘거렸다. 폴은 여러 번씩 온몸에 물을 끼얹으며 요란하게 등을 씻었다. 


“이제 저기 못에 무리 지어 있는 거위들 중에서 백조랑 닮은 거위 가족 보이지? 중국 거위 종인데 둘은 얼마 전 새끼를 낳았고, 나머지 둘은 아직 나이가 차지 않은 처녀 총각 거위야. 부모가 된 쪽은 골드와 실버고 처녀 총각 이름은 레드와 블루야. 골드와 실버의 아이들은 아직 이름은 안 붙였어. 좀더 뚜렷한 특징이 나타나면 이름을 붙이려고. 새끼들이 태어난 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되어서 골드와 실버가 지나치게 경계하는 편이야. 너한테는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네. 그리고 잿빛 몸에 오렌지색 부리를 지닌 거위들 보이지? 목 부근의 짧은 털들이 밭이랑처럼 줄줄이 곤두서 있는 게 특징이지. 그 중에서 부리에 검은 점이 있는 애가 점박이, 양쪽 눈 크기가 다른 애가 짝눈이, 턱살이 살짝 늘어진 애가 턱살, 뱃살이 많아서 거의 땅에 내려올 지경인 애가 뚱보, 다리에 살짝 연두빛이 도는 애가 연두. 뚱보만 남자고 나머지는 다 여자애들이야. 그들은 아메리칸 버프 종인데 성격들이 온순하고 조용한 편이야. 말없이 꾸준히 알을 낳아주어서 나를 먹여 살리지. 자 이제 네가 직접 만나보도록 해.”


할머니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리를 연못 가에 내려놓았다. 할머니가 호스를 잡아당겨와서 채소밭에 물을 주는 동안 니카는 다른 짐승들이 거위들을 덮치지 못하도록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망을 보았다. 아리는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물 속으로 들어갔다. 수초 위에서 놀던 개구리 몇 마리가 연못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리의 눈에는 아메리칸 버프들은 다 똑같이 생겼고, 어른 중국 거위 네 마리도 다 똑같이 생겼다. 그들의 세밀한 차이를 구별하려고 눈을 크게 떴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리에요.”


아리는 누구에게부터 먼저 인사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일단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아메리칸 버프에게 인사를 건넸다. 몸이 날씬하고 양쪽 눈 크기도 같았고 점도 없었다. 


“안녕, 난 연두야. 여긴 내 형제 자매들 점박이, 짝눈이, 턱살, 뚱보. 여긴 어떻게 왔니?”


아리는 연두의 얼굴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눈은 꽤 큰 편이고 단단해 보이는 분홍빛 부리는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나머지 거위들이 모두 아리 곁으로 모여 들어 아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리는 태어나서부터 겪은 일을 순서대로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울분이 끓어오르고 가슴이 답답해져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보니 거위들은 하나같이 충격을 받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부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세상에나…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구나. 우린 여기서 이렇게 편안하게 살아가는데 말이야.”


연두가 가까이 와서 목을 구부려 아리의 뺨에 이마를 비볐다. 연두의 다른 형제 자매도 모두 가까이 다가와 온몸으로 위로의 뜻을 표현했다. 중국 거위들도 새끼들을 이끌고 아리 쪽으로 걸어왔다. 


“우린 중국 거위들이야. 우리 조상은 중국의 기러기들과 백조들이야. 그래서 우리 몸은 이렇게 눈처럼 새하얗고 목도 우아하게 길단다. 사람들은 종종 우리를 백조로 착각하지. 나는 실버고, 내 남편은 골드, 저쪽은 내 형제 레드와 블루, 여기는 우리 아이들 위니, 비니, 루시, 미미. 이젠 걱정하지 마. 여긴 안전해. 먹을 것도 풍부하고 주인 할머니가 잘 돌봐주신단다.”


실버는 엄마답게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기 새끼들을 양쪽 날개에 두 마리씩 끌어안았다. 


“흥, 여기가 안전하긴 뭐가 안전해? 바스가 어떻게 죽었는지 잊었어? 그리고 할머니는 이제 너무 늙으셨어. 언제 돌아가실지도 몰라. 아가야,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이 세상은 죽음의 위협으로 가득 찬 곳이란다. 특히 너처럼 어리고 약한 애들에겐 더욱 더 위험하지. 난 폴이다. 폴 아저씨라고 불러라. 너보다 몇 배는 더 오래 살았으니까.”


목욕통에서 튀어나온 폴이 연못가로 다가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그 말에 직접적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이미 그걸 몸소 체험한 기러기로구나. 아가야, 세상 험한 줄 알면 항상 조심해라. 아무도 너의 안전을 지켜주지 않으니까. 니카는 몸만 컸지 용맹한 경비견은 아니다. 고작 컹컹 짖을 줄이나 알지 쥐 한 마리 잡을 줄 모른다.”


폴은 날개를 파닥여 한번 더 물기를 털어낸 후 니카 옆으로 걸어가서 클로버 잎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니카 곁이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제 이름은 아리에요. 아가가 아니라….”


아리는 폴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중국 거위들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연못 밖으로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나온 할머니가 종이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 상자에서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아메리칸 버프들도 중국 거위들의 뒤를 따라서 할머니 쪽으로 바삐 걸어갔다. 아리도 물에서 나와 맨 뒤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할머니가 니카의 물그릇 옆에 놓인 기다란 모이통에 종이상자의 내용물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노란색의 작고 납작한 조각들이 모이통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골드와 실버가 제일 먼저 얼굴을 묻고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제일 뒤에 서 있느라 먹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아리를 보고 할머니는 손바닥에 그 조각들을 소복이 담아서 아리에게 내밀었다. 


“자, 먹어봐라. 옥수수 가루로 만든 반죽을 얇게 밀어서 말린 과자다. 설탕도 들어 있어서 아주 달콤해. 오늘은 네가 온 첫날이니까 특별히 주는 거야. 먹어봐.”


아리는 문득 인간이 주는 음식을 먹지 말라던 엄마의 경고가 생각났지만 생전 처음 맡아보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거부할 수 없었다. 작은 조각 하나를 부리로 집어서 씹어 보았다. 처음엔 딱딱했지만 침에 섞이니 부드러워지면서 입에서 살살 녹았다. 지금껏 풀들만 맛있는 줄 알았는데 이건 더 맛있었다. 곧 중국 거위 병아리들이 다가와서 아리를 밀쳐내고 서로 할머니의 손바닥을 독차지하려 싸우기 시작했다. 


“싸우면 안 되지. 여기 더 있단다.”


할머니가 새끼들을 위해 바닥에 더 많은 과자를 쏟아주었다. 큰 거위들은 모이통에 머리를 박고 과자를 먹고, 새끼들은 땅바닥에서 과자를 주워먹느라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다는 걸 몰랐던 걸까? 사람이 이렇게 고마운 존재라는 것도 몰랐던 걸까? 아리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과자를 삼키며 이런 과자를 매일 먹을 수 있다면 평생 이곳에 머물러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가져온 종이박스가 텅 비어 버렸을 즈음 거위들은 모두 졸리는 눈과 무거운 몸으로 축사로 걸어갔다. 할머니가 축사의 문을 열어주자마자 거위들은 모두 안으로 뛰어들어가 여기 저기 자리를 잡고 누워 졸기 시작했다. 아리도 졸음을 견딜 수 없어서 연두 옆에 누웠다. 다른 새들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아리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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