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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21. 2022

마침내 날아오르다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12

창고 안의 어둠에 익숙해지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왼쪽 벽과 정면 안쪽 벽을 따라 설치된 선반에는 층층이 좁은 거위 장들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수많은 거위들이 들어 있었다. 중앙에는 여러 개의 호스가 발처럼 달린 커다란 원통형 기계들이 놓여 있었고 오른쪽 벽을 따라서 무서운 칼날이 달린 기계들과 작업대, 철문이 달린 거대한 시설들이 늘어서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열린 거위 장 두어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아래 커다란 대야에 죽은 거위의 목들이 걸쳐져 있었다. 강렬한 피 냄새와 살이 썩는 악취는 주로 그곳에서 풍겨왔다. 층층으로 놓인 거위 장들에서도 심한 악취가 풍겼고, 그 속에 있는 거위들은 잠든 것처럼 조용했다. 극도의 공포로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는 실버와 골드를 들여다보며 농장주인이 말했다.


“중국 거위종이지? 너희들은 가슴 털이 정말 뽀얗고 탐스럽구나. 그래, 지금 실컷 비명을 질러라. 나중엔 그럴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좋은 게 있단다. 너희는 이제부터 배터지도록 잘 먹게 될 거라는 점. 하하하…. 식사시간은 저녁 5시, 그 후 30분 동안은 산책과 수영이다. 그때 보자!”


농장주인이 창고 문을 잠그고 나가자 여기 저기서 작은 목소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신음소리들이었다. 거위 장 깊숙이 누워 있던 거위들 몇 마리가 거위 장 바깥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리는 다시 한번 자기 눈을 의심했다. 바로 옆의 거위 장에 있는 거위들은 분명 몸 전체는 중국 거위처럼 흰색인데 목 아래부터 가슴 전체에 털이 없이 새빨간 맨 살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의 거위장의 거위들 중 몇 마리는 부리 가장자리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어떤 장에는 온몸이 땀 범벅이면서도 다리가 아픈지 일어서지 못하는 거위와 몸이 지나치게 부어 보이는 거위가 누워 있었다. 몸을 움직이면 서로의 몸에 닿을 정도로 좁은 장에 여러 마리의 거위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너희들 아직 힘 있을 때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해야 돼. 안 그러면 우리처럼 될 거야. 참, 내 이름은 씨씨야. 이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바로 옆 거위 장에 있던 가슴에 빨간 맨 살을 드러낸 거위가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도대체 뭐 하는 데지? 농장주인이 한 말이 무슨 뜻이야?”


폴의 물음에 여기 저기서 한숨 같은 것이 쏟아져 나왔다.


“곧 알게 될 거야, 저녁이 되면… 식사 시간이 가장 무서워. 조금 미리 안다고 나아질 것도 없잖아. 내 가슴 보이지? 기러기 가슴 털이 특히 보온에 좋다고 마구 뜯어갔어. 다시 자라날 만하면 또 뜯기고…. 얼마나 아픈데…. 그래도 난 물까지 걸어갈 수 있어서 세수라도 하니까 눈이라도 성하지. 다른 거위들은 몸이 무거워 걷지도 못하고 눈과 코를 못 닦아 장님이 되어버린 애들도 많아.”


씨씨가 아리와 폴의 가슴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너희들도 참 운이 없구나. 이런 지옥에 오다니. 하지만 이렇게라도 사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살아있는 다람쥐가 죽은 여우보다 낫다는 말 있잖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씨씨도 제 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너희들은 왜 도망치지 않은 거지?”


폴의 질문에  씨씨가 몸을 돌려 등을 보여주었다. 꼬리털이 아예 없었다. 


“산책 시간에 도망치다가 저 미친 개에게 잡혀서 꼬리를 잃고 말았어. 도망치다가 날개가 잘린 거위도 있고, 아예 목숨을 잃은 거위도 많지. 물론 운 좋게 성공하는 경우도 가끔 있긴 해. 하지만 너희도 오는 길에 봤겠지만, 이 집 근방에는 숲도 없고 산도 없어. 죽도록 달려가봤자 숨을 곳이 없어서 매에게 잡아 먹히기 딱 좋지. 그래도 이곳에 계속 있다간 결국 죽어서 털은 인간들의 방한용 외투로, 살은 고기나 사료로, 엄청나게 커진 간은 프랑스 음식 재료로 팔려나가겠지. 어서 간이 커져서 죽을 수 있기만을 기다려.”


폴도 골드와 실버도 연두 형제도 모두 한숨만 쉴 뿐 더 이상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리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씨씨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몸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다른 거위들은 다 말할 기력도 잃었는지 자기 자리에 누워서 거친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뚱뚱해진 몸 때문에 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 보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씨씨는 이곳에 온 지 석 달 남짓 되었다고 했다. 애완동물처럼 집 안에서 주인과 함께 살았는데, 해마다 예쁜 거위 대회에서 우승을 하다가 올해 다른 경쟁자에게 밀리자 주인이 화가 나서 이곳에 팔아버렸다고 했다. 서로 신세 한탄을 하면서도 시간이 가는 것이 두렵기만 했다. 저녁시간이 다가올수록 씨씨도 다른 거위들도 말수가 줄어갔다. 공포의 식사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창고 문이 활짝 열리면서 농장주인과 다른 청년 두 명이 작업복에 고무장화 차림으로 축사 안으로 들어왔다. 농장주인이 중앙의 기계 앞으로 가서 원통형 기계의 뚜껑을 열자 다른 청년 하나가 사료 봉지를 개봉하여 그곳에 들이부었다. 원통형 기계의 뚜껑이 닫히자 옆에서 기다리던 청년이 빨간색 버튼을 눌렀고 기계 안에서 뭔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농장주인이 제일 안쪽의 선반에서 거위 다섯 마리가 든 장을 내려 기계 옆으로 날라왔다. 세 마리를 끄집어 내 원통형 기계 주위의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농장 주인과 두 청년이 각각 기계에 달린 호스들을 잡아 당겨 거위의 부리 속에 깊숙이 집어 넣었다. 거위들은 목이 막혀 신음소리도 못 내고 대신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사람들이 호스가 시작되는 부분에 붙은 버튼을 누르자 물과 섞여 끈적해진 사료가 거위의 입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거위는 온몸을 비틀었지만 목을 붙잡혀 거부할 수 없었고, 사료가 들어갈수록 배가 심하게 부풀어올랐다. 


그 거위의 식사가 끝나자 다음 거위들의 순서로 넘어갔다. 그 중 한 거위는 목 옆쪽에 구멍이 난 게 보였다. 금속으로 된 호수 끝이 목으로 들어가면서 목 피부를 찢은 것 같았다. 사료를 주입하는 동안 그 구멍으로 누런 사료의 일부가 새어 나왔지만 청년은 모른 척했다. 사료를 다 받아먹은 거위들 중 일부는 휘청거리며 창고 밖으로 걸어나갔고, 걸을 힘이 없는 거위는 그대로 다시 거위 장 속에 넣어졌다. 수백 마리의 사료 공급이 끝나고 마침내 아리와 폴의 순서가 다가왔다. 


“뭐야? 하나는 야생 기러기고 하나는 관상용 세바스토폴이잖아? 비록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지만.”


마르고 키 큰 청년 쪽이 아리와 폴을 보고 잠깐 망설였다. 


“이런 거위들은 푸아그라 용으론 좀 아깝지 않나?”

“그러게…어차피 야생 기러기는 목이 너무 좁고 길어서 호스 크기에 안 맞으니까 그냥 잡아 먹고, 세바스토폴은 상태가 괜찮으면 애완동물 가게에 팔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어.”


얼굴이 통통한 금발머리의 청년이 제법 아는 척을 했다.


“사장님, 이 거위 두 마리는 저한테 주시면 어때요? 아니면 싸게 파시던가요?”


금발머리 청년의 말에 사장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실버가 너무 저항해서 목을 붙잡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야생 기러기들은 이제 야생도 아니야. 철새 여행도 안 하고 사계절 여기 눌러 살잖아. 인간들이 자꾸 먹이를 주니까 인간들 사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나서 골프장이고 밀밭이고 공원이고 모두 망쳐놓고 가지. 호수 공원에서 고기 좀 구워먹으려고 해도 이 놈들 똥 천지라 가기 싫다니까. 사계절 내내 사냥이 가능하도록 하면 총 쏘는 재미라도 볼 텐데….”


금발머리 청년은 계속 아는 척을 했다. 


“사냥하면 뭘 해? 먹지도 못할 건데. 거위 고기는 너무 기름져. 닭이 훨씬 더 맛있다니까.”


키 큰 청년은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으로 다시 기계의 뚜껑을 열고 사료를 붓기 시작했다. 금발머리 청년이 키 큰 청년을 도와주려고 손에서 호스를 놓고 돌아섰다. 그 틈에 폴이 얼른 아리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리야, 잘 들어라. 지금이 바로 기회다. 내가 먼저 달려나가면 분명히 이 청년들과 저 경비견 두 마리가 나를 잡으려고 몰려들 거다. 그들이 모두 내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넌 그때 죽을 힘을 다해 창문이 있는 작업대를 향해서 달려라, 알겠지? 그 다음엔 작업대에 뛰어올라 창문 바깥으로 점프하는 거다. 넌 날개가 받쳐주니까 점프라면 자신 있지?”

“하지만 아저씨, 그 다음은 어떡하라는 거예요? 날지도 못하는 제가 혼자서 뭘 할 수 있을까요?”

“아리야, 어쩌면 말이다…네가 날지 못하는 건 몸의 문제가 아니라 네 마음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날 수 없는 거야. 네 날개는 내가 보기엔 완벽해. 너 자신을 믿어라. 시간이 없다, 실시!”


말이 끝나자마자 폴이 작전을 행동으로 옮겼다. 청년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폴은 그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이제껏 줄곧 아파서 비실거리던 그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모른다. 폴이 창고문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리자 폴의 예상대로 두 청년도 울타리 너머로 달려나갔다. 폴은 머리를 써서 지그재그로 달렸고, 청년들에게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창고 문을 빠져나가자 두 마리 경비견이 폴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농장주인은 여전히 실버를 붙잡은 채 기가 차다는 얼굴로 방관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아리도 울타리를 뛰어넘어 폴이 알려준 대로 창고 안쪽을 돌아 작업대를 향해 달려갔다. 거위 시체가 놓인 대야의 한쪽 끝을 밟으며 날개를 저어 작업대 위로 뛰어오른 다음 칼날 위를 달려 열린 창문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날개가 활짝 펴지면서 공기를 붙잡아 주어서인지 땅에 착지할 때 전혀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어디로 달려야 할지 망설이는데 경비견 한 마리가 눈치를 채고 아리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폴은 벌써 잡힌 걸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리는 목숨을 걸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기도 모르게 목을 앞으로 최대한 내밀어 공기의 저항을 줄였다. 경비견과의 사이는 점점 더 좁혀지고 있었다. 달리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기러기가 개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었는지 달리던 속도 때문인지 저절로 날개가 등 뒤로 펴졌다. 날개를 얼른 닫으려고 허리 쪽으로 내린다는 게 가슴 앞까지 내밀었고 그 순간 발이 공중으로 껑충 떠오르는 걸 느꼈다.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일단 공기가 몸을 띄워 올리자 두 날개를 크게 벌려 위를 향해 저을수록 점점 더 몸이 높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꿈속에서는 수없이 겪어본 상황이었지만 이게 현실에서도 가능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제야 아리는 기러기가 평지에서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힘찬 도움닫기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리가 어렸을 때에는 어른 기러기들도 모두 털갈이를 하던 중이어서 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냥 하늘에 떠가는 기러기들을 보았을 뿐 그들이 어떻게 이륙하고 착지하는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기러기는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곧장 떠오를 수 있는 독수리나 매나 부엉이가 아니었다. 그들의 발과 기러기의 발은 다르다. 그 차이를 몰랐기에 날지 못했던 것뿐이다. 점점 경비견의 모습이 멀어지면서 도마뱀만큼이나 작아졌다. 창고 위로 높이 날아오른 아리는 폴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창고 문 방향으로 날아갔다. 폴은 경비견이 덮쳤는지 몸에 피를 흘리면서도 금발 머리 청년의 품에 안겨 있었다. 


“폴 아저씨, 저 여기 있어요! 아리라구요!”


아리의 목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폴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해냈구나, 아리야! 행운을 빈다!”

“폴 아저씨, 고마워요!”

“아리야, 어서 떠나라! 어쩌면 농장주인이 총을 쏠지도 모른다. 어서 네 무리를 찾아가라!”


총이라는 말에 아리는 겁을 먹고 더 높이 솟아올랐다. 경비견 두 마리가 허무하게 아리를 올려다 보았다. 난다는 건 이렇게 통쾌한 일이로구나. 


“폴 아저씨, 잊지 않을게요! 그럼 안녕히!!”


아리는 날개를 더욱 힘껏 저어 높이 그리고 멀리 날기 시작했다. 높이 날아오를수록 숨이 가빠지고 몸이 뜨거워졌지만 그래서인지 피부와 깃털에 와 닿는 바람이 더욱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리는 날개 끝과 발과 꼬리털로 바람을 움켜잡았다 폈다 하며 장난을 쳤다. 


나무들마저 작고 푸른 둥근 점으로 보일 때쯤엔 더 이상 썩는 냄새도 지저분한 오물 냄새도 사람과 동물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울타리도 천장도 없는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자 지상에서의 슬픔도 배고픔도 분노도 먼지처럼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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