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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20. 2022

날 것인가 말 것인가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10

평화로운 나날들이 흘러갔다. 아침과 저녁에 한번씩 축사 밖으로 나가 연못에서 수영과 목욕을 즐기고, 풀밭에서 식사를 하고 볼일을 봤다. 나머지 시간에는 안전한 축사 안에서 낮잠을 즐기거나 다른 거위들과 수다를 떨었다. 축사의 철조망이 워낙 촘촘하고 튼튼해서 너구리도 들쥐도 두더쥐도 매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가끔씩 여우나 코요테가 근처에 다가와 눈을 번득일 때도 있었지만 니카가 짖어서 쫓아버렸다. 폴도 그다지 까다롭게 굴진 않았다. 가끔 그가 신경이 예민해졌을 때 등 뒤를 긁어주거나 하늘거리는 날개에 붙은 먼지를 제거해주면 금방 조용해졌다. 


아리의 몸은 이제 눈에 띄게 커지고 살이 붙었다. 폴도 더 이상 아리를 아가나 병아리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이제 아리의 목은 축사 안의 어떤 거위보다 날렵하고 길었으며, 몸 색깔도 어른 기러기처럼 변했다. 목 위는 짧고 새까만 털로 덮였고, 얼굴에는 두 뺨과 턱 전체에 흰 반점이 생겼으며, 가슴에는 밝은 색의 깃털이 돋았다. 목소리도 제법 크고 우렁찼다. 작고 가냘프던 날개에 기다란 갈색 깃털들이 돋아나 양 날개를 펼치면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축사 안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있긴 했지만 아직도 나는 법은 익히지 못했다. 작은 새들이나 매, 부엉이처럼 날개만 펄럭이면 곧장 날아오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도 축사 안의 거위들은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취했다. 


“너 빨리 나는 법을 배워두는 게 좋을 거야. 살도 좀 빼야 될 걸. 계속 그렇게 먹기만 하고 날지 않으면 근육이 생기지 않아서 결국 날지 못하는 거위가 되고 말 거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거위들의 몸을 봐라. 모두 배가 축 처지고 지나치게 무겁다. 너도 이렇게 되고 싶니?”


폴의 말은 날카로운 칼처럼 아리의 가슴을 후벼 팠다. 폴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철새 가족들을 만나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라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아리는 지금의 평온한 삶이 너무나 좋아서 엄마의 말을 잊어버리기로 결심한 터였다. 날 수 있게 된다 한들 어디 가서 여행 중인 자이언트 기러기 무리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이곳 기러기들이 아리의 새 가족이었다. 


“괜찮아. 여기선 날아야 할 필요가 없어. 아주 잠깐씩 점프할 때 날긴 하지. 멀리까지 날아가는 건 결국 다 먹이를 찾기 위한 건데, 여기선 먹이가 그냥 공급되잖아. 한겨울에도 할머니가 연못에 따뜻한 물을 부어서 수영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충분히 먹고 마실 먹이를 주신다고. 추위와 땡볕 아래 날아다니면 체력 소모도 심하고, 다른 맹수의 공격도 받고…결국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고. 날 수 있다는 걸 부러워하는 동물들이 많지만 어찌 보면 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저주가 될 수도 있어.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거위의 삶을 선택한 거지. 덕분에 후손인 우리는 이렇게 혜택을 누리는 거라고. 우리 할머니는 그저 알만 주기적으로 낳아드리면 그 이상 바라는 게 없으시지.”


폴을 제외한 다른 거위들은 모두 실버의 생각에 동의했다. 실버가 가장 말을 잘 하고 똑똑한 편이었다. 


“날 필요가 없다는 건 다 거짓말이다. 날개 가진 새가 날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눈 가진 새가 일부러 눈 감고 살겠다는 거나 똑 같은 말이다. 아리야, 두고 봐! 내 말이 옳다는 걸 분명히 깨달을 날이 올 거다. 저 멍청이들은 나만큼 나이가 많지도 않고, 나처럼 아내를 잃어본 적도 없다. 나야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해마다 예쁜 거위 대회라도 나가지만 다른 거위들은 알을 못 낳게 되면 나중엔 다 사람의 식탁에 고기를 제공하는 몸이 되지. 아무리 진실을 말해줘도 믿질 않으니….”


결국 아리에 대한 입장 차이는 폴과 실버의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사람들의 고기로 전락할 거라는 말에 열 받은 실버가 목을 앞으로 내밀어 폴의 흰 깃털을 잡아당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야 살 좀 빼면 날 수라도 있겠지만, 넌 날개가 이 따위 기형이라 날 수도 없잖아? 날개 깃털에 심이 없어서 공기를 머금을 수도 없으니까! 이 잡종 중에 잡종! 너야말로 이 깃털 다 사라지는 날엔 곧바로 식탁용 고기가 되고 말겠지! 내가 다 뽑아버릴 테다!”


실버가 폴의 약점을 건드리고 말았다. 실제 폴을 제외한 다른 거위들은 높이는 아니라 하더라도 아주 약간은 날아오를 수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올 때면 걸어 내려오는 대신 날개를 이용하여 가볍게 착지했지만, 폴 혼자 경사가 낮은 곳으로 걸어 내려왔다. 폴과 실버가 서로 깃털을 물어뜯기 시작했고, 실버의 남편 골드가 합세했다. 폴이 니카와 할머니를 불러내기 위해 소리 높여 비명을 질렀다. 


즉시 축사로 달려온 니카가 상황을 파악하고 집 안을 향해 컹컹 짖어댔다. 그런데 오늘따라 니카가 아무리 짖어대도 할머니가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폴의 깃털은 더욱 형편없이 뜯겨나가고 있었다. 골드와 실버는 워낙 덩치도 크고 힘도 셌으므로 다른 새들이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아리 때문에 벌어진 싸움이었으므로 책임감을 느낀 아리가 말리려고 끼어들었다. 그러나 뒤에서 연두와 짝눈이가 아리를 잡아당겼다. 이대로 계속 싸우다간 폴은 한달 후로 다가온 카운티 축제의 예쁜 거위 대회에 참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거만한 심술쟁이 홀애비, 언제 한번 혼내줄까 벼르고 있었는데 잘 됐다! 오늘 완전히 털 뽑힌 닭같이 만들어 버릴 테다! 누가 먼저 오븐으로 가는지 두고 보자고!” 


실버의 말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이렇게까지 크게 싸울 일은 아니었는데, 둘의 싸움은 마치 오랫동안 쌓아두었던 어떤 울분의 폭발처럼 보였다. 아리는 이제껏 평화롭게만 보이던 거위들의 사회에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아리도 미움을 당하면 저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중국 거위들은 다수였고, 아리와 폴은 가족이 없으므로 비상시에 도와줄 새들이 없었다. 혼자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리는 똑똑히 배웠다. 그냥 함께 섞여 있다고 해서 같은 무리는 아닌 것이다. 자이언트 기러기 무리는 수백 수천 마리가 함께 여행하며 모두 한 가족이라고 했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매, 독수리, 부엉이, 너구리, 여우, 두더지만 위험한 게 아니라 이 축사 안의 거위 무리에 더 큰 위험이 존재했다. 


할머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털을 잔뜩 쥐어 뜯기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폴이 마침내 실버 부부에게 항복함으로써 싸움이 끝났다. 니카가 축사 바깥에서 안타까이 짖어댔다. 중국 거위 무리가 우르르 자기들 자리로 몰려간 후 쓰러져 있는 폴을 아리가 부축하여 옮겼다. 깃털만 뽑힌 게 아니라 아예 피부 자체가 뜯겨 나간 부분도 있었다.  


“올해는 대회에 못 나가겠구나. 그 동안 할머니가 내 깃털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셨는데….”

“죄송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대회에 나가실 수 있도록 제가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아리의 말에 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네가 돕긴 어떻게 돕겠냐고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아리야, 내 말 잘 들어라. 넌 이곳을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된다. 우리야 원래 인간의 품 말고는 갈 데가 없는 잡종 거위들이라지만 넌 아니다. 기러기가 그렇게 쉽게 거위가 되는 건 아니다. 다만 뚱뚱하고 날지 못하는 기러기가 되는 것뿐이지. 난 바스가 코요테에게 물려 죽는 걸 보고 생각했다. 바스가 날 수만 있었더라면 그 위험을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이다. 바스는 늘 날아다니는 기러기들의 삶을 동경했었거든. 우린 사람들 눈에는 천사처럼 예쁘다고 찬사를 받지만 겨우 일년에 하루뿐이다. 넌 어서 너의 무리로 돌아가서 날기를 연습해야 해.”



아리는 폴의 말이 언제나 진실이었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안일한 삶에 길들여져 날개로 하늘을 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할머니의 집이 편안하고 좋았다. 가끔씩 푸른 하늘에서 힘차게 구호를 맞춰 지나가는 기러기 무리의 소리를 들을 때 가슴이 설레는 것과, 조금씩 날개가 가렵고 당기는 느낌도 무시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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