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 기러기 아리-5
모든 기러기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벽, 아리는 홀로 잠에서 깨어 옆에서 잠든 형제들과 둥지 옆 물속에 한 다리로 선 채 꾸벅 꾸벅 졸고 있는 브리즈를 보았다. 동쪽 산 위에서 가느다란 띠처럼 붉은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지만 짙푸른 새벽하늘을 밀어 올리려면 한참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해가 어느 정도 솟아올라야 붉은 어깨 까마귀들이나 온몸이 새빨간 카디널, 다이빙으로 물고기를 잡아먹는 킹피셔, 청둥오리, 딱따구리, 제비같은 다른 새들도 일어나 분주히 먹이를 찾으러 돌아다닐 것이다. 어제 아리가 하이에게 대든 사건을 생각하면 아마 오늘도 하루 종일 둥지에만 갇혀 있을 확률이 컸다. 지금 잠깐 빠져나갔다 오면 브리즈는 감쪽같이 속을 것이다. 아리는 다른 형제와 브리즈를 깨우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둥지 가장자리까지 기어올라가서 둥지 뒤편 부들이 우거진 곳, 즉 브리즈의 반대편 물 위로 뛰어내렸다. 아직 몸이 가볍기 때문에 작은 물고기가 튀어 오르거나 개구리 한 마리가 점프한 정도의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시원한 호수 물에 발을 담그니 자유의 느낌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아리 또래의 새끼들 중에서는 아리의 수영실력이 가장 좋았다. 지금은 아리 혼자서 이 넓디 넓은 호수를 독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엄마가 알면 물론 화가 나서 펄쩍 날아오르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말이다. 아리는 오늘 조금 더 멀리까지 가보기로 결심했다.
엄마는 인간들이 만들어둔 다리와 작은 보트 선착장, 댐이 있는 쪽으로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심지어 주차장 쪽의 땅을 밟는 것도 싫어했으며 인간들과 마주치는 것 자체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절대로 다리 너머는 가지 말라고 했으니까 오늘은 다리까지만 가볼 것이다. 호수 건너편, 다리가 시작되는 지점에 산의 골짜기가 내려와 아늑하게 물을 품고 있는 습지가 있었다. 그 습지 앞에는 작은 둑 같은 게 형성되어 있고, 그 둑에는 갈대가 자라나 있어서 둥그스름한 습지는 숨겨진 방과 같은 느낌이 났다. 갈대에 가려진 그 습지에 무척 맛있는 풀과 이끼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이 가족들이 주로 그곳의 먹이를 독차지한다는 소문이었다. 아마 이 시간에 가면 그곳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약간 겁이 나기도 했지만, 어떤 곳인지 한번 눈으로 보기만 하고 올 거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리는 힘차게 갈퀴발을 저었다. 아직 날개라기보다는 손과 팔에 가깝지만 어깨를 열심히 돌리는 연습을 하면 어깨가 넓어지고 근육이 생겨서 나중에 더 큰 날개를 가질 수 있다고 들었다. 손끝에 드러난 엄지손가락이 나중에는 날개로 덮인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아리는 작은 날개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열심히 발을 저었다.
호수는 생각보다 넓었다. 가도 가도 중앙에는 가 닿지 못했다. 돌아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식구들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와 버렸다. 다행히 중앙에 인간이 박아둔 나무기둥이 있어서 거기에 잠시 몸을 기댔다가 다시 헤엄치기 시작했다. 하늘과 호수 사이에 오로지 아리 혼자만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물갈퀴가 달린 발로 물가에 살지만, 언젠가 날개 깃털이 돋아나면 하늘을 맘껏 날아다닐 것이다. 그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카디널이나 붉은 어깨 까마귀는 하늘을 날 수는 있지만 물속에 내려앉지는 못한다. 다이빙은 더더욱 할 수 없다. 오로지 선택 받은 종류의 새들만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헤엄을 치니 어느새 다리가 가까워졌다. 해냈다, 해냈다! 뿌듯한 마음에 엄마한테 야단 맞은 것도 억울한 마음도 모두 사라졌다. 갈대가 돋은 둑을 넘어서 드디어 그 비밀의 방과 같은 습지에 도달했다. 동그랗게 물이 들어간 그곳에는 붉고 흰 꽃잎들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고 황홀한 향기가 진동했다. 얕은 물속의 진흙에는 맛있는 씨앗들이 잔뜩 묻혀 있었다. 아리는 그 맛과 질감과 향기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와 형제들에게 이야기해줄 것이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질 지경이 되자 급격히 졸음이 몰려왔다. 이대로는 도저히 헤엄을 칠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갈대가 돋아난 작은 둑까지 헤엄쳐 가서 갈대 줄기 언저리에 몸을 숨긴 채 깜박 잠이 들었다.
새끼 기러기들의 비명소리에 잠이 깬 아리는 이미 하늘이 환하게 밝아버린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소동이 일어난 곳은 새벽에 아리가 탐험했던 그 얕은 습지였다. 가느다랗고 긴 다리에 넓고 커다랗게 펼쳐진 날개를 보니 블루 헤론이라 불리는 왜가리였다. 왜가리가 쫓고 있는 것은 두 마리의 새끼 기러기들이었다. 기러기들은 요리조리 방향을 바꾸고 물풀 속에 몸을 숨기면서 달아나고 있었지만 곧 잡힐 것만 같았다. 도망치는 새끼들의 목소리가 왠지 친숙했다. 어제 아리 가족이 호숫가에서 먹이를 먹을 때 딴 데 가라고 쫓아내던 우쭐한 목소리가 지금은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부리 위의 작은 혹들을 보니 하이의 심술궂은 두 아들 버즈와 포시가 틀림없었다.
그때 하이와 일리가 나타났다. 어른 기러기들은 털갈이 중이어서 날지 못하는 대신 날개를 들어올린 채로 물 위를 쏜살같이 달리는 재주가 있었다. 문득, 그렇게 빨리 호수 반대편에서 어린 새끼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올 수 있는 그들이 왜 아빠가 팰콘을 만났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궁금해졌다. 아빠와 엄마와 네 마리의 새끼가 모두 함께 목청껏 도와달라고 소리질렀는데도 말이다. 그 뒤로 사색이 된 브리즈가 나타났다. 비명소리가 들리자 아리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 달려온 것이다. 하이, 일리, 브리즈가 힘을 합쳐 목을 앞으로 쭉 뻗어 위협하며 달려들자 왜가리는 공중으로 사뿐히 날아오르더니 커다란 날개를 저으며 도망을 쳤다.
엄마를 보고 반가웠던 아리는 갈대숲을 빠져나와 물 위를 헤엄쳐 갔다. 그러나 하이와 일리가 브리즈보다 먼저 아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버즈와 포시를 중간에 두고 대형을 갖추더니 거만한 표정을 되찾았다. 브리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리를 발견한 브리즈의 얼굴은 반가움과 당황이 반반 섞여 있었다.
“이것 봐, 브리즈! 난 저 아이가 언젠가 중대한 사고를 저지르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일 줄은 몰랐어. 왜가리는 저 아이를 노리다가 우리 아이들을 발견한 거라고! 저 아이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죽을 뻔했잖아! 우리가 빨리 달려왔으니 말이지.”
브리즈는 사실이냐고 묻는 얼굴로 아리를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저는 새벽에 이곳에 왔다가 줄곧 저기 작은 둑의 갈대 숲에 숨어서 자고 있었단 말이에요!”
“아냐, 엄마! 아리가 이곳에 와서 우리 음식을 다 훔쳐 먹고 있는 걸 우리가 봤어. 아리가 위험한 것도 모르고 고개를 쳐박고 먹이를 먹다가 왜가리의 눈에 띈 거라고! 괜히 우리까지 죽을 뻔했잖아!”
버즈와 포시의 거짓말에 아리는 이가 갈렸지만 꼼짝없이 덫에 걸린 걸 깨달았다. 엄마를 속이고 이곳까지 나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후회하긴 너무 늦었지만 말이다.
“브리즈, 너 이렇게 무능해서 어떻게 혼자 새끼 네 마리를 키울 작정이지? 게다가 하나같이 이렇게 말을 안 듣고 조직의 질서를 무시하는데!”
하이의 호통에 브리즈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할 말이 없어요. 제 불찰이에요. 제가 깜박 조는 사이에… 아리가 배가 고파서 그랬나 봐요. 어제 제가 계속 벌을 세웠거든요.”
하이는 그대로 넘어갈 기세가 아니었다.
“브리즈, 내가 정말 이렇게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 하는 걸 보니까 이대로 두었다가는 우리 새끼들이 모두 위험에 처할 수 있을 것 같아 안 되겠어. 네 새끼들을 모두 나에게 입양 보내고 넌 이곳을 떠나도록 해! 나와 일리가 돌보는 편이 훨씬 안전할 테니까!”
아리에게도 브리즈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곳 기러기 무리의 수장인 하이의 명령을 거부하려면 하이와 일대일로 싸워서 이기든가 새끼들을 모두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가든가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몸이 작고 약한 브리즈가 하이와 싸워서 이길 확률은 없었다. 아직 날지도 못하는 새끼들을 데리고 다른 호수나 저수지까지 이동한다는 건 맹수들의 소굴을 맨몸으로 통과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돼요! 제발 그것만은 안 돼요. 새끼들이 충분히 자랄 때까지만 함께 있게 해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어린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어요!”
하이에게 고개를 숙이며 애원하는 브리즈에게 하이는 다시 한번 비수를 꽂았다.
“어차피 넌 새끼들에게 나는 법도 가르치지 못할 거잖아. 네 새끼들도 너를 닮아 예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 무리는 모두 가족이니까 내가 내 자식들처럼 여기고 키우도록 하지. 내일 아침엔 너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특별히 작별인사 할 시간을 주는 거니까 인사 잘 하고 저녁엔 새끼들을 우리에게 데려오도록 해! 넌 다른 데 가서 또 너를 불쌍히 여기는 수컷 한 마리 만나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면 되잖아. 매년 낳는 새끼들인데 뭘 그래?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하이와 일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유유히 새끼들과 함께 호수 반대쪽으로 헤엄쳐 갔다.
아리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누명을 쓴 채로 엄마까지 잃어야 하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아리는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엄마를 따라갈 것이다.
“아리야 이리온…”
브리즈가 아리를 큰 날개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벼락 같이 꾸짖을 줄 알았는데 엄마의 반응은 의외였다. 브리즈는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아리를 안고만 있었다. 그게 아리는 더 불편했다.
“엄마 잘못했어요. 제가 엄마 몰래 집을 빠져 나온 건 정말 잘못했어요. 하지만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하이가 꾸며낸 거짓말이에요. 믿어주세요!”
“그래, 알고 있다. 멀리서 들리던 비명소리가 가까울수록 난 그게 네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안도했어. 그리고 갈대줄기 속에서 고개를 내밀던 너를 보았다. 넌 몰랐겠지만. 처음부터 버즈와 포시가 왜가리의 표적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단지 하이에게는 나를 내쫓을 구실이 필요했을 거야. 하지만, 하이의 말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야. 기러기들은 보통 제 부모에게서 나는 법을 배우는데 로키가 없는 이상 난 너희들에게 그걸 가르칠 수가 없어. 엄마 혼자만 남은 기러기 가족은 안전하지도 않아. 그런 기러기 엄마가 부모가 모두 있는 기러기 가정에 아이들을 입양 보내는 건 전혀 드문 일이 아니란다. 너희들과 계속 있고 싶지만, 어차피 너희들도 몸이 다 자라면 스스로 나를 떠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게 기러기의 삶이니까.”
엄마는 이미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걸 깨달은 아리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엄마, 하이가 날 좋아할 리가 없어요. 다른 형제들은 몰라도 난 엄마를 따라갈래요. 그곳이 어디든지 상관 없어요. 엄마와 함께라면 난 어디든 갈래요. 저 이제 수영도 잘 하고 다이빙도 할 줄 알아요!”
브리즈는 날개를 들어올려 아리의 두 뺨을 감쌌다.
“아리야, 한 가지만 약속해다오.”
“뭐예요?”
“넌 자이언트 기러기의 후예다. 이곳 초승달 호수에 사계절 내내 머물며 인간들과 야합해서 살아가는 기러기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날개가 다 자라서 잘 날 수 있게 되면 내면의 소리가 이끄는 대로 철새들의 계절 여행을 떠나기 바란다. 그 길에서 다른 자이언트 기러기 무리와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럼 그 무리들과 함께 살며 일년에 두 번씩 온 세상을 날아 여행하는 거다. 그게 아빠와 엄마가 너희들에게 바라던 삶이다. 할 수 있겠니?”
아리는 고개를 돌리며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브리즈는 날개 끝의 엄지손가락으로 단단히 아리의 얼굴을 붙잡고 있었다. 약속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엄마가 정말 떠나버릴 것 같아서 싫었다.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고 버티면 엄마는 계속 머물지도 모른다. 엄마가 자꾸 자이언트 기러기의 후예 어쩌고 하니까 결국 하이와 무리에게 미움을 받게 된 게 아닌가?
“싫어요! 그딴 거 알고 싶지 않아! 난 아무데도 날아가지 않고 평생 동안 엄마랑 이 호수에서 살 거야!”
브리즈는 고통의 눈물로 얼룩진 아리의 얼굴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어서 날개를 거두어 들여 허리에 붙였다. 좋은 엄마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이럴 때 솔직하게 아이를 껴안고 통곡하는 걸까, 아니면 눈물을 참고 강한 척하는 걸까. 태어나자마자 아빠가 무참히 죽는 걸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까지 잃어야 하는 이 아이의 운명이 너무 가혹했다. 신뢰할 수 없는 기러기인 하이에게 어린 아이들을 맡겨야 한다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일단 집으로 가자.”
브리즈는 애써 쌀쌀맞게 말하고 앞장 서서 헤엄쳤다. 아리는 계속 항의하고 울부짖고 애원하며 브리즈를 뒤따라갔지만 브리즈는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눈물로 흐려진 눈으로 찬찬히 호수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나 로키와의 추억이 어려 있었다. 이 호숫가에서 부모님과 이별하던 날이 떠올랐다. 둥지를 짓고 알을 낳던 추억이 떠올랐다. 로키를 떠나 보내야 했던 날도…. 이 호수는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