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 기러기 아리-3
브리즈는 아침에 뭔가 허리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눈을 떴다. 뒤돌아보니 브리즈의 날개 아래에서 잠자던 아리가 브리즈의 허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작은 머리와 날개를 파닥이고 있었다. 아리의 몸은 이제 완전히 노랗고 보송보송한 털로 덮여 있었다. 로키가 가끔씩 혀로 아리의 털에 묻은 끈적한 액체들을 닦아준 모양이었다. 동그란 뺨과 웃는 표정의 부리 때문인지 새끼들 중에서 가장 귀여운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이제 비는 말끔히 그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라는 걸 브리즈는 직감했다. 멀리서 배고픈 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숲 속에선 딱따구리들이 벌레를 찾아 나무를 쪼기 시작했고, 간혹 부엉이와 매들의 신호 소리가 들렸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비로 온종일 굶은 동물들이 곧 먹이를 찾아 나올 것이다. 어서 새끼들을 데리고 물풀이 풍성하게 자라난 습지로 가서 밥을 먹여야 할 것이다. 밤새 보초를 선 로키는 무척 지쳐 보였다.
“로키, 우리 어서 습지로 가요. 여기 더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일단 아리에게 걷는 법을 확실히 가르치고 나서 이동하기로 해. 얘들아, 이제 일어나거라! 누가 누가 잘 걷나 보자!”
브리즈의 한쪽 날개에 싸여 잠을 자던 새끼들이 로키의 목소리를 듣자 날개 밖으로 기어 나왔다. 첫째 피트, 둘째 홍크, 셋째 토트, 넷째 아리. 모두 알을 까고 나오면서 처음 낸 소리를 이름으로 지었다. 피트, 홍크, 토트는 아리보다 닷새에서 일주일 가량 빨리 태어난 만큼 이제 몸집이 제법 컸고, 머리와 눈가, 목과 등 언저리에 검은 무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걷고 뛰고 수영하는 것도 꽤 능숙한 편이었다. 그에 비하면 아리는 비쩍 마른 몸에 가느다란 다리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발목이 휘청거렸다. 잘 서 있는 것 같다가도 금방 발바닥이 흔들거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브리즈와 로키는 서로 걱정스러운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아리는 걷는 일이 몹시 재미있는지 작은 날개 팔을 파닥이며 까르르 까르르 웃었다. 어쨌든 빠른 속도로 균형을 잡아가고 있는 건 확실했다.
기운을 회복한 브리즈가 앞장을 서고 피트, 홍크, 토트, 아리가 한 줄로 따라 걸었으며 로키가 맨 뒤에서 망을 보며 걸었다. 호수까지는 200걸음 정도만 걸어가면 되었다. 아리에게는 수영하는 것이 걷는 것보다 더 수월할 것이므로 호수를 관통하여 둥지가 있는 습지로 이동하기로 했다. 가는 길에 풀밭을 만나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여린 풀들과 씨앗들을 쪼아먹었다. 태어난 후로 처음 식사를 하는 데도 아리는 타고난 입맛과 후각으로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들을 기막히게 잘 골라냈다.
사람들이 흙 바닥을 평평하게 다져서 만든 주차장을 통과한 브리즈 가족은 호수로 내려가는 완만한 비탈에 접어들었다. 그곳에는 더욱 맛있는 풀들이 많이 돋아 있었다. 아리는 갑자기 나타난 도마뱀을 발견하고는 뒤를 쫓기 시작했다. 아장아장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브리즈가 급히 아리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리는 멈추지 않았다. 바로 그때 뭔가 하얀 덩어리가 소리 없이 이마 위로 날아 내리는 게 보였다. 흰 깃털에 먹물을 점점이 흩뿌린 듯한 무늬가 있는 제어 팰콘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브리즈가 아리를 향해 달려가려는데 발 빠른 로키가 먼저 아리에게 몸을 던져 팰콘을 가로막았다. 로키는 고개를 최대한 앞으로 뻗고 입을 벌려 우렁찬 목소리로 팰콘을 위협했다. 아리는 너무 놀라서 온몸에 쥐가 났는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브리즈가 얼른 아리의 목을 물고 물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러고는 쉴새 없이 아이들을 재촉해서 몸을 숨길 수 있는 나뭇가지들과 풀숲이 있는 둥지 근처로 헤엄쳐 갔다.
브리즈의 눈에서 소금물처럼 쓰라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등 뒤에서 어떤 참극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로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걸로 봐서, 로키는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두 발을 인간의 손처럼 자유자재로 쓰는 팰콘과 일대일로 마주친다면 아무리 팰콘보다 덩치가 큰 기러기라도 이길 방법이 없다.
로키의 친척인 하이를 비롯해서 다른 기러기 무리들은 다 어디로 숨었는지 도와주러 오는 기러기가 하나도 없었다. 공격적인 기러기들이 힘을 합치면 팰콘도 헤론도 모두 물리칠 수 있다. 브리즈는 하이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쳐 불렀다. 하이가 이곳 초승달 모양 호수에 상주하는 기러기 무리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전날 알을 낳던 둥지 근처까지 가서 몸을 숨긴 브리즈는 고개를 돌려 멀리서 로키가 외로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로키의 목소리가 고통의 비명으로 바뀌고 있었다. 로키를 도우러 가고 싶었지만 새끼들을 이곳에 홀로 남겨둘 수 없었다. 브리즈가 합세한다고 해도 팰콘을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로키가 날아오를 수 없도록 팰콘은 반복된 공격으로 로키의 주요 깃털들부터 찢어놓았다. 그러고는 갈고리 같은 발톱으로 로키의 목을 움켜잡으면서 온몸의 무게를 실어 옆으로 밀어뜨렸다. 로키가 고개를 반대로 뒤틀자 팰콘의 몸과 날개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틈에 로키가 팰콘의 몸을 가슴과 두 발로 짓눌렀지만 기러기의 발은 걷기와 달리기에만 이용될 뿐 공격용으로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민첩하게 다시 중심을 찾고 날아오른 팰콘은 로키의 가슴 깊이 발톱을 박아 넣었다. 로키의 머리에도 목에도 가슴에도 털과 피부가 뜯겨나가고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누구 없어요? 팰콘이 왔어요! 제발 나와서 로키를 구해주세요! 제발 부탁해요!”
브리즈의 피맺힌 절규가 온 호수에 울려 퍼졌지만 여전히 호숫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로키는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팰콘의 날개를 밟아 발톱의 공격을 멈추려 했지만 팰콘은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팰콘 역시 먹여야 할 자식이 있을 것이다. 작은 알이나 갓 태어난 기러기 새끼 한 마리를 훔치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비록 어른 기러기와 싸우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들지만 소득은 더 풍성할 것이다. 제어 팔콘은 소리 없이 빠르고 무자비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뛰어난 후각을 지니고 있어 멀리 공중에서도 냄새를 맡고 무서운 속도로 날아 내려와 원하는 먹이를 채어간다.
브리즈는 이제 더 이상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안타까움에 긴 목만 한없이 주억거리며 소리없이 로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로키의 몸 이곳 저곳에 날카로운 발톱을 박아 넣어 힘줄을 끊어버린 팰콘은 이제 일어서지도 못하는 로키의 가슴살을 부리로 뜯어 먹고 있었다. 로키의 몸은 아직도 저항을 멈추지 않은 채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번 두 번 세 번 발을 까딱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고는 목이 완전히 축 늘어졌다. 제어팔콘에게 로키의 몸은 죽은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브리즈는 새끼들이 이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떠내려온 나뭇가지 더미 속에 숨겨 두었었다. 브리즈는 허리에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고 노란 솜뭉치 같은 아리가 브리즈의 날개 아래로 몸을 기대어왔다. 아리의 눈에 슬픔과 경악의 빛이 가득했다.
“저…때문이죠? 아빠가 저렇게…된 건….”
가장 늦게 태어났지만 가장 먼저 알아듣게 말을 한 건 아리가 처음이었다.
“아니야 아리, 그게 아니야. 이런 비극은 사실 매일 일어난단다. 너 때문이 아니야.”
브리즈는 아리를 날개 아래 숨긴 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제어팰콘이 계속해서 로키의 몸을 찢어발기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로키의 영혼은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 높이 훨훨 날아간 후일 것이다. 새들이 죽으면 그 영혼은 힘들게 날개를 저을 필요도 없이 가볍게 떠올라 큰날개님이 사는 높은 구름 위의 나라로 간다고 들었다. 지상에서 헤어진 가족들이 그곳에서 모두 다시 만나게 되므로 영원한 이별은 없다고 엄마가 말했었다.
하지만 로키를 다시 만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로키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스쳐갔다. 이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기러기들은 한때 인간에게 길들여졌다가 풀려난 기러기들의 후예여서 전통적인 철새의 삶을 거부한다. 로키는 그 정착 기러기 가족의 일원이었다. 그래서 날지 못하는 브리즈와 평생 함께 하겠다는 언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브리즈가 예전에 가족과 함께 북쪽 지방에서 보낸 시원한 여름과 남쪽 지방에서 보내던 따뜻한 겨울, 그리고 몇 달 동안 거대한 무리와 함께 하늘 높은 곳을 날면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 주면 로키는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 우리 자식들이 태어나면 그들에게는 넓은 세상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고 제안한 것도 로키였다. 그런 로키가 곁에 없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브리즈는 조용히 새끼들을 그러모아 두 날개로 꼭 껴안았다. 아리는 아직도 몸을 바르르 떨면서 훌쩍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