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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Mar 15. 2022

겁쟁이 알

자이언트 기러기 아리-1

물 위에 수많은 동그라미를 만들며 떨어지던 빗발 속에 이제 콩알만한 크기의 우박들까지 섞여 내리기 시작했다. 로키가 브리즈의 몸과 머리 위에 커다란 낙엽들을 덮어주고 가긴 했어도 가끔씩 이파리 사이로 떨어지는 우박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얼음덩어리들이 머리 위로 떨어질 때마다 작은 돌멩이에 맞은 듯 머리가 욱신거렸다. 습지의 땅이 불어난 호숫물에 잠기면서 지면에 지어둔 둥지도 점차 물에 잠기고 있었다. 


이 호수에서 세 번째 봄을 맞았지만 4월초에 태풍이 불어 폭우가 쏟아지는 건 처음이었다. 계절여행의 경험이 많은 나이 지긋한 자이언트 기러기들이 세상의 날씨가 자꾸 이상해진다고 걱정하던 게 기억 났다. 로키와 함께 갓 둥지를 빠져나간 세 마리 새끼들이 뭍의 참나무 아래 모여 서서 브리즈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로키는 태어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어린 새끼들을 보호하느라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서서 온몸으로 우박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세상이 알 속보다 신기한지 새끼들은 우박이다, 빗물이다, 호숫물이 넘쳐난다, 하면서 노래하듯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얼음비는 더욱 거세게 호수면을 내려치고 있었다. 


브리즈는 배 아래의 따뜻한 알 속에서 아주 작은 미동을 느꼈다. 로키는 마지막 알을 포기하고 함께 대피하자고 말했지만 브리즈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로키와 결혼해서 처음 낳는 새끼들이었다. 충분히 잘 먹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세 번째 알을 낳은 지 이틀 후 마지막 알을 낳을 때는 기력이 다했다. 알을 낳고 나서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혼절하여 잠들었었다. 로키가 신선한 씨앗들과 과일들을 물어와 먹여주지 않았더라면 다시 깨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새끼들은 브리즈가 배 아래에서 품은 지 25일 안에 모두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왔지만 마지막 알만 30일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아마 마지막 알을 낳을 때 브리즈가 난산을 한 바람에 알 껍질이 약해진 것도 원인인 것 같았다. 아직도 내부에서 알 껍질을 콕콕 쪼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둥지 바깥은 절반 높이까지 물이 차 올랐다. 진흙을 발라 나뭇가지들을 쌓아 올리고 방수가 되는 가슴 털로 둥지 안을 촘촘히 막아놓긴 했지만 물이 둥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한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물은 이제 곧 털 담요 위까지 스며들어 알을 침수시킬 것이다. 알을 이대로 버려두고 가면 힘들게 알을 깨고 나온 새끼가 곧바로 익사할지도 모른다. 


브리즈는 최선을 다해 둥지 주변으로 긴 목을 내밀어 나뭇가지와 마른 나뭇잎들을 집어 올려 둥지의 외벽을 더 높이 쌓아 올렸다. 먹구름 때문에 하늘이 컴컴해서 어둠도 더 빨리 내리고 있었다. 풀들이 물살의 속도를 낮춰주긴 해도 둥지가 물에 잠기는 건 시간 문제였다. 이제 둥지 외곽을 쌓아 올리는 속도가 물이 불어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브리즈, 서둘러! 이젠 어쩔 수 없어. 그 방법을 써! 안 그러면 당신도 위험해!”


로키의 말이 맞았다. 브리즈는 날지 못하는 기러기이므로, 물살이 너무 빨라지면 뭍으로 헤엄쳐 가는 동안 떠내려 갈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을 품으면서 둥지를 보수하느라 극도로 지쳐 있었다. 브리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푸르스름한 저녁 하늘 아래 아담하게 펼쳐진 산등성이와 물 위를 가로지른 작은 다리와 차가운 얼음비 속에 안개를 피워 올리는 은빛 호숫물이 소름이 돋을 만치 신비로웠다. 


다른 기러기들은 이미 모두 태풍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고 오직 브리즈 가족만 호숫가에 남아 있었다. 부들 위에 앉아서 마지막까지 새끼들을 부르던 붉은 어깨 까마귀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브리즈의 둥지는 이제 가장자리 부분만 간신히 물 위에 떠있는 지경이었다. 로키의 말을 들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브리즈는 용기를 내어 가슴을 들어올리고 배 아래에 있는 알에다 바짝 얼굴을 갖다 댔다. 


“아가야, 내 목소리 들리지? 눈을 떠라. 엄마가 너를 알 밖으로 끄집어내줄 거야. 이 세상은 무척 아름답단다. 그러니 더 망설이지 말고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해!”


 브리즈는 알이 우박을 맞지 않도록 온몸으로 둥지 위를 가린 채 목을 잔뜩 구부려 가슴 아래의 알을 조심스럽게 부수기 시작했다. 그 안의 새끼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비록 새끼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올 정도로 튼튼한 상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30일을 넘겼으니 몸은 충분히 털에 덮여 있을 것이다. 스스로 알을 깨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경우 새끼는 날개와 다리에 충분한 힘을 기르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므로 곧바로 걷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발달이 느린 저능아가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 겁 많고 민감한 새끼들은 모든 준비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더 시간을 끌면서 최상의 조건이 마련될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브리즈는 새끼의 머리가 위치한 알의 둥그스름한 쪽을 겨냥해서 조심스럽게 돌아가며 구멍을 뚫었다.  작은 울음소리가 속에서 들렸다. 새끼의 목덜미가 드러났다. 흠뻑 젖어 뭉쳐 있어 진갈색으로 보이는 털 사이로 분홍색 살갗이 보였다. 조금 더 껍질을 뜯어내자 얼굴 부위가 드러났다. 졸리는 눈을 억지로 뜬 새끼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막내야 어서 나와. 시간이 없어. 팔과 다리에 힘을 줘서 알 밖으로 밀고 나와보렴.” 


브리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재촉하자 새끼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흔들며 작은 날개와 다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알 크기에 딱 맞게 접혀 있던 몸을 펴서 작고 짧은 두 개의 날개 팔을 알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브리즈는 마음이 급해져서 아리의 몸을 둘러싼 알 껍질을 더 많이 뜯어냈다. 


새끼는 깨어진 알 껍질의 양쪽 가장자리를 날개 끝으로 붙든 채 새까맣고 동그란 눈망울로 브리즈를 쳐다보며 아르, 아르 하는 소리를 냈다. 브리즈는 즉시 막내의 이름을 ‘아리’로 정하기로 결심했다. 온몸이 땀과 난액으로 젖은 아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목을 가누는 연습을 하더니 두 발에 힘을 주고 마지막 남은 알 껍질을 밀어냈다.


막 알을 빠져 나온 검은 색의 작고 연약한 발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양의 발가락과 물갈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브리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끼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리는 브리즈의 가슴과 둥지 사이의 틈새로 고개를 내밀어 바깥 세상을 보려고 했다. 브리즈는 우박에 맞을까봐 아리를 얼른 부리로 물어 등 위에 얹고는 큰 날개로 아리의 온몸을 덮어 감쌌다. 


이제 둥지는 물에 잠기기 직전이었다. 지난 한달 간 로키와 함께 정답게 지은 둥지이자 새끼 네 명의 고향이었다. 아리를 등에 업은 브리즈는 서둘러 둥지 너머 물 위로 뛰어들어 두 발을 휘저었다. 물에 뜨는 순간 물살에 몸이 옆으로 떠밀리는 것을 느꼈다. 로키와 새끼 세 마리가 힘내라, 힘내 하며 큰 소리로 응원을 했다. 브리즈는 우박에 맞아서 머리가 얼얼하고 정신이 없었지만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쏟아지는 얼음비를 뚫고 가족을 향해 전진했다. 


"절대로 날개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선 안 된다, 알겠지?" 


브리즈의 말에 아리는 날개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던 노력을 멈추었다. 엄마의 날개 밑은 아늑하고 따뜻했으며, 펼쳐진 날개깃털을 통해 약간의 빛이 들어와서 아주 어둡지만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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