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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17. 2022

비정한 세상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4

아버지 로키의 죽음은 어린 기러기 아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도 그 아픔은 줄어들지 않았다. 어서 커서 아버지를 죽인 제어팰콘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생각을 말하면 다른 기러기들이 코웃음을 쳤으므로 점차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기러기가 되기로 결심한 아리는 형제들보다 빨리 자라기 위해서 밥도 두 배로 먹었고, 온갖 풀들과 동물의 냄새를 파악하는 방법도 열심히 배웠다. 같은 호수에 사는 기러기 무리들과 자주 마주치는 동안 특별히 힘이 세고 강하기로 소문난 기러기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은 로키의 친척이자 이 호수에 사는 기러기 떼의 실질적인 리더인 하이가 호수 제방 안쪽의 경사진 풀밭에 최근에 태어난 새끼 기러기들을 집합시켰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상대는 한둘이 아니다. 팰콘을 포함한 갖가지 종류의 매와 독수리들은 튼튼한 발목과 사나운 발톱을 가졌다. 그들은 힘센 발톱으로 다른 새나 동물의 목을 졸라서 질식부터 시킨다. 그들은 소리 없이 공격해서 순식간에 어린 새끼나 알들을 물어간다. 독수리나 왜가리 같은 큰 새들이나, 부엉이, 너구리, 뱀, 들고양이, 독수리도 조심해야 하지만 사람들을 따라온 사냥개들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그냥 재미로도 우리를 추격한다. 하지만 너무 겁내지는 마라. 그들 중 어떤 놈들도 한꺼번에 공격하는 기러기 떼를 이겨내지는 못하니까. 항상 무리 속에 머물러라. 혼자 떨어져서 돌아다니다간 언제 어느새 당할지 알 수 없다. 기러기로 산다는 게 그리 평화로운 일만은 아니다. 24시간 적의 위험에 대비하면서 늘 깨어 있어야만 한다. 질문 있으면 질문을 해도 좋다.”


부모 기러기들은 새끼들 무리를 바깥에서 둥그스름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하이는 다른 기러기보다 목이 더 굵었고 부리 위에 작고 검은 혹이 솟아 있었다. 혹 때문인지 하이의 목소리는 더 높고 우렁차게 울렸다.

 

“어떻게 하면 매처럼 튼튼한 발톱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리의 질문에 하이를 포함한 모든 어른 기러기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이는 자기 자식들 뒤에 서 있던 아리를 발견하고서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곧 연민을 드러냈다. 


“네가 로키의 막내딸 아리로구나. 로키가 죽은 건 우리에게 큰 손실이다. 로키는 가장 뛰어난 정찰기러기였고 위험한 동물들의 접근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우리에게 알리곤 했었지. 하지만 아리야, 기러기는 물새기 때문에 갈퀴발이 있어야 한다. 갈퀴발을 싸움에 쓰면 금방 찢어져버릴 뿐만 아니라 다시는 헤엄을 칠 수도 없게 돼. 기러기는 식물성 음식들만 먹고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동물을 공격하기 위한 발톱 같은 건 필요 없다. 너의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매가 오는 걸 잘 알아차리고 피할 수 있을까요, 라고. 아리를 포함한 새끼 기러기들아 잘 들어라. 우리는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지하고 보존하며 방어한다. 그게 우리의 숙명이다. ”


“우리는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왜 우리 아빠가 팰콘의 공격을 당했을 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죠?”


아리는 당돌하게 하이에게 대들었다. 아리는 이제 판단력이라는 게 생겼다. 하이가 일부러 로키를 돕지 않았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았다. 젊은 로키가 하이보다 몸도 더 크고 힘도 세졌으며 무리들 속에서 더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기러기는 브리즈와 로키가 장거리 철새 여행을 미화하는 위험한 생각을 퍼뜨리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브리즈는 당황하여 아리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이미 늦었다.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딱 맞구나. 네 엄마가 그렇게 말하더냐? 그때는 불어난 물소리가 너무 커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고, 우리는 좀더 깊은 산속 덤불에 있어서 달려올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 공격은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끝난 일이지 않더냐!”


“아니에요. 한참 동안이나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고요! 그 시간이면 달려왔어도 늦지 않았을 거라고요! 아빤 정말 용감하게 오랫동안 싸웠으니까요! 제가 다 봤어요!”


울먹이는 아리의 입을 막은 건 브리즈였다. 


“원래 충격적인 사건은 실제보다 길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너한텐 1초가 한 시간처럼 지나갔을 거다. 이해한다. 하지만 당돌하구나, 우리를 원망하다니.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도 그렇게 당당하다니 양심이 없구나. 네 엄마가 미련하게 시간을 끌면서 네가 태어나길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너희 가족은 일찌감치 더 안전한 곳에서 밤과 아침을 보냈을 거다. 그랬더라면 로키는 죽지 않았을 테지. 가정교육을 더 잘 받고 오너라. 어른한테 함부로 말대답하는 거 아니다.”


아리의 말이 모두 옳았지만 브리즈는 날개로 아리를 끌어당겨 입을 막았다. 하이에게 잘못 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아리는 온몸을 버둥거리며 브리즈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아직 할 말이 더 많이 남아 있어요. 이거 놔 주세요! 하이는 못 들은 척하며 버릇 없는 새끼 기러기들을 부모가 어떻게 혼내줘야 되는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말 안 듣는 새끼 기러기들은 쿠트라는 물새들이 자식들한테 어떻게 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들은 새끼를 여러 마리 낳은 다음 키우는 동안 강한 놈과 약한 놈을 정확히 가려낸다. 그러고는 어미 새가 직접 나서서 가장 약한 새끼를 공격해서 모가지를 꺾어 죽여 버린다. 잔인하게 보이지만 먹이가 한정된 곳에서 전체 종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펠리컨들은 더 고약하다. 새끼는 세 마리씩을 낳지만 오직 한 마리만 살아남아 어른 새가 된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 기러기들은 정말 동정심이 넘친다고 봐야 한다.”


아리가 이 호수에 사는 기러기들의 전체 모임에 참석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른 기러기들만 스무 마리가 넘었고 새로 새끼들을 낳은 커플은 여섯 커플 정도 되었다. 새로 태어난 새끼들은 스물 두 마리였다. 알이 부화할 무렵 태풍이 불어 닥치는 바람에 예전보다 태어난 새끼들의 수가 적다고 했다. 하이는 새끼가 두 마리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마치 왕족이라도 되는 양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몇 시간 전에도 호숫가의 풀밭에서 아리가 형제들과 풀씨들을 주워먹고 있을 때 하이 가족들이 와서 아리를 쫓아내면서 그곳이 자기들 구역이라고 우겼다. 브리즈가 이끄는 대로 아리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한참 헤엄친 다음 물가에 쓰러진 나무등걸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거북이 가족들이 나란히 누워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막 나무에 붙은 초록색 이끼를 뜯어먹으려 하는데 어디선가 하이의 남편 일리가 달려와 그건 자기들이 맡아놓은 나무라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호숫가에 산책 나온 사람들이 뭔가 먹을 것을 던져주면 다른 가족을 제치고 그곳으로 달려가 포식을 했다. 물론 다른 기러기 가족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무섭게 협박해서 쫓아냈다. 안전하게 양질의 먹이를 먹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들이 독차지했다. 그걸 보고도 브리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호숫가엔 우리 모두가 먹고도 남을 만큼 풍부한 먹이들이 있단다”라고 말하며 아리의 형제들을 데리고 조용히 새로운 장소를 찾아갔다. 


브리즈는 로키가 없는 자리를 혼자서 채워야 했다. 걸어갈 때도 헤엄을 칠 때도 늘 철저하게 사방을 살펴야 했다. 부모가 앞뒤로 서서 중간의 새끼들을 보호하며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로키가 생각났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날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하며 로키를 그리워할 수만은 없었다. 어차피 새끼들이 자라는 동안은 다른 어른 기러기들도 그 무렵에 맞춰서 털갈이를 하느라 날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마침 날이 따뜻해지면서 호수 안팎으로 먹을 것이 풍부해져서 멀리까지 먹이를 구하러 날아갈 필요도 없었다. 


브리즈는 새끼들에게 위험으로부터 재빨리 몸을 숨기는 법을 열심히 가르쳤다. 다행히 새끼들은 건강하고 총명해서 브리즈의 가르침을 곧잘 이해하고 따라 했다. 노란 솜털 아래로 거뭇거뭇한 무늬들이 올라오고 있어서 마른 풀숲이나 거칠게 뻗어나간 나무 뿌리 사이, 흙 구덩이 같은 곳에 숨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래도 눈이 밝은 매나 부엉이 독수리들은 귀신같이 어린 새끼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것이다. 


브리즈는 낮에도 밤에도 깨어 있어야 했다. 새끼들이 모두 어른 크기로 자랄 때까지는 절대 잠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새끼들이 습지의 둥지에서 모두 잠든 밤에도 브리즈는 물 속에 한 다리로 선 채 사방을 살폈다. 브리즈를 제외한 다른 어른 기러기들은 모두 가족이나 친척 지간이었지만, 브리즈만 다른 지역 출신이었다. 그나마 브리즈와 이곳 기러기들을 이어주던 존재인 로키가 죽자 브리즈를 향한 그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촉망 받는 정찰 기러기였던 로키가 살아 있을 때 브리즈는 호수 위에서 이루어지는 전체 모임에서 로키와 함께 맨 앞줄에 있었다. 왜가리나 매가 나타나기만 해도 로키와 브리즈는 늘 앞장서서 싸웠다. 그러나 이제 브리즈는 새끼들을 데리고 스스로 맨 뒷줄에 가 있어야 했다. 그곳은 아직 미성숙하여 짝을 짓지 않은 청년 기러기들이나 늙어서 더 이상 날지 못하는 기러기들의 자리였다. 신선하고 영양이 풍부한 먹이가 있는 곳은 언제나 다른 기러기들이 먼저 먹고 난 후에야 브리즈 가족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이곳에는 하이 부부를 중심으로 분명한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원래 브리즈가 속했던 자이언트 기러기 무리는 그렇지 않았다. 경험 많은 몇 마리의 기러기들이 여행 때마다 번갈아 길을 이끌기는 했어도 일상생활에서는 모두 평등했다. 일단 새끼들을 낳으면 그 다음엔 부모들이 새끼들을 잘 먹이기 위해 의좋게 협력했다. 


“아리, 넌 지금부터 하루 동안 외출금지다! 내가 허락할 때까진 절대로 둥지를 벗어나면 안 된다. 알겠니?”


둥지로 돌아온 브리즈는 아리를 거칠게 둥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브리즈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고 덤비는 아리를 보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다른 새끼들보다 몸은 작지만 총명하고 매사 따지고 들기를 좋아하는 아리가 걱정이 되어서 일부러 더 엄하게 대했다. 믿고 싶진 않지만 만일 하이가 로키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하이는 아리에게도 어떤 몹쓸 짓을 할지 모른다. 하이는 폭우 속에서 대피하느라 자기 알을 세 개씩이나 버리고 갔다. 그 알들이 왜가리에게 먹히는 것을 브리즈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이는 처음부터 브리즈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날지도 못하는 기러기를 무리에 받아들여봤자 식량만 축낼 뿐이고 짐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다행히 하이의 아버지인 블랙이 무리의 으뜸이었기에 하이의 반대쯤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로키가 브리즈와 사귈 때에도 하이는 반대하며 다른 처녀 기러기들을 만나라고 강요했다. 브리즈는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날지 못하는 대신 밤에도 깨어 불침번을 서는 일을 담당했고, 다른 기러기들의 알이나 새끼를 보호하는 일에도 가장 열심이었다.     


“비겁해요! 엄마도 알잖아요?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거! 엄만 나만 미워해!” 


아리가 둥지 벽에 머리를 박으면서 울먹였다. 브리즈는 못 들은 척하며 피트, 홍크, 토트의 털을 다듬어 주는 일에만 전념했다. 아리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이제 제법 다리도 길어졌고 전체 털 색깔이 거무스름하게 변했다. 조금 더 있으면 아기적 솜털이 모두 벗겨지고 검고 매끈한 청소년의 몸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그 정도만 자라도 꽤 무거워서 큰 새들이 건드리지 않게 되고, 너구리나 스컹크가 쫓아와도 곧장 물속으로 도망칠 수 있다. 머리가 있는 너구리라면 차라리 물고기를 잡는 편이 더 수월하고 맛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브리즈는 밤낮으로 깨어있다 보니 체력이 떨어져 한낮에 자기도 모르게 꾸벅거리며 졸음에 빠져들 때가 많았다. 특히 아리는 그런 순간을 잘 포착해서 브리즈의 시야를 벗어나곤 했다. 순하고 착한 성품의 피트가 로키를 닮았다면 아리는 외모도 성격도 브리즈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졸다가 깨어서 큰소리로 아리의 이름을 부르면 의외로 멀리 있진 않아서 금방 돌아오곤 했지만, 또 그럴까 봐 걱정이 되어서 필요 이상으로 야단을 치고 복종 훈련을 시켰다. 자기만 미워한다고 오해해도 어쩔 수 없었다. 로키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의 피가 섞인 이 아이들을 무사히 키워서 어른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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