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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19. 2022

싸움에 이기려면 내가 맞는 아픔도 감수해야 한다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7

“얘들아 어서 일어나라! 늦잠은 허용되지 않는다!”


일리의 거칠고 굵은 목소리에 아리는 금방 잠이 깼다. 자는 동안 엄마가 가버릴까 봐 계속 깨어 있으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이다. 둥지 벽 안쪽으로 튀어나온 마른 나뭇가지 한 가닥을 붙잡고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펴 보았으나 이미 브리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이와 일리가 시끄럽게 법석을 떠는 버즈와 포시를 데리고 둥지를 마구 흔들어댔다. 


“엄마, 엄마, 엄마!”


아리는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브리즈는 이미 떠나버린 것이다.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 해야 할 일들이 태산이다!”


하이가 잠이 덜 깬 아리 형제들을 부리로 쪼면서 하나씩 둥지 밖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아리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자기가 너무 심하게 울부짖으면 형제들도 곧 사실을 알아차릴지 모른다.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난 건 모두 내 책임이니까, 내가 형제들을 보호해야 한다. 이제 누구보다 의젓하게 행동할 것이다. 


하이와 일리는 잠이 덜 깬 아리 형제들을 강 하구 쪽 습지로 이끌었다. 강과 호수가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작은 섬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맛있는 먹이가 많이 있다고 들었지만 언제나 하이 가족이 차지하고 있어서 그냥 지나가면서 구경만 했던 곳이다. 


“어서 올라가서 밥을 먹도록 해. 하지만 향기로운 야생 부추와 들국화순은 먹지 않도록! 그건 우리 버즈와 포시가 좋아하는 거니까. 너희 엄만 너희를 키울 자신이 없어서 어젯밤 도망쳤다. 나한테 애들을 맡아달라고 하도 간절히 부탁해서 내가 너희들을 입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먹여주고 보호해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우리 버즈와 포시에게 잘 해야 한다.”


아리는 기가 차서 하이를 쏘아보았고, 충격을 받은 피트, 홍크와 토트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 엄만 잠깐 여행을 떠난 거예요. 도망 친 게 아니라….”


피트가 맏이답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냐? 네 엄마가 너희들에게 거짓말을 했구나. 어제 저 말썽쟁이 아리가 제멋대로 둥지를 벗어났다가 왜가리의 표적이 된 걸 우리가 겨우 구해줬다. 몰랐니?”


피트가 아리를 쳐다보며 하이의 말이 진짠지 눈으로 물었다. 길게 설명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하이의 강한 기세에 눌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우린 입양된 거야… 엄마가 도망친 건 아니지만 떠난 건 맞아….”


아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토트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곧 홍크도 흙바닥을 뒹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죽겠군. 어서 밥이나 먹어. 지금 안 먹으면 하루 종일 굶길 테다!”


아리가 홍크를 일으켜 세워 새로 돋은 풀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찰기 흐르는 진흙 때문인지 처음 맡아보는 향기로운 풀들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우리 이거 먹고 얼른 자라서 엄마 찾으러 가자. 아리는 홍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눈앞에 부드럽고 통통한 잎에 거부할 수 없는 향기가 풍기는 풀이 있었다. 홍크와 함께 그 이파리를 한쪽씩 뜯어서 씹어보았다. 이제까지 먹어본 풀들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쌉싸름하면서도 매콤하고 달콤하면서도 고소했다. 홍크도 그 맛에 잠시 슬픔을 잊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아리와 홍크는 거센 힘에 떠밀려 뒤로 나뒹굴었다. 


“야생 부추는 먹지 말라고 했지?”


하이였다. 그녀가 굵은 목을 구부려 아리와 홍크를 밀어낸 것이다. 


“버즈야, 포시야, 여기 야생부추가 더 남아있구나. 어서 와서 마저 먹어라!”


이미 이곳 저곳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포식하고 있던 버즈와 포시가 조금 전 아리와 홍크가 먹던 야생 부추를 먹으러 왔다. 야생 부추를 먹지 않으려면 적어도 야생 부추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아리는 멍이 든 엉덩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맛없는 풀과 진흙만 먹더라도 엄마와 함께 사는 편이 더 행복했다. 앞으로 이런 설움을 수없이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엄마는 결국 우리를 이렇게 버려두고 갈 거면서 자이언트 기러기 운운한 거구나. 여기서 굶어 죽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난 그 따위 자이언트 기러기의 전설 따위는 믿지 않을 거다. 해마다 길고 지루한 여행을 반복하는 철새 따위 내가 알 바 아니다. 아리는 엄마가 자기 형제를 책임 없이 버렸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그럴수록 엄마가 더욱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을 때까지 엄마를 미워하기로 결심했다. 


“이제 새끼가 여섯 마리로 늘어나셨네요? 능력 있으세요!”


좁은 시내를 헤엄쳐 가던 어른 기러기 몰리가 하이와 일리에게 말을 걸었다. 


“능력 있는 게 아니고, 브리즈가 혼자 고생하는 게 불쌍해서 내가 입양하기로 한 거야. 튼튼한 어른 기러기들이 늘어나야 우리 무리가 발전하지.”


하이는 우쭐하여 가슴을 한껏 부풀리고는 고개를 두어 번 까딱거렸다. 이곳에서는 새끼가 많은 게 자랑인 모양이었다. 아리는 아니꼬웠지만 이제 하이에게 대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랬다가는 주변의 가족들만 난처한 지경에 빠진다는 걸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다.     


하이와 일리는 대체로 아리 형제들에게 무관심했다. 그들이 하지 말라고 한 것만 지키면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대신 언제나 버즈와 포시가 한번 포식하고 지나간 자리에서 밥을 먹어야 했고, 잠을 잘 때에도 버즈와 포시가 잠든 둥지 바깥의 풀밭 위에서 잤다. 견딜 수 없는 건 버즈와 포시의 심술궂은 태도였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은 토트와 아리는 언제나 짓궂은 장난의 대상이었다. 높은 바위 위로 데려가서는 거기서 아래로 뛰어내리라고 강요하거나, 쓰고 맛없기로 유명한 풀을 먹으라고 하거나, 자기들이 막 지린 풀똥 위에서 씨름을 시키거나, 몸에 묻은 똥을 씻어야 하는데 물에 뛰어들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도 잘 참아오다가 하루는 토트가 이상한 버섯을 먹고 몹시 아팠다. 토트는 먹기 싫어했는데 버즈가 강요해서 먹은 것이었다. 열이 오르고 계속해서 구토를 하는 토트를 위해 아리는 열심히 약초를 찾아다녔다. 하이가 발견하면 토트를 내다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연습을 해서인지 아리는 다른 기러기들이 맡을 수 없는 냄새까지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아리를 포시가 발견하고 막아섰다. 


“너 그렇게 함부로 풀숲을 뒤지고 다니다가는 뱀한테 잡아 먹힌다. 몸이 조금 컸다고 안심하는가 본데, 넌 아직 겨우 들쥐만하다고. 뱀은 들쥐를 잡아먹거든!”

“저리 비켜. 그러니까 얼른 찾고 나와야 돼.”


포시를 밀치며 나가려던 아리는 포시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당하는 일이어서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아리는 날개에 묻은 흙을 털며 조용히 일어났다. 


“네가 냄새 좀 잘 맡는다고 아주 기세 등등한데, 그래 봤자 소용 없어. 너희 형제는 우리가 몸종으로 쓰기 위해 기르는 존재들일 뿐이야. 나중에 밥값을 시키려고 지금 밥을 먹이는 거라고. 우리랑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포시는 아리의 뛰어난 후각을 늘 질투했다. 딱 한번 아리가 약초를 찾아서 포시의 배탈을 고쳐주자 일리가 아리를 칭찬했기 때문이다.   


“흥, 걱정 마! 다 크면 우리 엄마를 찾아갈 거야. 그리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힘센 기러기가 되어서 여기보다 더 큰 호수에서 엄마랑 살 거야. 여기 살지도 않을 거니까 지위 어쩌고 같은 말 꺼낼 필요도 없어! 당연히 난 너의 몸종 노릇 같은 것도 하지 않을 거야. 너랑 이런 곳에서 먹이 경쟁하면서 살지 않을 거야. 오히려 난 네가 불쌍해! 넌 걸핏하면 이상한 거 잘못 먹고 아프잖아. 하이는 이전에도 여러 번 새끼들을 낳았으니까 너희가 별로 특별하지 않을 걸? 너도 조금만 늦게 태어났으면 알 채로 버려졌을 거야!”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화가 나서 퍼부을 때는 시원했지만, 이 말이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니 후회가 밀려왔다. 분개한 포시가 온몸으로 아리를 덮쳐 넘어뜨렸다. 아리도 오늘은 그냥 맞고만 있지 않기로 했다. 맞아서 아플까 봐 두려워하면 계속 방어하는 데만 급급하게 된다. 하지만 고통을 참기로 각오하면 상대를 공격할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아리는 자신의 목을 누르고 있던 포시의 손을 이빨로 힘껏 깨물었다. 포시가 잠시 손을 뗐을 때 이 때다 하고 두 발을 들어올려 발톱으로 포시의 얼굴을 할켰다. 포시가 얼굴을 가리며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벌떡 일어나 이마로 포시의 얼굴을 서너 번 박은 다음 재빨리 포시의 목 뒤쪽을 부리 끝으로 세게 쪼았다. 이제까지 아리가 맞서 싸운 적이 없었기에 포시는 방심했던 것이다. 아리는 재빨리 몸을 빼내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이 어느 방향인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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