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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23. 2022

밤하늘에서 헤어지다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14

론과 릴리 가족과 보낸 첫날밤, 아리는 너무 깊이 잠든 나머지 밤하늘에 거대한 자이언트 기러기 한 무리와 스노우 기러기 한 무리가 차례로 날아가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은 오로지 불침번을 서던 론 뿐이었다. 그는 밤새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침이 되자 론은 온 가족과 아리를 불러모아 근처의 산악지대로 데려갔다. 수십 개의 산봉우리들을 넘어 날아가자 가장 높은 산 위에 호수가 하나 나타났다. 산속이어서 유독 공기가 깨끗하고 물안개마저 피어올라 신비로운 기운을 자아냈다. 그 호수와 작은 물줄기가 만나는 쪽에 꽤 넒은 늪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론의 지시를 따라 아리도 그곳으로 내려갔다. 부들이나 마디 풀 같이 아리가 어렸을 때 많이 본 수생식물들도 있었지만, 전혀 처음 보는 형태와 색채의 풀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리야, 넌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 하니까 몇 주간 잘 먹어두는 게 필요할 거다. 당장 자이언트 기러기 떼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력이 예비되어 있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여기는 우리가 한 달에 한번씩만 오는 곳으로 이 근방에서 가장 영양가 풍부한 먹이가 많은 곳이다. 이곳을 알고 있는 기러기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 이 산에는 산삼을 비롯해서 온갖 약초가 많이 자란다. 게다가 동물의 시체와 풀들, 나무들이 오랫동안 쌓여서 형성된 검은 흙 속에 풍부한 먹이들이 숨어 있다. 지금부터 두어 주일 정도 너를 여기 데려올 테니 배가 부르더라도 최대한 많이 먹어두어라. 내가 보기엔 넌 아직 몸이 더 자랄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


아리는 콧구멍으로 그 풍부한 향기들을 들이마셨다. 물풀들이 깊이 뿌리 내린 진흙을 조금 떠서 먹어보니 이제껏 다른 곳에서 맛본 어떤 흙보다 많은 씨앗과 고소한 덩어리들이 씹혔다. 이 검은 흙 자체가 보약 같았다. 아리는 론의 말대로 그 습지에 있는 먹이들을 고루고루 맛보며 포식했다. 릴리는 어떤 냄새가 나는 풀이 배탈을 가라앉히는지, 어떤 풀이 원기를 회복시키는지, 어떤 풀이 독이 있는지 하나 하나 가르쳐 주었다. 물맛도 뛰어났고, 그곳의 공기를 숨쉬는 것만으로도 몸 안이 상쾌하게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실컷 먹고 헤엄치면서 다리의 근육을 강화한 후 다시 식사를 하고, 론에게 비행 훈련을 받은 후 한번 더 밥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기를 이주일 가량 지속했다. 그 사이에 아리의 몸은 놀랍게 균형이 잡혔고, 날개와 목도 길어졌으며 무엇보다 날개깃털이 더욱 길게 자라났다. 


“놀랍구나! 넌 진정한 자이언트 기러기의 후예가 맞다! 이 큰 날개를 봐라! 길고 두꺼운 목과 가슴, 바로 눈 밑까지 올라온 깨끗하고 흰 무늬가 그걸 입증한다. 네 부모님이 너를 봤다면 무척 자랑스러워하실 거다!”


론의 칭찬에 아리는 기쁘면서도 한편 마음이 아려왔다. 론과 릴리를 떠나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리를 도와주는 그들에게 이미 깊이 정이 들어 버렸다. 반면 아리는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아리를 돌보느라 자기 아이들은 뒷전이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아저씨 아줌마의 은혜를 갚아드릴 수 있을까요?”


론과 릴리가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 짓더니 릴리가 날개로 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이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움이란다. 너도 언젠가 그런 이들을 만날 때 그들을 조건 없이 돕는다면 그게 우리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며칠 후 막 잠들려고 하던 아리는 하늘 멀리서 들려오는 기러기 떼의 함성에 눈을 떴다. 아직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였지만 틀림없는 기러기 소리였다. 눈을 떠보니 론과 릴리는 이미 깨어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와 눈이 마주치자 론과 릴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름달이 떠서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지금 날아오르면 멀리서 날아오는 기러기 떼가 머리 위를 통과할 즈음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론이 잠들어 있던 아이들 셋을 차례로 깨웠다. 


“얘들아 일어나거라. 우리 모두 아리를 배웅하러 가자.”


론의 말은 뜻밖이었다. 아리는 때가 되면 자기 혼자서 날아올라야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배웅을 해준다니 마음이 든든했다. 달빛으로 환한 물 위로 론이 앞장서서 헤엄쳐 나가자 릴리와 아이들이 따라 헤엄쳤고, 아리가 제일 뒤를 따라갔다. 론을 중심으로 다른 기러기들이 ‘ㅅ’자 대형으로 조금씩 뒤로 옆으로 물러서며 대형을 이뤘다. 이렇게 하면 날아가는 동안 서로 날개를 부딪히지 않으면서도 함께 공기 저항을 줄여서 수월하게 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모두 이륙 준비 됐나?”

“네!”


론의 물음에 나머지 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제 힘차게 날아오른다, 도움닫기 준비!”


론이 날개를 힘차게 저으며 가슴을 들어올려 물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론이 달리는 것을 보며 릴리와 나머지 기러기들도 물방울을 튕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론이 가장 먼저 날아오르자 그 뒤를 릴리와 세 형제, 아리가 따라 날면서 물 위에서부터 만든 대형을 조금씩 확대했다. 계절여행을 하는 자이언트 기러기 떼는 한번 날기 시작하면 기상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몇 날 며칠을 잠자지 않고 날아가기 때문에 꽤 높은 고도에서 난다고 했다. 그 높이까지 솟아오르는 것 자체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으므로, 그 먼 길을 배웅한다는 건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론 아저씨, 릴리 아줌마, 정말 고마워요!”


아리가 론 옆으로 다가가 크게 소리쳤다. 론이 아리를 살짝 돌아보았다. 


“괜찮다. 네가 훌륭한 자이언트 기러기 무리의 일원이 된다는 게 생각만 해도 뿌듯하구나. 하하하.”


론이 그렇게 시원하게 웃는 건 처음 봤다. 선두에서 빠른 속도로 바람을 가르느라 론은 더 이상 입을 열기 어려웠다. 무리는 작은 물방울들로 이루어진 구름 지대를 통과했다. 아리는 혀를 내밀어 그 물방울의 맛을 보았다. 신기해 하는 아리 옆에서 릴리가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구름은 전혀 위험하지 않지만 어떤 때는 거대한 산만큼 솟아오른 쌘비구름과 마주칠 때가 있단다.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서 그냥 통과해야 하는데 앞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컴컴한 데다 번개까지 치면 더욱 위험하단다. 사실 몇 년 전 남쪽으로 여행하던 중에 그런 구름과 마주쳤지. 많은 기러기들이 거센 얼음 비와 번개에 맞아 추락했고, 우리 딸 하나도 날개를 다쳤어. 하는 수없이 그 아이를 이 근방의 호숫가에 내려놓고 떠나야만 했지. 20년 세월에 새끼들을 열여섯 번씩이나 낳아 기른 만큼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아이를 잃고 나서는 슬픔을 극복할 수가 없었어. 너무 많이 울어서였는지 결국 눈병에 걸려 시각을 잃게 되었어. 아마 우리가 너무 늙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래서 작년에 론과 의논해서 더 이상 계절여행을 하지 않고 이 근방에 정착해서 살면서 우리가 두고 간 딸을 찾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약속했어. 사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잠시 그 딸이 돌아온 줄 착각했어. 목소리가 너무 닮아서… 론의 말로는 얼굴도 비슷하다는구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아줌마에게서 우리 엄마 냄새가 나서 좋았어요.”


릴리와 대화하면서 올라가다 보니 먼 거리를 날아올랐는데도 힘든 줄 몰랐다. 이대로 가다가는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에도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 높이까지 날아오르자 강한 기류가 그들의 몸을 들어올렸다. 론이 시키는 대로 날개를 크게 펼친 상태에서 손끝의 깃털들과 꼬리의 깃털들을 모두 활짝 폈다. 그러자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바람이 그들을 앞으로 싣고 가주었다. 


“날개를 무조건 힘차게 젓는다고 해서 빨리 나는 게 아니란다. 바람을 잘 읽고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힘을 아껴두었다가 필요한 순간에 집중적으로 쓸 수 있거든. 특히 장거리 여행을 하려면 쉽게 피곤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무리의 선두에서 비행을 이끄는 건 경험이 많고 비행의 요령을 잘 알고 있는 기러기들이라야 한다. 무리 전체의 성공적인 계절여행이 바로 그 지도자급 기러기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너도 언젠가는 그런 기러기로 성장할 수 있겠지.”


론은 마지막까지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개들이 일제히 짖는 듯한 기러기 떼의 외침이 더욱 가까이 들리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이별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아리야, 이제 우리는 내려가야만 한다. 부디 멋진 철새가 되거라. 그리고 엄마를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마라! 참, 혹시 저 기러기 무리들이 너의 배경을 의심하면 ‘검은돌’ 론이 이곳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말해라.”


론과 릴리는 아리를 남겨둔 채 자기들만의 대형을 이루어 하강하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아 그들의 얼굴, 목, 날개가 생생하게 보였다. 아리는 그들의 얼굴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잘 가요 론 아저씨, 릴리 아줌마! 두 분도 딸을 꼭 찾으시길 바라요! 저도 내년에 꼭 두 분을 만나러 돌아올게요!”

“그렇게 하렴! 이곳의 지형과 냄새를 잘 기억해 두어라! 행운을 빈다!”


그들은 날개를 일자로 편 다음 날개가 지평선과 수직이 되도록 오른쪽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참, 그런데 아저씨 아줌마의 헤어진 딸의 이름은 뭔가요? 저도 찾아볼게요!”

“브리..즈야! 너처럼 예쁜 자이언트 기러기란다! 날개를 다쳐서 너처럼 날진 못하지만…”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브리즈라고 말했다. 이미 론과 릴리는 한참 낮은 곳으로 내려간 후였다.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아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바로 눈 앞에서 자이언트 기러기 떼가 다가오고 있었다. 론을 따라 내려가서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지금 그들을 따라가면 다시 자이언트 기러기 무리를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아리는 아쉬움을 가슴 깊이 묻은 채 자이언트 기러기 떼를 향해 힘차게 날개를 젓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기러기 떼가 빛나는 별들로 수 놓인 밤하늘을 배경으로‘ㅅ’자가 여러 개 겹친 대형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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