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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Aug 13. 2022

자잘스토리 7 - 037 - 단호박 수프






1


낮 12시 반인데 느낌은 저녁 9시쯤 되는 것 같았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있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어린이들이 지나가는 모양인데 목소리가 방울처럼 울려대는 걸 보니 한참 어린 어린이인가 보다.

지나가는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며 빗소리만 들리는 듯 했을때, 변성기인듯한 학생과 좀 더 어린 남자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봐봐, 곧 온다, 곧 와, 잘 들어봐."


까끌까끌한 목소리의 아이가 말하고 나서 몇 초 뒤에 천둥이 우르릉 울렸다.


"우와, 와아!"


꼬맹이 남자아이는 공룡이라도 본 것처럼 신기해하며 환호했다.


"맞지? 들리지?"


변성기 남아는 다소 우쭐거리며 말한다.

그 아이들이 지나간 지 30분이 지났다.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고 천둥도 게으르지 않게 계속 울리고 있다.

꼬맹이가 집에 가는 내내 천둥소리를 들으며 재미있어할 것 같다.




2


예전에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단역인 여자 출연자가 그간 늘 대사 없이 지나가는 역만 맡았는데 모처럼 대사 있는 역을 맡았다고 한다.

그녀의 역할은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여직원으로 두 남녀 주인공이 메뉴를 골라서 주문하면


"수프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라고 대사를 하는 역을 받았다.

대사 있는 역은 처음이기도 하고, 잘 해내고 싶었기에 대사 연습을 아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수프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슾은 뭘로 하실까요?', '그럼 슾은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그녀는 혼자 수도 없이 되뇌며 억양도 이렇게 저렇게 달리해가며 열심히 연습했다.

촬영 직전까지도 '슾은..'라고 호흡을 가다듬고 연습했다.

드디어 촬영에 들어가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큐!"


그녀는 대사를 읊었다.


"죽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3


단호박 수프를 만들었다.

한식 식단 위주의 재료를 사용하시는 어머니가 단호박 수프를 맛있게 드셨다.

이전 같았으면 '생크림, 치킨스톡을 얼마나 쓴다고 수프 한번 먹겠다고 사느냐.'라고 하셨을 텐데 단호박 수프가 생각보다 맛있으셨던지 재료 구입 사실에 타박을 하지 않으셨다.


변성기 남자아이는 과학시간에 번개와 천둥의 원리를 배웠을 테고 자신이 아는 그것을 전수할 수 있는 꼬맹이가 있어서 기뻤을 것이다. 자신은 자긍심이 생기고 꼬맹이는 새로운 지식을 얻을 테니 말이다.

새로운 음식의 요리법을 배우는 것이 즐겁다는 느낌이다.

나는 그 남자아이가 된 느낌이다.

실생활에 유용한 요리법을 배워서 만들어보고 싶었고 그래서 만들어서 드려봤더니 맛있어 하신다.

자긍심이 생기고, 드시는 분은 입이 즐거우니 기쁘고.




4


누가 뭐래도 내가 생크림과 치킨 스톡으로 만든 것은 단호박 수프이다.

그런데 부모님께 내어드릴 때 마땅한 그릇이 없어서 모양과 깊이가 애매한 그릇에 담아 드렸다.

수프니까 수프답게 수프 그릇에 수프를 담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모양새가 어색했다.

그릇이 구색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했지만, 뭐, 맛이 좋으면 90%는 좋은거지, 라고 생각했다.




5


나는 하루의 시간 일기를 적는다.

대략 5분 단위로 끊어서 시간을 적고 무슨 일과를 했는지 적는다.

단호박 수프를 만든 날, 내가 수프를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 찾아봤다.

나는 <오전 7:50 단호박 수프 요리>를 만들지 않았더라.

45분 걸려서 <오전 7:50 단호박 죽 요리>를 했더라.

그릇의 비주얼이 영 수프와는 맞지 않았으나 '죽'이라고까지는 생각지는 않았는데....

암암리에 나조차 '죽'이라고 떠올렸나 보다.

모델 미란다 커가 한국 애칭으로 미란이라고 불리며 사랑받는다지.

고소한 단호박 수프는 우리 집에서 사랑받는 단호박 '죽'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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