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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22. 2022

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13

배도 고프고 날개가 얼얼할 정도로 기력이 떨어지자 아리는 문득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땅에 내려갔다가 다시 이번처럼 날아오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어떻게 해서 날 수 있었는지를 자세히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려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물이 있는 안전한 곳으로 날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동안 아래를 열심히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이 태어난 초승달 모양의 호수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곳이 초승달 모양이라는 말만 들었지 한번도 전체를 내려다 본 적이 없었다. 겨우 태어나 얼마 동안 눈에 익힌 몇 군데의 풍경과 식생과 냄새를 기억할 뿐이었다. 똑 같은 나무들은 어디에나 널려 있었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도 흔하게 있었다.  


할머니의 아들이 차를 몰고 아주 먼 곳으로 와버린 것이 틀림 없었다. 어디로 날아가야 고향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땅은 하늘만큼이나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날 수만 있게 되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당장 엄마를 찾으러 갈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세상은 아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복잡했다. 


낮게 뜬 구름보다 더 높이 솟아 올랐던 아리는 일단 호수나 연못에 있는 다른 기러기들을 판별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이까지 내려갔다. 산이 끝나고 드문 드문 인가가 나타날 무렵 집들 사이에 작은 저수지가 보였다. 그곳에 엄마를 닮은 다섯 마리의 기러기들이 자맥질을 하느라 엉덩이만 바깥으로 내놓고 있었다. 아리는 반가운 마음에 저수지 위로 날아 내렸다. 착지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워서 아리는 물 위에서 두세 번 중심을 잃고 굴렀다. 땅 위에서 그랬다면 목이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츠츳…나는 거 처음인가 봐? 다 큰 기러기가…?”


엄마 브리즈와 닮았지만 눈이 좀더 작고 옆으로 째진 기러기가 말을 걸었다. 아리가 물에 곤두박질치는 소리에 놀라 자맥질을 멈추고 고개를 든 것이다.


“안녕하세요? 아리라고 해요. 설명을 드리자면 긴데, 그 동안 거위들과 함께 지내다가 오늘 처음 날 수 있게 되었어요. 이륙도 착지도 쉽지가 않네요.”


말을 걸었던 기러기 주위에 다른 기러기들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모여들었다. 가만히 보니 둘은 부모이고 셋은 몸이 약간 작은 것이 아리처럼 청소년기의 기러기들이었다. 아까 말을 걸었던 기러기는 아리 또래의 소년 기러기였다. 


“아침에 대충 요기한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여기서 밥을 좀 먹어도 될까요?”


아리는 이들의 성격을 알 수 없어서 일단 공손하게 굴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아버지로 보이는 기러기가 앞으로 나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하지만 한 끼만 먹고 떠나야 한다. 보다시피 이 저수지는 아주 작아서 많은 기러기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어. 우리는 이곳에 정착해 사는 기러기들이고 이 동네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반대편 기슭 쪽에 기러기 몇 가족이 더 산다. 난 론이고 이쪽은 내 아내 릴리다.”  


아리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미친 듯이 풀을 먹기 시작했다. 다시 날기 시작하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작은 저수지여서 고향의 호수만큼 먹을 게 많지는 않았지만 이곳이 아니면 다른 곳으로 날아가서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허기가 포만감으로 바뀔 무렵에야 먹기를 멈추고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을 론과 릴리 가족에게 들려주었다. 막 탈출해온 푸아그라 농장 이야기를 들려줄 때 론 가족이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는 것이 보였다.  


“그런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다. 정말 끔찍한 곳이 다 있구나…. 그래 넌 혼자서 어디로 갈 작정이니?”

론 뒤에서 말없이 서 있던 릴리가 염려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브리즈와 체구도 목소리도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눈이 하얀 막에 덮여 있다는 점이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움직이는 것은 어색하지 않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엄마를 찾고 싶기도 하고, 엄마가 당부한 대로 자이언트 기러기 떼를 만나 계절여행에 합류하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이렇게 배가 불러서 다시 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리는 아까의 기억을 되살려 다시 달리면서 날개를 저어 보았지만 떠오를 듯하다가 곧 다시 몸이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다리도 땅에 닿고 말았다. 


“다시 나는 건 걱정 마라. 넌 지금 막 식사를 해서 몸이 무거우니까 그래. 다른 새들에 비해 몸이 크고 무거운 편인 기러기들은 식사하자마자 최대한 빨리 배설을 해야 한다. 몸이 가벼워야 날아오르는 속도도 빨라져. 듣자 하니 네가 그 동안 거위들과 함께 살면서 날 수 없었던 건, 언제나 식사직후에 나는 걸 연습했기 때문인 것 같구나. 푸아그라 농장에서 도망칠 때 쉽게 날 수 있었던 건 네 뱃속이 깨끗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지. 날개가 멀쩡하면 다 날게 되어 있다. 기러기가 다른 새와 다른 건 날아오를 때 다리와 날개를 동시에 사용해야 된다는 점이다. 물 위에 있을 땐 맹수들의 위협이 적으니 좀 천천히 날아올라도 되지만, 땅 위에 있을 땐 항상 위험에 대처해서 몸을 가볍게 비워놓는 게 좋다. 자, 일단 물 위에서 날아오르는 연습부터 해보자. 몸은 헤엄치는 자세에서 나는 자세로 바뀌어야 한다. 일단 목을 앞으로 쭉 내밀고 날개를 순간적으로 등 뒤까지 최대한 펴서 들어올렸다가 가슴 앞으로 재빨리 내밀면서 가슴 앞에 모인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는 거다. 그때 생겨난 공기의 흐름이 폭발적으로 몸을 위로 띄워 올리는 거다. 잘 보고 그대로 따라 해라.”


론이 물 속으로 들어가 자기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천천히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일단 날개를 치며 물위에 닿아있던 앞가슴과 배를 들어올려 이륙할 준비를 했다. 그러자마자 두 날개를 목과 평행하도록 끝까지 뻗어 올리면서 한 발을 내밀고, 날개를 재빨리 내려뜨리면서 가슴 앞으로 내밀 때 다른 발을 내밀었다. 그 동작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날개를 더 빨리 저으면서 두 발을 들어 올리는 것이다. 얼른 뱃속을 비운 아리는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론을 따라 달렸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겁이 나서 계속 다리를 들어올리지 못하자 뒤에서 듣고 있던 릴리가 소리쳤다. 


“물 위니까 떨어져도 괜찮아! 걱정 말고 다리를 들어올려! 네 날개를 믿어!”


릴리의 말을 듣고 마음을 진정시킨 아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래, 떨어져봤자 물에 가슴을 박는 정도다.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엔 약간 몸이 가벼워진다고 느낀 순간에 날개를 최대한 빨리 저으면서 한 발을 들어올렸다. 기우뚱하면서도 몸이 공중에 떴다. 나머지 발도 얼른 접으면서 날개의 힘에만 의존했다. 한동안 배가 물에 다시 닿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낮게 날았지만 온 힘을 다해 날개를 치자 점점 높이 솟아올랐다. 신기하고 통쾌해서 야호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속도를 낼 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꼬리깃털을 접어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잘 했다! 이젠 착륙이다! 물 위에서 착륙하는 걸 잘 봐둬라! 착륙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속도를 줄일 준비를 해야 한다. 착지하기 직전에 속도를 줄이면 그땐 이미 늦다.”


여러 바퀴째 아리의 머리 위에서 상승기류를 타고 맴을 돌던 론이 충분한 착지 거리를 두기 위해 저수지의 반대쪽 편으로 날아가서 180도 회전한 후 사선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날개 젓는 속도를 서서히 늦추다가 몸이 물에 닿기 직전에는 꼬리깃털을 활짝 펴고 두 발도 앞으로 내밀었다. 발가락 사이에 붙은 투명한 물갈퀴를 펼침으로써 속도를 늦추었다. 물에 가장 먼저 닿은 것은 물갈퀴 뒤축이었다. 발뒤꿈치가 물을 밀면서 몸의 균형을 잡은 다음 마지막으로 날개를 접고 배를 물 위에 대었다. 


“이륙할 때는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에서 날아오를 때가 많지만, 착지할 때는 더 좁은 공간에 내려야 할 때가 많다. 그러니까 정확히 방향과 위치를 잡아서 목표한 곳에 착지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날개를 너무 빨리 접어서는 안돼. 속도를 늦추는 동안에도 끝까지 날개를 저어서 너의 몸이 어느 정도 가볍게 떠 있도록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다리를 다치지 않는다. 물론 기러기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위에서의 이륙과 착지, 육지에서의 이륙과 착지 요령을 론에게서 배워서 연습하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아리가 론을 따라 유유히 날아다니게 되자 릴리와 세 아이들도 날아올라 함께 저녁 비행을 했다. 론은 해의 방향을 읽는 법과 바람의 방향과 강도에 따라 날갯짓을 조정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공중에서 매나 독수리의 추격을 당하거나 사냥꾼들의 총알이 날아올 때와 같은 위기 시에 날개를 접고 급강하하다가 마지막에 날개를 펴고 착지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론은 수컷치고는 몸집이 작은 편이었지만 차분하고 친절한 성품이었고 엄청난 분량의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론과 릴리의 설명을 들으며 그 근방의 지형을 파악한 다음 원래의 저수지로 돌아왔다. 밤이 되자 저수지 가장자리의 습지에서 잠자리를 준비하던 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우리도 몇 달 전에 너구리의 공격에 막내를 잃었다. 릴리와 이야기 해 봤는데, 아리 네가 원한다면 너를 우리 자식으로 입양할 수도 있다. 너 하나 정도는 우리가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거절해도 상관 없다. 내가 알기론 요즘이 북쪽으로 갔던 자이언트 기러기들이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때다. 몇 번인가 한밤중에 날아가는 자이언트 기러기들의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너는 그들을 오늘 밤에 만날 수도 있고, 내일 밤에 만날 수도 있다. 그 소리가 날 때 높이 날아올라 그들을 따라가면 그 무리에 합류하여 따뜻한 남쪽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그들은 단순히 이 부근이 아니라 온 세상 위를 날아다니기 때문에 세상 지리에 정통하다. 네가 엄마를 찾고 싶다면 일단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거다.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지금은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넌 마음을 정하고 선택해야 한다. 어영부영하다가는 때를 놓치고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고, 봄이면 계속 이곳에 머물고 싶어질 거다. 사실 어느 길이 최선일지 100% 알고 가는 기러기는 하나도 없다. 마음을 정하면 그 다음엔 그 길을 최선이라 믿고 날아가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깨달은 건 그렇다.”

 

릴리가 아리 곁에 다가와 부리로 아리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잊고 있던 엄마의 냄새가 기억나서 아리는 잠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좋은 기러기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한 가족으로 살게 된다면 외롭지도 않고 늘 편안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라던 폴의 말이 생각났다. 이제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론 아저씨, 릴리 아줌마, 고마워요. 저도 아줌마 아저씨랑 여기 계속 머물렀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엄마가 살아계시는 한, 저는 엄마를 포기할 수 없어요. 엄마와의 약속도요. 자이언트 기러기들을 따라가겠어요.”

론과 릴리가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대신 그들이 오기까지는 넌 얼마든지 이곳에 우리와 함께 머물러도 좋다.”

“네, 고마워요! 제 두 날개로 물 위에서든 땅 위에서든 날아오를 때마다 항상 아저씨와 아줌마를 생각할 거예요. 다시 이곳을 지나가게 되면 반드시 인사하러 들릴게요. 그런데 아저씨와 아줌마는 그냥 저수지에 상주하는 기러기들과는 다른 것 같아요. 아저씨와 아줌마도 계절여행을 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리의 물음에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건 릴리였다. 


“그럼! 우리도 자이언트 기러기들이야. 몸이 조금 작은 편이긴 하지만…. 우린 이미 스무 살이 넘었어. 그건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계절여행을 했다는 뜻이지. 보통 야생 기러기들은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단다. 론과 나는 오랫동안 거대한 자이언트 기러기 떼의 선두에서 계절여행을 이끌었지.”


의외였다. 론과 릴리가 신중하고 말이 없는 편이어서 나이가 꽤 많은 기러기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긴 세월을 계절여행을 해온 이들인 줄은 몰랐다. 이제까지 그들은 그런 것에 대해 아는 척도 하지 않았고 뽐내지도 않았다.



아리는 론과 릴리의 보호를 받으며 오랜만에 물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잠을 잤다. 론과 릴리는 아이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밤새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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