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주 정도가 지난 후 유치원 가방을 멘 윤지가 수현의 집에 왔다.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윤지는 수현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소파에다가 벗어놓고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서 손부터 씻었다. 유치원에서 배웠다며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손을 씻어야 한다고 했다.
제대로 수건으로 닦지 않아서 물기가 남은 손으로 욕실에서 나온 윤지가 보여줄 게 있다며 유치원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유치원에서 그린 그림이라며 보여준 그림에는 킥보드를 타고 있는 윤지와 그런 윤지를 바라보고 있는 경숙과 수현이 있었다.
‘가장 즐거웠던 날’이란 제목으로 그린 그림에 윤지는 킥보드를 탔던 주말 오후를 그렸던 것이다.
“윤지가 그림도 잘 그리네. 이 날이 가장 즐거웠던 날인 거야?”
“네.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아저씨를 너무 조그맣게 그린 건 아니야? 아저씨가 이것보다는 키가 큰데.”
윤지가 수현을 다시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제대로 그린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이것보다는 내가 크다는 몸짓을 보였고 윤지는 그건 아저씨만의 생각이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윤지가 가방에서 가져온 책을 꺼내며 그에게 말했다.
“저는 여기에서 책을 읽을 테니 아저씨는 가서 일을 하세요.”
“응?”
“엄마가 아저씨 일 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 책 가져가서 책 보며 있으라고 했어요. 오늘 저는 여기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테니 아저씨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윤지의 말에 수현이 미소를 지으며 윤지가 가져온 책의 제목을 훑어보았다. ‘리더십 학교 가자’와 ‘쪽지 숨바꼭질’이란 제목의 책이 윤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재미있니? 이 책?”
“엄마가 읽어보라고 사다 주셨어요.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엄마가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어요.”
“그렇구나. 그럼 재미있게 읽고 있어. 그리고 다 읽은 다음에 아저씨한테 무슨 내용인지 말해줄래?”
“네”
“아저씨는 일하러 갈 테니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아저씨한테 와서 말해줘.”
수현은 윤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서재를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는 윤지가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간만에 머리가 기름을 칠한 듯 잘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서재에서는 그가 누르는 자판의 소리만이 다다닥 다다닥 울려 퍼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없이 자판을 눌러대고 있는데 옆에서 그의 옷자락을 잡아끄는 느낌에 돌아보니 윤지가 그의 옷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자판을 누르던 손을 멈추고는 윤지를 돌아보았다.
“응? 윤지야 왜?”
윤지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수현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은 미안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저 배고파요.”
그렇게 말하는 윤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그가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3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아저씨가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모르고 있었네. 윤지 많이 배고프겠다. 미안해.”
“방해하기 싫었는데...... 엄마가 아저씨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윤지는 더 참았어야 했다는 듯이 열심히 일하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는 듯이 아쉬운 표정으로 그의 의자 옆에 서 있었다.
“괜찮아. 윤지야. 아저씨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어.”라고 말하며 윤지를 데리고 수현은 얼른 주방으로 가서 오늘 점심은 무엇으로 할까나 하고 생각하다가 “빵 먹을까?” 하고 윤지를 바라보고 물어보니 “좋아요”라고 윤지가 대답을 하자 수현은 사다 놓은 빵을 꺼내어 놓았다.
호두 파운드케이크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접시에 담고 우유를 컵에 따라서 윤지 앞에 놓아주었다. 봉지에 담겨 있던 빵 중에서 윤지에게 “소보로빵, 크림빵, 단팥빵이 있는데 어떤 빵 좋아하니?” 라고 묻자 윤지가 “저는 단팥빵을 좋아해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그가 “아저씨도 단팥빵 무지 좋아하는데......”라고 말하고는 단팥빵을 꺼내어 “사이좋게 반씩?” 이라고 말하면서 반을 잘라서 윤지 앞에 놓아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윤지가 포크를 들고서 단팥빵을 집어 먹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수현도 빵을 집어서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빵을 먹던 그가 윤지에게 물었다.
“혹시 우리 둘이 단팥빵을 좋아하듯 서로 좋아하는 게 같은지 한번 테스트해볼까? 어때?”
“좋아요. 근데 어떻게 하는 건데요?”
“아저씨가 두 개의 단어를 말하고서 어떤 것이 좋은지 하나 둘 셋 하고 세면 윤지랑 아저씨가 동시에 대답하는 거야. 그래서 같은 단어를 말하면 좋아하는 것이 같은 게 되는 거지.”
윤지는 재미있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먹던 빵을 내려놓고 수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시작한다. 자장면과 짬뽕 중에 어떤 것을 더 좋아해? 자 숫자 센다. 하나, 둘, 셋.”
“자장면”
“자장면”
“하하하”
“히히히”
“윤지와 아저씨가 자장면을 둘 다 더 좋아하네. 우리 둘이 일치했네. 자, 하이파이브.”
윤지와 수현은 하이파이브를 했고 윤지가 아저씨 또요, 또요, 하며 재촉했다.
“다음은 사과와 배 중에 어떤 것을 더 좋아해? 하나, 둘, 셋. 사과.”
“사과”
“하하하”
“히히히”
“다음은 초콜릿 맛 우유와 딸기 맛 우유 중에 어떤 것을 더 좋아해? 하나, 둘, 셋. 딸기 맛 우유.”
“딸기 맛 우유”
“와우 윤지와 아저씨가 좋아하는 게 서로 많이 비슷하구나. 놀랍다.”
“정말로요. 아저씨랑 나랑 좋아하는 게 같아서 너무 좋아요.”
윤지는 기분이 아주 좋은 듯 수현과 하이파이브를 했고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며 다음에도 또 해요, 라고 말하고는 빵을 입에 넣고서 오물거렸다. 너무나 달고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 크림빵도 먹어도 돼요, 라고 말하는 윤지가 수현은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늘 혼자서 식사를 해결하던 수현에게 윤지와의 식사는 그 자체로 배고픔의 해결이기도 했지만 함께 식사를 할 상대가 있다는 것에서 외롭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전에 혼자 살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끔 윤지와 식사를 할 때면 혼자 먹을 때보다 밥맛이 더 있다고 해야 하나, 식사량이 더 늘어났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밥 먹는 즐거움 같은 것이 느껴지고는 했다. 만약 혼자 있었더라면 아마도 점심을 건너뛰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