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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21. 2022

안전한 곳은 없다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11

할머니는 그날 저녁에도 다음날 아침에도 집밖에 나오지 않았다. 축사 앞을 지키던 니카도, 아리를 포함한 축사 안의 거위들도 모두 밥을 굶었다. 


다음날 낮, 삐뽀삐뽀 소리를 내면서 하얀 트럭 한대가 숲길을 달려 집 앞에 섰다. 그 뒤를 밤색 승용차 한 대가 따라와 멈춰 섰다. 밤색 승용차에서 내린 남자가 할머니 집의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흰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이 들것을 들고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니카도 컹컹 짖으며 집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잠시 후 들것에 누운 할머니가 밖으로 실려 나왔다. 죽은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할머니를 실은 흰색 트럭이 다시 숲길을 달려나가자 뒤따라 나온 남자는 잠시 축사에 눈길을 한번 주더니 그대로 차에 올라 트럭을 따라나갔다. 


잠시라도 축사 문이 열려서 밥을 먹고 목욕을 할 수 있을까 기대했던 거위들은 실망에 빠져들었다. 전날 할머니가 밖에 나오지 못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 한 모금 못 먹은 폴은 여전히 두 발을 뻗고 쓰러진 채 상처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당장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지 않으면 폴도 죽을지 모른다.


“폴이 했던 말이 틀린 게 아니네. 어쩐지 요즘 할머니 걸음걸이가 많이 무거워 보였어. 아들인가 본데, 아들도 젊지가 않네. 말이 씨가 된다는 게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거지.”


연두가 혀를 차면서 실버 가족을 돌아보았다. 실버와 골드는 어제의 의기양양한 기색은 온데 간데 없고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짝눈과 점박이, 턱살은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로 축사 안을 이리 저리 걸어 다녔다. 뚱보는 모이통 아래쪽에서 오래된 곡식 한 알을 발견하고는 즉시 쪼아먹기 시작했다. 실버와 골드의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징징대다가 제일 어린 미미가 울음을 터뜨리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레드와 블루는 시큰둥한 얼굴로 끝없이 날개 깃털을 다듬고 있었다. 


그토록 평화롭고 부족한 것 없어 보이던 이 축사에 단 하루 만에 허기와 갈증과 공포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웠다. 아리는 안전한 곳은 없다던 폴의 말이 자꾸만 생각 났다. 실제로 지난 삶을 돌아보니 어떤 힘이 아리로 하여금 끝없이 집을 떠나 어디론가 계속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내모는 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에도 거위들은 모두 밥을 굶었다. 목욕을 하지 못해 온몸이 근질거렸다. 아리는 처음으로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러 날아다니는 야생 기러기의 삶이 그리워졌다. 호수에 살 때는 먹어도 먹어도 금방 배가 꺼지는 풀들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먹을 게 떨어진 적은 없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았어도 목욕할 물은 늘 있었다. 이제 거위들의 몸 냄새와 오물 냄새로 가득 찬 축사가 감옥처럼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 일찍 축사 문이 열렸다. 할머니의 아들이었다. 거위들을 연못으로 데려가서 목욕을 시키고 모이를 먹인 후 할머니의 트럭에 있는 좁은 거위 장에 그들을 모두 몰아넣었다. 아리는 그새 재빨리 약초 뿌리를 찾아내어 폴에게 먹였다. 거위 장 문을 닫은 후 니카를 조수석에 실은 남자는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트럭은 천천히 할머니 집 앞마당을 빠져나가 숲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숲의 나뭇잎들이 군데군데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이젠 아침마다 기온이 제법 선선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리 모두 고기로 팔려가는 거야?”


실버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다른 새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리는 폴 옆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 몸을 씻고 밥을 먹고 나서 약간 기력을 회복한 것 같긴 하지만 날개의 상처에서 고름이 흘러 자꾸만 파리가 달라붙었다. 눈도 자꾸만 감기면서 졸음에 빠져드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폴을 아리가 계속 흔들어 깨웠다. 


“폴 아저씨 자꾸 주무시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다 죽으면 어떡해요? 기운을 차리세요.” 

“아리야, 난 이제 곧 죽을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난 이미 살 만큼 살았다. 어떻게든지 살아야 하는 건 너다. 기회를 봐서 꼭 도망치도록 하거라. 하지만 날지도 못하는 네가 매한테 공격이나 안 당할지 걱정이구나. 새들마다 나는 법이 다 다른데, 누가 너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니…. 살아있다는 게 대단한 행운도 아닌데, 그 살아남는 일 자체가 이렇게 힘들어서야…살아있어도 외롭거나 두려움에 떨며 산다면 사는 게 무슨 소용이니…난 모르겠다, 모르겠다… 바스, 당신 오늘은 더욱 눈부시게 아름다워! 이리 와서 아리한테 인사해…”


폴은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얇은 눈꺼풀이 반쯤 덮인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차는 좁은 숲길을 빠져나가 포장이 된 도로에 접어들었다. 도로 가에 드문드문 인간의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사진 도로를 두어 번 오르락 내리락 하더니 차는 더욱 넓은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곳에서부터 더 이상 숲은 보이지 않았고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아리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사람을 태운 크고 작은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도로 위를 달렸고, 지금까지 본 집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커다란 건물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빨리 달리는 차의 속도 때문에 멀미가 났는데, 거기에 덥고 매캐하고 텁텁한 공기까지 코로 들어오자 숨도 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뜨겁고 딱딱한 검은 도로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달리는 차들이 뿜어내는 검은 연기의 냄새는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아리도 다른 거위들도 모두 아침에 먹은 것을 토하기 시작했다.


폴은 이미 졸도한 상태이고, 차가 정지했다가 출발할 때마다 중국 거위들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댔다. 인간의 건물들도 사라진 후 거대한 회색 빛 도로만 있는 곳으로 들어간 차가 더욱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자 바깥을 내다보는 것도 포기한 아리는 눈을 감고 폴 옆에 누웠다. 기진맥진하여 한참 잠이 들었던 아리는 꿈결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떤 소리를 들었다. 눈을 떠보니 차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곳을 달리고 있었지만 멀리 하늘 위에 열 한 마리의 기러기들이 ‘ㅅ’자 모양으로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큰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서로를 격려하고 있었다. 


“힘내 힘내! 조금만 더 가면 쉴 곳이 나온다. 포기하지 마!”


그 목소리를 듣자 아리는 마치 그것이 자기를 향한 격려인 듯 힘이 솟았다. 바람을 가르는 그들의 힘찬 날갯짓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갓 자라 어른이 된 기러기들로 이루어진 무리인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요! 나도 곧 당신들처럼 하늘을 날 거예요! 포기하지 않을 게요!”


아리는 이미 멀어진 기러기 떼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려 가슴 털까지 적셨다. 집을 떠나온 후로 하늘을 나는 기러기 떼를 몇 번이나 보았었다. 그러나 할머니 집에서 편안하게 사는 동안에는 그들을 보아도 큰 느낌이 없었다. 마치 먼 나라의 고달프게 살아가는 동족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먹이를 찾아 그 멀리까지 날아다녀야 하는 삶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들의 힘찬 날갯짓과 자유로운 삶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미치도록 날고 싶었다. 천장이 낮아 고개를 들 수도 없는 이 좁은 거위 장을 빠져나가 끝이 없는 하늘을 훨훨 날고 싶었다. 그들이 하늘을 나는 건 단순히 먹이만을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기러기는 결코 먹이만으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진 것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좋다, 단 하루라도 좋다. 희망 없는 지상을 벗어나 마음껏 훨훨 하늘을 날 수만 있다면….    


아침에 숲을 출발한 차는 해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을 무렵에야 멈췄다. 넓은 평지에 세워진 집 한 채와 집보다 더 큰 창고 같은 건물 한 채가 있었고, 창고 앞에는 맹렬하게 짖어대는 검은 개들이 두 마리나 있었다. 창고 뒤쪽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지만 나무나 풀이 별로 없어서 황량해 보였다. 집과 창고 사이에 트럭 한 대와 작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할머니의 아들이 집으로 다가가자 누군가 문을 열어주었고, 곧 할머니의 아들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코가 예민한 아리는 이 집 전체에서 감도는 불쾌한 냄새를 감지했다. 기러기 똥 냄새에 섞인 고약한 냄새는 뭔가 썩는 듯한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분명했다. 중국 거위들과 아메리칸 버프들도 비슷한 걸 느꼈는지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폴도 간신히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리는 폴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폴 아저씨, 기운이 나세요?”

“여기가 어디야? 한참 자고 일어나니 열도 내리고 약간 개운하구나. 확실히 네가 준 약초가 효과가 있긴 있나 보다.”


아리는 폴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아리는 이곳에 오는 동안 자신이 목격한 것들을 모두 폴에게 들려 주었다. 폴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농장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다.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저기 저 칠이 벗겨진 창고 정말 으시시하군. 창고 문 옆에 세워진 넉가래와 녹슨 삽 보이지? 저기 드문드문 붙어 있는 하얀 것들이 거위 털이 분명해. 이 익숙한 똥 냄새는 우리가 먹어선 안 되는 것을 먹었을 때나 지나치게 과식했을 때 누는 똥 냄새야. 저 창고 안에 거위들이 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왠지 몹시 조용하군. 내가 카운티 축제 갔을 때 예쁜 가축 전시회장이 저런 커다란 창고 안이었거든. 그곳은 무척 시끄럽고 활기가 있었지. 여긴 정말 느낌이 안 좋아…할머니 아들이 우리를 여기 팔아 넘기려는 건가?” 


폴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집의 문이 열리며 할머니의 아들이 다른 남자와 함께 걸어 나왔다.  


“잘 부탁해요. 어머니는 병원에서 나오시더라도 요양원으로 옮기실 거고, 저도 곧 다른 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어머니가 자식처럼 아끼던 거위들인데 안타깝네요.” 


아리와 폴, 다른 모든 거위들이 남자의 말에 집중했다. 


“걱정 마세요. 미국에서는 거위 고기나 알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이 방법이 최고랍니다. 이 정도면 좋은 값에 파시는 거예요.”


고기나 알을 찾지 않는다는 말에 거위 장 안의 모든 거위들이 다 긴장했다. 


“알도 고기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어디에 쓴단 말이야? 우릴 다 죽여버릴 거면 여기까지 데려올 이유도 없잖아?”    


실버의 말에 폴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폴, 당신은 뭔가 알고 있는 거죠? 그게 뭐예요?”


그래도 폴은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닥만 쳐다보았다. 

     

“우리 모두 카운티 축제용 거위로 길러질 건가 보지. 그것 밖엔 없잖아? 우리도 제법 예쁜 거위들이라고!”


실버의 아들 위니였다. 그 말에 동의하는 거위는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의 아들과 농장주인 남자가 트럭으로 다가와서 거위 장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다 내려진 거위 장을 들고 창고 쪽으로 걸어가려는 할머니의 아들을 농장주인이 가로막았다. 


“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옮길 테니 여기 그냥 내리기만 하세요. 설마 거위 장이 다시 필요할 일은 없으신 거죠?”

“그야 그렇죠. 고맙습니다.”



할머니의 아들이 농장주인 남자와 악수를 나눈 후 차에 올라탔다. 니카가 슬픈 눈으로 차 밖을 바라보다가 아리와 눈이 마주쳤다. 니카가 신음하듯 가늘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헤어지기 싫은 마음을 표현했다. 아리는 이게 몇 번째 이별인지 더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다. 니카를 실은 차가 농장 부지를 벗어나 길가 도로로 사라졌다. 그 차가 완전히 모습을 감출 무렵 농장주인 남자가 창고로 다가가 자물쇠를 열고 창고 문을 활짝 열었다. 입구에 묶여 있던 험상궂은 개 두 마리가 날카로운 소리로 짖어댔다. 


농장주인은 중국 거위들이 든 거위 장부터 창고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폴과 연두 형제와 아리가 든 거위 장도 마침내 창고 안으로 옮겨졌다. 개들은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버릴 듯이 으르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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