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6-067
1
오빠가 내년 다이어리 2권을 가져다주었다.
아버지가 가져다주신 1권과 합치면 총 3권의 다이어리가 수중에 들어왔다.
내년에도 다이어리에 기록하고 계획을 세우는 등의 필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져니를 생각해서 다이어리 가져다주신 가족들이 뒷배인 듯 든든했다.
2
올해 미술도구를 잔뜩 구입했다. 이젤, 고체 물감, 수채색연필, 각종 펜.... 등등..
글을 컴퓨터로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그림을 컴퓨터로 그리는 것은 뭔가 예술성이 저하되는 일처럼 여겨졌었다.
어차피 시대가 변하면서 작품을 제작하는 도구도 진화하고, 발맞추어 변화된 도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어쩐지 글쓰기는 그래도 되지만 그림 그리기는 물성 있는 도구를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을 달리한다. 미술 프로그램이나 앱이 워낙 잘 나와서, 심지어 앱의 브러쉬는 현실의 붓보다 더 '붓'스러운 느낌을 주더라. 다만 져니의 경우, Ctrl + Z 기능이 없어서 긴장감 있는 과정을 주며, 붓에서의 손맛을 느끼게 되는, 물성 좋은 종이에 수채화를 그리려고 한다.
3
다이어리도 잔뜩, 그림 도구들도 잔뜩.
환경은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데 왜 나는 선뜻 계획을 적거나 그림을 그리지 못할까?
기왕 계획 세우는 거, 합리적이고 실천 가능성 높게 짜고 싶고, 기왕 그리는 거 CG로 그리는 것보다 더 괜찮은 느낌 나게 그리고 싶다. 그런 마음이 백지 공포로 나타나는 듯 보인다.
하얗고 깨끗한 저 지면 위에 훌륭하고 아름답고 굉장한 것들을 쓰고 그려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 그 압박감에 눌려서 외려 아무것도 그어내지 못하는 백지 공포가 진력나지만, 또 매번 그 기세에 눌리는 중압감은 늘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4
있는 건, 다이어리와 미술도구와 시간뿐.
코로나로 인해 홀로 있는 시간은 더 늘어났다.
다이어리의 백지와 수채화용 백색 종이의 두려움을 타파해야 한다.
백지 공포의 '백'을 와장창 깨부수고, 백지 공포의 '지'를 파바박 박살 내며, '공'을 뻥 차버리고, '포'를 빵 발사해버리리라.
그렇게 되면, 백지 공포는 나한테 져서 나의 노예가 되겠지. 복수할 거다.
나는 채찍을 들고 그 녀석을 찰싹찰싹 때릴 테야.
"너란 놈이 나를 무섭게 했단 말이지? 얍! 얍! 맞아라, 아파해라! 얍!"
통쾌해하며 계속 때릴 거야.
"얍! 얍! 꺄하하하! 얍! 맞아라!"
어.. 뭔가 변태스럽다.... 흐음... 역시 내 도량과 인격에 알맞게 용서해줘야 할까 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내가 "끝내 이기리라~~~"(BGM-상록수, 양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