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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25. 2022

향기로 그려진 지도를 따라서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16

아리는 조이 가족과 함께 따뜻한 남쪽 땅에 무사히 도착했다. 주변에 인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 넓어서 바다 같은 느낌을 주는 호수였다. 나무들은 더 낮고 넓게 가지들을 뻗어 커다란 그늘을 만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덩치 크고 다리 긴 물새들이 훨훨 날아다녔고, 어떤 새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잠수를 해서 물고기를 잡아 나왔다. 잠수를 하는 새들은 한번 물고기를 잡은 후에는 낮은 나뭇가지에 앉아 두 날개를 활짝 편 채 젖은 깃털들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호숫물은 따뜻했고 날씨는 초여름처럼 푸근했다. 


“이게 이곳의 겨울날씨야. 북쪽에서라면 강물과 호숫물이 다 얼어붙어서 우린 헤엄도 못 치고 얼어 죽었을 거야. 달리 보면 우리는 한 겨울에 한 여름의 땅을 찾아온 거라고 할 수 있지. 봄, 여름, 가을, 여름의 반복이랄까. ” 


조이는 온몸에 물을 튀기며 목욕을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야, 꼭 여기까지 내려와야 하는 걸까? 내 말은…중간쯤에서 착륙해서 겨울을 날 수도 있는 거였잖아.”


조이는 목욕을 멈추고 아리를 쳐다보았다. 


“아…나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 아버지 말씀은, 그렇게 되면 자이언트 기러기들의 장거리 여행 능력은 쇠퇴하고 말 거래. 너도 알다시피 중간 지역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기러기들은 그런 저런 이유로 덜 힘든 삶을 선택한 건데, 결과적으로 그들은 멀리 날아갈 수 있는 능력도 용기도 상실하게 된 거거든. 그래서 너를 구박하던 그 아줌마 기러기처럼 작은 호수에 머물러 살면서 독재를 하고 먹이 때문에 경쟁적으로 굴게 되는 거지. 극단적으로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길들어 거위가 되어버리는 기러기들이 생기는 거고…. 힘들더라도 매년 이 훈련을 하는 게 우리 자이언트 기러기가 원래 갖고 태어난 잠재력을 계속 유지하는 방법이래. 더 궁금한 거 있으면 우리 아버지에게 물어봐. 너도 어서 목욕하고 나랑 신나게 수영하러 가자.”


그 동안 창공에서 난기류를 만나 추락의 위험을 맞기도 하고, 대양 위를 보름씩이나 쉬지 않고 나느라 피로와 허기와 싸우기도 하고, 점점 힘을 잃어 마침내 바다로 추락하는 기러기들을 보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럴 때는 할머니 집에서 거위들과 함께 편안하게 먹이 걱정 없이 살던 때가 그리워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일출과 일몰마다 펼쳐지는 놀라운 색채의 향연과 다양한 곳에서 불어오는 그 무수한 향기들을 즐기고, 세상 구석구석을 내려다보고 관찰하는 재미에 취해 하늘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어느새 망각하고 마는 것이다. 


여행 중에 잠시 들렀던 곳에서 맛보았던 갖가지 이색적인 먹이들의 맛도 한 몫 했다. 지상에 머물러 살 때는 해는 늘 똑같이 떴다가 지고, 별도 달도 늘 똑같이 떴다가 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늘 높이에서 여행하다 보니 단 하루도 똑 같은 날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아리도 매일 매일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아리가 한숨을 쉬는 걸 보고 어느 틈엔가 다가온 니나가 아리의 등에 물을 끼얹어주었다. 


“첫 비행인데 참 잘 해냈다, 아리야. 이렇게 살아남아서 겨울 고향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우린 큰날개님께 감사해야 한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오늘은 일단 맘껏 쉬어라.”


니나는 이곳을 ‘겨울 고향’이라고 불렀다. 이들에게는 겨울 고향과 여름 고향, 이렇게 두 개의 고향이 있는 것이다. 니나는 틈만 나면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가족 중의 누가 아파도 니나는 기도를 시작했다. 반면 아리는 타고난 후각에다 릴리가 전수해준 지식 덕분에 약초를 뜯어서 아픈 기러기들을 치료해주곤 했다. 


장거리 비행을 하는 동안 아리는 자기 내면의 어떤 능력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창공에서 수없이 다양한 향기를 맡으면서 그 냄새가 불어온 지형과 그 지대의 수목을 연관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태어나 자란 초승달 호수에서 나던 냄새와 같은 냄새는 아직 어디서도 맡아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기억하는 건 은은한 들국화 향기를 풍기던 엄마의 냄새였다. 자이언트 기러기의 몸 속에는 지도와 나침반과 시계가 내장되어 있다던 엄마의 말이 맞다면 아리의 지도는 향기로 그려진 지도일 것이다. 그러자 작은 싹과도 같은 소망 한 가닥이 단단한 절망의 바위를 뚫고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언젠가 퍼즐을 맞추듯이 기억 속의 향기와 일치하는 지형을 찾아낼 날이 올 것이다. 그 지도를 완성하는 데 몇 년이 걸린다 하더라도 아리는 엄마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리야, 어서 나를 따라와봐.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호숫가 낮은 언덕이 함께 날아온 자이언트 기러기 무리로 덮여 있었다. 목욕을 마친 기러기들은 육지로 올라가 닥치는 대로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조이는 기러기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며 호수 바깥으로 아리를 이끌고 갔다. 기러기 무리들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조이는 계속 앞장서서 걸었다. 적이 나타나면 어떡하나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리는 내색하지 않았다. 낮은 풀들로 덮인 지역과 키 작은 나무들이 우거진 경사진 숲을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바위 언덕 위에 올라간 조이가 비로소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조이가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아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그곳에는 온통 연보라와 노랑, 주홍, 분홍의 들꽃들이 피어나 있었고 언덕의 발치는 호숫물에 잠겨 들었으며, 호수 한 가운데엔 이름 모를 노란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들이 늘어선 섬이 있었다.  


“이곳 비탈에다 재작년과 작년, 내가 저 꽃씨들을 심었어. 내게는 작은 실험이었지. 이 근방을 날면서 발견한 예쁜 꽃과 풀의 씨앗들을 수집해서 이곳에 흩뿌렸거든. 언젠가 평생 함께 살고픈 짝을 만나게 되면 이곳에서 결혼해달라고 부탁하려고.”

“와…그 기러기는 정말 행복하겠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청년이라면 왜 반대하겠니?”

“정말?”


조이가 정색을 하고서 아리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가만히 조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멀리서 조이와 아리를 걱정스럽게 찾는 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조이는 못 들은 척했다.


“아리, 내 색시가 되어주겠니?”

“뭐라고? 난 아직… 아니 우린 아직 너무 어리잖아.”


조이는 더욱 진지한 얼굴로 아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야. 둥지를 짓는 결혼은 나중에 하더라도, 짝은 미리 정할 수 있는 거래. 지금부터 결혼을 전제로 너랑 정식으로 사귀고 싶어.”


아리는 이미 들꽃 향기들로 황홀한 상태에서 조이의 고백을 듣자 행복에 취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나도 첫눈에 너에게 반해버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아리는 대답 대신 눈을 내리뜨고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조이의 목에 기댔다.      


“넌 이제 혼자가 아니야. 봄이 오면 우리 함께 너의 엄마를 찾으러 가자. 약속할게. 그리고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북쪽의 여름도 보여주고 싶어.”


조이가 아리의 볼에 입맞춘 후, 아리의 입 속에 연보라색 꽃을 하나 따서 넣어 주었다. 알싸한 향기와 꿀맛을 머금은 꽃이었다. 


“이제 저 섬으로 함께 탐험을 떠날까? 저 열매 맛이 궁금하지 않니?”


조이가 한발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리도 조이를 따라 달렸다. 때마침 언덕에 와 부딪힌 바람이 역풍이 되어 솟아오르고 있었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아리와 조이는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힘차게 섬을 향해 날아가는 동안 아리는 조이가 있음으로 인해 온 세상을 가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용기와 배짱이 샘솟기 시작했다. 이젠 그와 함께라면 이 세상 끝까지라도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아빠와 날지도 못하면서 호수로부터 추방을 당한 엄마 얼굴이 떠오르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미 알아버린 슬픔은 그림자처럼 언제나 삶의 한 영역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가 이곳에 오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인데도 아리를 살리고자 자기 목숨을 바친 폴아저씨, 아리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자이언트 기러기 무리를 만나도록 최선을 다한 론과 릴리까지... 자신이 눈 감는 그날까지 그들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리는 나란히 날고 있는 조이가 자기를 돌아볼 때마다 환한 미소를 보여주려 애썼다. 실제로 신나는 것보다 두 배로 신나는 것처럼 소리도 질렀다. 조이가 아리의 얼굴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면 아리의 웃는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을 것이다. 아리는 조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장난을 치듯 90도로 방향을 꺾어 아래로 내려갔다. 언제든 먼저 움직이면 눈물과 나약함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아리는 앞으로 조이에게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엄마가 위험을 무릅쓰고 아리를 알에서 꺼내주었던 것처럼, 아빠가 제어팰콘과 끝까지 싸웠던 것처럼, 아리는 용기있는 자이언트 기러기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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