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 기러기 아리-2
뭍으로 올라가 로키와 새끼들이 기다리는 참나무 아래에 도착한 브리즈는 젖은 낙엽 몇 장이 깔린 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아리를 내려놓았다. 다른 새끼들은 이미 며칠 전에 깨어나 노란 털이 보송보송했을 뿐만 아니라, 걸음마와 수영을 충분히 익히고 씨앗들과 물풀, 새순들도 넉넉히 먹어두어 몸이 제법 통통했다. 그에 비하면 강제로 태어난 데다 걸어볼 기회도 없이 실려온 아리의 작고 가냘픈 몸은 아직도 축축하게 젖어 털이 가닥가닥 뭉쳐 있었다.
“브리즈, 당신도 좀 쉬어야지. 아리 옆에 누워서 잠깐 눈 좀 붙여. 하늘을 보니 우박과 비가 그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브리즈는 로키의 말대로 순순히 아리 옆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새끼들을 더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면 잠이라도 자서 힘을 보충해둘 필요가 있었다. 굵은 참나무 줄기 뒤편은 그나마 바람이 미치지 않아 물에 잠긴 둥지보다는 포근했다. 새끼들은 브리즈와 참나무 줄기 사이에 숨어서 잠들었고, 로키는 여전히 비와 우박이 날려오는 방향에 서서 위험한 적이 나타나지 않는지 쉴새 없이 사방을 살폈다. 로키는 브리즈보다 한살이 작았다. 둘이 연애를 시작한 지는 2년이 되었고, 가정을 이루기로 결심한 게 올해 초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에게 반한 건 아니었다. 로키를 처음 만난 날이 브리즈가 부모 형제들과 헤어져야 했던 날이기 때문이다.
브리즈는 따뜻한 남쪽 동네에서 겨울을 보낸 후 3월초 300마리가 넘는 가족 친척 무리들과 함께 북쪽을 향해 계절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기상이변이 일어나 천둥 번개를 쏘아대는 거대한 구름 기둥이 브리즈 무리를 덮쳤다. 그때 맨 앞에서 날아가던 브리즈의 아버지가 급히 지시를 내렸다.
“전진하는 방향에는 당분간 큰 호수가 없다. 급히 방향을 급선회해서 우리가 10분 전쯤 지나온 땅콩 모양의 호수로 내려가 쉬도록 하자! 이 비구름은 우리가 전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후진하면 곧 비구름도 빠져나갈 수 있다. 모두 180도로 꺾어 돈다!”
무리를 따라 급히 방향을 돌린 브리즈는 갑자기 눈앞이 번쩍거리며 오른쪽 날갯죽지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바람에 맞서며 급히 뒤돌아 날 때 번갯불이 어깨를 스친 것 같았다. 옆에서 여러 마리의 기러기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앞서가는 기러기가 바람의 저항을 줄여주긴 해도, 바람을 거슬러 날려면 더 힘차게 날개를 저어야 했다. 날개를 크게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날갯짓이 느려지자 브리즈의 몸은 조금씩 바람에 뒤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브리즈가 뒤쳐진 걸 알아차린 브리즈의 아버지가 재빨리 브리즈 곁으로 날아왔다.
“브리즈, 어떻게 된 거니?”
“아까 방향을 틀 때 어깨에 번개를 맞은 것 같아요!”
세찬 비바람 때문에 더 크게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상황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급히 브리즈의 엄마를 불렀다. 브리즈의 엄마가 뒤로 돌아 나오자 바로 왼쪽 후방에서 날던 브리즈의 큰오빠 스톰이 선두 자리를 채웠다.
“아가야 우리는 지금 당장 아래로 내려간다. 우리를 따라오너라. 아파도 조금만 참아. 어서 내려가서 살펴보자! 날개에 힘을 빼고 추락하듯이 떨어져 내리다가 마지막에 온몸의 날개를 펴는 거다, 알지?”
“아빠,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걱정 마라! 며칠 쉬면 괜찮아 질 거야!”
브리즈는 양쪽에 엄마와 아버지의 호위를 받으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호수로 내려갔다.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호수 주변에는 작은 숲과 그 숲을 통과하는 차도가 있었고, 호수 폭이 좁아지는 곳에 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호수와 숲이 만나는 부분에 작은 습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습지의 풀숲 언저리에 여기 저기 기러기들의 둥지가 보였다. 기러기들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큰 나무 아래나 관목 덤불 속으로 대피한 모양이었다. 브리즈의 아버지는 판단력이 빠른 기러기였다. 그는 이곳에 상주하는 기러기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브리즈를 예상치 못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초승달의 바깥쪽이자 작은 암석들이 드러난 산비탈이 호숫물과 만나는 부근을 착륙지점으로 선택했다. 그곳은 급격한 경사가 있는데다 사람들의 산책로나 도로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었다. 아직 잎이 돋아나지 않은 시카모어 나무들이 희뿌연 장대비 속에서 창백한 수피를 빛내고 있었다.
비는 곧 그쳤지만 브리즈의 날개는 이틀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았다. 충분히 영양을 보충하고 약이 되는 풀들을 찾아먹어도 차도가 없는 걸로 봐서 아무래도 어깨와 손목을 잇는 큰 힘줄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날 수 없게 된 기러기의 운명에 대해 그 동안 흔히 듣고 봐왔었다. 이곳에 홀로 남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야만 한다. 이미 짝이 있는 기러기라면 다행히 그 짝이 함께 남겠지만, 브리즈는 이제 겨우 두 살이어서 짝이 없었다. 엄마는 연신 긴 목으로 브리즈의 꺾인 날개를 만지며 안타까워했다. 땅콩 모양 호수에서 기다리고 있을 무리를 위해 아버지와 엄마는 결국 떠나야 했다.
“브리즈, 넌 이제 어른이니까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다. 넌 타는 무더위도 살을 에는 추위도 사냥꾼의 총탄도 뚫고 장거리 여행을 해보았다. 네가 진정한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언트 기러기의 후예라는 거 잊지 마라. 날개가 회복되는 그날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오너라.”
부모님과 이별할 때는 자이언트 기러기의 후예답게 씩씩한 척 고개를 들고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이 아득히 작은 점으로 사라지자 참고 참았던 설움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 정주하는 기러기들이 들으리라는 것도 생각지 않고 뱃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슬픔과 외로움이 이끄는 대로 세상이 떠내려갈 듯 통곡했다. 울다가 울다가 더 이상 긴 목을 버티고 있을 힘조차 남지 않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부모님이 사라진 하늘 쪽만 바라보던 브리즈 앞에 처음 나타난 기러기가 바로 로키였다.
로키가 없었다면…이라고 생각하며 브리즈는 고개를 들어 로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로키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가슴을 최대한 부풀린 채 혹시 다가올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고 있었다. 안심이 되면서 저절로 마음이 따스해졌다. 브리즈는 로키를 처음 만났던 호수 건너편 시카모어 숲에 덮인 산비탈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 그녀의 뺨에 부리를 댔을 때의 설레임이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