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리라 Mar 24. 2022

별 하나 떨어질 때 별 하나 태어나고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15

검은 무리 속에서 기러기 한 마리가 아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리는 이미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아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심장이 크게 뛰면서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넓고 튼튼한 어깨에 약간 각이 진 머리를 가진 기러기였다. 늠름하고 사나이다운 모습에 아리는 가슴이 설렜다. 아리 역시 그 기러기를 향해 속도를 냈다. 마침내 얼굴 표정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상대편 기러기는 아리의 주위를 크게 원 모양으로 돌면서 아리를 관찰했다. 두 기러기는 서로의 냄새를 맡고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에게서는 땀냄새와 함께 낯선 풀과 흙의 냄새가 났다.  


“넌 누구지? 이 밤중에 혼자서 우리 무리를 향해 날아오는 이유가 뭔가?”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리를 살펴보는 눈빛이 날카로웠지만 악의는 없어 보였다. 


“전 아리라고 해요. 저는 잃어버린 엄마 기러기를 찾고 있어요. 엄마를 찾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계절여행에도 동참하고 싶어요. 함께 데려가 주세요. 검은돌 론이 저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셨어요.”


검은돌 론이라는 말에 상대 기러기가 긴장을 풀면서 아리 옆으로 다가왔다.  


“검은돌 론을 만났단 말이야? 그분은 전설적인 지도자들 중 한 분이야.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아버지에게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지. 그렇다면 무조건 환영이다. 일단 우리 무리에 합류해서 나머지 이야기를 나누자. 날씨가 괜찮아서 우린 사흘 째 쉬지 않고 날고 있는 중이야. 참, 내 이름은 조이다. 엄마를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 우리 지도자님들을 만나서 설명해드려.”


아리는 조이를 따라서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이 높디 높은 곳으로 올라오는 동안에는 숨이 차고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었는데 정작 이곳에 다다른 후에는 날개를 계속 저어도 힘이 덜 들고 체온도 올라가지 않았다. 숨 쉬기도 편안하고, 한번 날갯짓할 때마다 더 시원하게 전진해서 마치 물 위를 헤엄치는 느낌이었다. 무리의 선두에서 날던 기러기들은 조이를 따라오는 아리를 순순히 맞아주었다. 그만큼 조이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무리의 선두에서 날던 기러기가 자리를 빠져 나와 뒤쪽의 아리와 조이에게 다가왔다. 그가 빠진 자리는 그 옆의 기러기가 자연스럽게 채웠다. 


“아버지, 이 아이 이름은 아리에요. 조금 전에 검은돌 론이 이곳까지 배웅해 주었대요!”

“나는 조이의 아버지 빅터다. 반갑다, 아리. 검은돌 론 선생과 정말 같이 있었더냐?”

“네! 그분 가족과 두어 주 같이 살면서 날기도 배우고 릴리에게서는 약초에 관한 지식들도 배웠어요.”

“그럴 수가! 나도 그분에게서 계절여행을 위한 수많은 지식들을 전수받았어. 몇 년 전 은퇴하신 후로 한번도 뵌 적이 없어서 어디로 가셨는지 궁금했는데 이 근방에 살고 계신가 보구나. 그렇다면 넌 무조건 환영이다. 릴리 아주머니도 눈이 멀기 전까진 우리들 중 아픈 기러기들을 수없이 많이 치료해주셨어. 넌 정말 운이 좋구나. 그래, 그 동안 어떤 일들을 겪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이야기 해보거라. 우린 당분간 착륙하지 않고 날다가 이틀 후 거대한 강 하구가 나오면 그곳에서 쉬어 갈 예정이다.”        


아리는 빅터와 조이를 비롯해서 아리의 주위에 모여든 기러기들에게 그 동안 자신이 겪은 일들을 모두 들려주었다. 진지하게 아리의 말을 경청하는 자이언트 기러기들의 모습을 보자 가족을 만난 듯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순박한 표정에 커다란 목청, 통쾌한 웃음소리가 특징적이었다. 지상의 작은 호수를 차지하려고 야비하게 굴던 하이 가족의 오만함도, 좁은 우리에서의 삶에 안주하며 잘난 척하던 거위들의 신경질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너의 엄마를 찾아주고 싶지만 문제는 네가 전혀 방향감각이 없다는 점이다. 엄마와 함께 살던 호수의 모양이 초승달을 닮았다는 것 말고는 그곳이 검은돌 론의 저수지에서 어느 방향에 얼마만큼 떨어진 거리에 있는지 알지 못하잖니. 게다가 우리는 며칠 동안은 지상에 착륙하는 일이 없을 테고 그 동안 네 고향과는 더욱 멀어질 게 분명하다. 너 하나 때문에 우리 전체의 계획을 변경하는 건 무리다. 내년 봄 다시 북쪽을 향해 날아갈 때 찾아보는 게 어떻겠니?”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아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기 시작했다. 지나친 낙담에 몸에 힘이 빠져 자기도 모르게 아래로 조금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조이와 조이의 엄마 니나가 아래로 내려와 부리로 아리의 어깨를 양쪽에서 붙잡고 날아올랐다.    


“시간은 빨리 간단다. 낙심하지 마라. 네가 반드시 엄마를 찾을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줄게. 그 동안 나에게 의지하렴.”


조이의 엄마 니나였다. 아리는 조이와 니나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다시 힘을 내서 스스로 날개를 젓기 시작했다. 미안한 얼굴로 빅터가 말했다. 


“이제 슬퍼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너의 새 가족이다. 우리 자이언트 기러기들은 모두 평등하다. 힘이 세다고 해서 힘이 약한 기러기를 지배하지도 않는다. 우린 모두가 하나의 큰 생명의 일부라고 생각하기에 나만 소중한 게 아니라 다른 기러기도 소중하다는 걸 안다. 우린 함께 느끼고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남이 죽으면 나의 일부가 죽는 것이다. 나는 너에 대해 너는 나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게 다소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너도 이제 곧 그 삶에 익숙해질 거다. 조이, 네가 지금부터 아리를 책임지도록 해라. 나이도 비슷한 것 같으니 잘 됐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아리에게 가르쳐 주거라. 아리는 이제 너의 새 형제다. 할 수 있겠지?”

“네!”


조이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아리를 향해 날아올 때의 늠름한 자세 때문에 꽤 나이가 있는 기러기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아리보다 겨우 한 살 많았다. 


“이제 오빠라고 불러.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계절여행도 2년째 하는 거니까!”


붙임성이 좋은 조이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기러기 같았다. 당장 오빠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그 순간 초승달 모양 호수에 남겨두고 온 세 명의 오빠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미안한데…그냥 조이라고 불러도 되지?”


아리의 말에 조이는 실망하는 기색이었지만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해…”


조이와 나란히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보름달을 향해 날아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몸 아래에는 한 층의 구름이 지상을 덮은 채 희미하게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서로의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을 느끼며, 함께 호흡하며 같은 속도로 날아가노라니 정말 조이와 자신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살 때 듣던 개구리 울음소리도 차 소리도 사람들의 집에서 나던 소리도 없는 이곳은 너무나 고요해서 함께 날아가는 새들의 숨소리와 날개 펄럭이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아리 자신의 심장소리처럼 느껴졌다. 


이 거대한 무리가 모두 나의 가족이라니… 어서 해가 떠서 환한 햇살 아래에서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보면서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고향에 온 느낌, 혼자가 아닌 느낌이 좋았다. 어떤 땅의 어떤 장소가 아닌 바로 이 하늘과 땅 사이의 막힘 없는 공간이 좋았다. 


다른 기러기들도 분명 날개를 꾸준히 저으며 날고 있었지만, 가만히 보니 눈을 반쯤 뜬 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진파랑의 어둠 속에서 커다랗고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날아가노라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가끔씩 별들 사이로 빠르게 떨어지는 유성들과 먼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갯불들은 야간 비행에 더욱 신비한 아름다움과 재미를 더했다. 


아리는 조이도 그걸 봤는지 궁금해서 조이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조이와 눈이 마주쳤다. 조이는 유성이 아닌 아리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는 또 한번 심장이 크게 울리는 걸 느끼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아리, 너 저 별이 떨어지는 게 뭘 뜻하는지 아니?”

“글쎄…그냥 아름답다고만 느꼈을 뿐인데…”


아리의 대답에 조이가 다정한 미소로 답례했다. 조이의 날개 깃털이 아리의 날개 끝에 닿을락 말락한 거리로 다가왔다. 그의 날개깃털이 아주 살짝 자신의 날개 끄트머리에 닿을 때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저 별이 하나 떨어질 때 여행 중인 자이언트 기러기 한 마리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래.”

“그래?”


아리가 깜짝 놀라 돌아보자 조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정말 그렇다는 건 아니고…자이언트 기러기들에게 내려오는 전설에 그런 이야기가 있어. 나도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긴데, 우주와 땅과 하늘을 지은 큰날개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이언트 기러기들의 수만큼 밤하늘의 별을 만들어두셨대. 캄캄한 밤에 여행을 해야 하는 자이언트 기러기들의 길을 밝혀주기 위해서. 이 세상의 자이언트 기러기들이 하나씩 태어나 이름을 얻을 때 큰날개님도 새로 그 이름의 별을 만드시는 거야.”

“그럼, 저 별들 중에 아리라는 이름의 별도 조이라는 이름의 별도 있다는 얘기야? 그게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게 사실일 거라고 믿어. 그게 사실이 아닌 것보다는 그게 사실인 게 더 좋으니까.”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난 이렇게 여행하는 동안 나이든 기러기나, 몸이 약한 기러기, 어린 기러기, 병든 기러기가 가망 없이 고개를 저으며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는 걸 수없이 봤어. 갑자기 불어닥친 거센 바람을 거슬러 날다가 결국 힘이 빠져 추락하는 모습도 보았어. 하늘 한 가운데에서 독수리 무리에게 사냥을 당해 죽은 형제도 있었고…. 그럴 때 그 별 이야기가 큰 힘이 되더라. 그렇게 많은 기러기들이 여행 중에 죽지만 이듬해 봄이면 살아남은 기러기들에게서 수많은 아기 기러기들이 태어나잖아. 그토록 많은 별들이 떨어져 내리는데도 여전히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이유를 알겠더라고….”

“새로 태어나는 기러기들 수만큼 새로 별들을 만들어 달기 때문인 거야?”

“바로 그거야!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지?”


아리는 그건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해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이 통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니까.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어. 낮이라면 아래쪽을 내려다볼 수 있으니까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지만, 높은 구름이 달을 가린 캄캄한 밤이나 오늘처럼 발 아래 구름이 지상의 풍경을 완전히 덮어버린 날에는 어떻게 길을 찾아갈 수 있지?”


아리가 묻자 조이의 얼굴이 다소 심각하게 바뀌었다.


“나도 지금 그걸 배워가는 중이야.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어. 밤에는 별의 위치와 중력의 세기와 바람의 방향과 냄새에 근거해서 날아가는 거래. 나도 이제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파악하는 건 터득했어. 기본적으로 우리 몸 속에는 동서남북을 감지할 수 있는 나침반이 들어 있대. 길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날씨를 잘 읽는 것도 중요해. 날씨가 너무 나쁘면 잠시 둘러가기도 하고,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무조건 빨리 가겠다는 생각에 날씨를 무시하고 서둘렀다간 오히려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어. 그런 융통성과 여유가 생기려면 적어도 3~4년은 무리와 함께 계절여행을 해야 한대.”   


동쪽 하늘이 어느새 투명한 파랑으로 바뀌면서 땅 끝에서 피처럼 붉은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창공에서 처음 맞는 아침, 아리가 새로 태어나는 아침이었다. 지금까지 어둠에 묻혀 있던 산과 들과 강과 동물들과 인간의 집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낮게 떠 있는 투명한 구름들 사이로 몇 개의 호수를 발견했지만, 어디에도 초승달 모양의 호수는 없었다. 게다가 날지 못하는 브리즈가 초승달 호수를 떠나 어디로 걸어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엄만 어디 계세요?’ 



엄마를 닮은 기러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건 큰 위안이었지만, 그럴수록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날개를 계속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 그것이 기러기의 삶이라는 걸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그 자리에만 있을 것 같던 달과 별들이 어느새 먼 곳으로 이동해 있듯이 아리도 언젠가 엄마에게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환한 햇살을 받아 연한 파랑색으로 바뀔 무렵 터질듯한 그리움은 가슴 벅찬 설레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색채를 되찾는 과정을 바라보는 일은 황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전 14화 밤하늘에서 헤어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