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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Mar 06. 2021

봄비가 내리고

시즌6-077



1


비가 내린다.

울고 싶어졌다.

눈물 흘린지도 오래되었다.

예리하던 감정이 뭉툭해진 것도 같은데 울어볼까?

안구 세척도 할 겸 감정의 민감성도 세울 겸, 겸사겸사 오열해볼까?





2


어제는 오빠가 집에 왔다 갔다.

오빠가 돌아간 후에 보니까 옛날 다이어리들이 재활용품 모으는 통에 버려져있었다.

처음엔 그것들의 정체를 몰라서 들춰봤는데 어떤 학생인듯한 여자 글씨로 오빠에게 남긴 쪽지며 글들이 안에 들어있었다.

오빠가 대학 때 사용한 다이어리들도 버려져있었다. 

슬쩍 살펴보니 약간의 오글거림과 함께 섬세성 있는, 20대 젊은이의 푸른 느낌을 주는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다. 예의가 아닌 듯싶어서 그냥 몇 장 들춰보고 말았지만 버려진 다이어리를 보니 내 물건도 아닌데, 내 가슴이 괜히 다 서러워졌다.





3


오빠 말로는 학생 당시 자신이 인기가 꽤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이 아주 허언은 아닌 걸 느꼈던 건, 이성에게 받은 쪽지와 선물 등이 곧잘 목격되었었다.

어떤 여학생은 엽서에 알록달록한 그림과 무늬 등을 그린 후 그 안에 좋아한다는 뉘앙스가 절절히 느껴지는 글을 썼다. 

그렇게 쓴 엽서 수십 장을 일일이 코팅한 후 펀치로 구멍을 내어 엽서들을 연결했고 그것들을 오빠에게 보냈던 정황을 보았었다.

이번에 오빠가 버린 다이어리 안에는 어떤 여학생이 오빠 생각을 하며 적은 쪽지나 생각 등을 다이어리 가득 적어서 보내준 게 있었다.

기혼자들은 자신들의 아내와 남편에게 충실하겠다는 의지로 미혼 시절의 연애사진이나 흔적을 치워버리는 듯하다.

나도 그게 틀리다는 것은 아니지만, 심정적으로 인정은 하지만, 얼마간의 흔적은 간직하게끔 틈을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래의 내 배우자가 그런다면 기분이 좀 나쁠 것도 같지만.... 흠...




4


오빠는 결혼을 했고 결혼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괜한 불씨가 될 수 있는 그런 물건들을 치워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으리라.

현명하다.

그저 나는 과거의 예쁜 기억이 지워지는 게, 보고 상기하면 새록 떠오를 오빠의 예쁜 추억 하나가 사라질까봐 애달프게 느껴진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사라지기 쉽지만, 물성 느껴지는 쪽지와 편지는 훗날 기억을 상기시키기에 좋은 물건이니 남겨두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착잡해 할 일은 아닌데 기분이 왜 이럴까?





5


비가 온다.

울고 싶어졌다.

사라지고 흩어지고 지워지는 모든 흔적과 기억이 마음을 아리게 해서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6


오빠가 버린 다이어리 더미들 사이에 하나를 집어 들어 펼쳤더니.....


응? 이건 내 글씨.... 내가 쓴 다이어리이네?


분명 나의 다이어리였다. 학창시절 색연필로 칠을 하고 꾸며가며 사용하던 내 다이어리가 확실했다.


왜 이걸 오빠가 가지고 있었다지? 언제부터 갖고 있었던 거지? 내 메모 다 읽었겠네.

그리고 왜 오빠가 이걸 마음대로 버려?


아린 마음에 울고 싶었다가, 약간 분해서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왜 마음대로 버리고 그런담. 나는 오빠가 버린 거 주워 담아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참 내. 참 내... 허, 참 내....




7


비가 한나절 내린다.

기온이 따뜻해서 창을 한참 열고 있어도 방안이 추워지지 않는다.

오빠가 버린 더미에서 주워 담은 내 다이어리를 책장 한구석에 꽂아놓았다.


봄비가 내렸고 기온은 따뜻했고 나는 울고 싶지 않게 되었다.

미래의 어느 날 이 나날들을 생각할 때 하나의 추억이 되게끔 또렷하고 명징한 나날들을 살자고 다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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