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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Nov 09. 2024

자잘스토리 8 - 044 - 계획 세우기






1


어릴 적엔 신년 계획은 꼭 1월 1일에 세워야만 될 것 같았다.

십수 년간 다이어리 적으면서 월간 계획, 주간 계획을 살펴보고 세우다 보니,

이제는 계획 세우는 일이 그닥 엄숙하거나 대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당일 계획도 어그러질 때가 많아서 변경해야 하기도 하고

의도대로 완벽히 수행되지 않기도 해서, 

나 자신에게 살짝 빈정이 상하기도 했다.


'왜 딱딱 못하는 거야!'... 하고.


근데 그랬던 일도 이미 수년 전에 그랬던 것이고,

이제는 계획 세우기는 습관, 변경은 빈번한 물 마시기 같은 것, 

어그러지는 것은 운명이려니, 그리 생각하고 다이어리를 적는다.




2


처음에는 다이어리를 아주 깔끔하고 보기 좋게 쓰려 했는데, 부질 없더라.

그냥 마음 편하게 쓱쓱 쓰고, 고쳐야 하면 쓱쓱 두 줄 긋고,

다른 날로 일정을 옮겨야 하면 쓱 화살표를 그려 표시하고...

천상 악필이라 미학적 선 긋기와 거리가 멀어서 마구 긋다 보면

다이어리가 아주 어지럽고 복잡하게 보인다.




3


그러나 나는 그것을 노린 것이다.

집순이라 미팅도 얼마 없고, 대략의 개인 일정이 쬐끔 있을 뿐인데,

괜스레 개인 작업 일정을 여러 단계로 분리해서 적어주고 

그게 어그러져서 두 줄 긋고 화살표 그리고 막 그러면, 

다이어리가 아주 바쁜 사람의 복잡한 스케줄러같이 보인다니깐.

나는 그걸 노린 것이다. '바쁜 사람'이라... 폼 나지 않은가?




4


2025년 먼슬리 다이어리를 구매했다.

버킷리스트 페이지와 12달 계획 페이지에 포부 넘치는 항목을 적으려고 보니...

쓸 내용... 계획... 사항이... 없을... 뻔 했다.


다행히 올해 장기 계획의 필요성에 눈을 떠서

고심 끝에 3개년 계획의 얼개를 짜냈다.




5


바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냥 바쁜 사람이 폼이 좀 있어 보인다.

계획 두어 개 더 생겼다고 내 일상이 다이내믹하게 바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작업시간은 늘어나게 되겠지만,

그 때문에 외출이 잦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고로 나는 여전히 집순이로 집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키보드 잡고 다다닥 자판을 수없이 누르고 있을 것이다.

외려, 늘어난 작업시간 때문에 외출이 더 번거롭게 느껴져서

2번 외출할 걸 1번으로 줄이겠지... .




6


다이어리에 아직 아무것도 적어 넣지 못했다.

3개년 계획은 대충 짜냈는데, 내년치에 해당하는 

3분의 1의 부분 계획이 정돈되지 않았다.


참 내, 3개년 계획을 세웠는데,

다시 부분으로 나누어 세부 계획을 짜야 한다니,

3개년 계획 같은 건 계속 분할해가며 계획을 좀 더 또렷이 세워야 하는 건가?

아무튼 번거롭게 되었다.


근데 벌이는 일 가운데 가장 재미있고 짜릿한 건, '계획 세우기'더라.

잘 수행했을 때 보이는 결과가 즐겁고, 또 새로운 계획이 시작될 수 있기에.

계획 세우는 건 어느 정도 상상력을 사용해야 해서 뇌가 즐겁기도 하니까.

그러나 또 계획대로 실행을 못하거나 안 하면,

기분이 영 찝찝하고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에,

뇌의 불쾌도가 높아지는 부작용도 있다, 실행을 안 한다면 말이다.




7


사람이 365일 한결같이 일만 할 수는 없다.

아프면 쉬어야 하고, 명절과 공휴일은 다 쉬는데 

나만 안 쉴 수 없으니 쉬어야 하고

가끔은 기분이 영 저조해서 쉬어야 하고,

비 오는 날은 운치에 젖어야 하므로 쉬어야 하고,

바람 불면 스산하니 라면 끓여먹으며 드라마를 보는 게 좋고,

눈 내리면 산타가 없다는 사실에 개탄하며 혼술 한 잔을 하는 게 좋다.


이유를 만들려면 200개쯤 만들어 200일을 놀 수 있지만,

삶의 즐거움은 쉬는 것에 있지 않고,

일하고 쉬는 그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과정 속에 있다고 본다.

비슷한 듯 다채롭게 집중하는 노동을 하고, 

평범한 듯 색다르게 이완하는 휴일을 보내고.


나는 365개의 이유를 만들어 놀려고만 하면 1년 내내,

그걸 3번 반복해 3년도 너끈히 놀 수도 있지만,

노동의 미덕과 휴식의 안온을 알기에 부러 일하고 쉬는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여하간, 3개년 계획을 3분의 1로 나누어 1년 치로 다듬는 것도 만만치는 않은데,

역시 어려운 건 실행... 매일의 실행이 어려울 뿐이다.


지금 계획 범위를 너무 크게 세웠나 싶어서 심리적으로 살짝 위축되어 있다.


'그냥 하던 대로 살지, 뭘 해보겠다고.....'


...라고 움찔움찔 자신감이 없다.

근데, '넘어지면 일어서는 데에 삶의 의의가 있다.'라고 누가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나는 넘어지지 않고 지금 엄청 잘 서있는데 

그럼 투스텝 걷기를 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일 뿐이다.




8


1년 분의 계획 세우기, 투스텝과 같은.


3개년 계획 안의 1년 분 계획 안의 6달 계획 안의 1달 계획을 짜고 있노라니,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큰 덩어리 계획을 세분화해서 짜보는 것도 안 해본 일, 

근데 조금 해보니 해볼만 한 거라서,


'어머 어머, 나 지금 투스텝 될라 그래. 호홍'


...라며 즐거워하고 있다.




9


그럼에도 역시, 계획의 '수립'보다는 

매일의 '실행'이 훠얼씬 더 어려운 법,

다이어리에 다달의 계획을 적어 넣기가.... 

....두렵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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