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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Oct 12. 2020

내 마음의 안전지대, 바로 여기

지금 나에게 필요한 나만의 보물섬


“잠깐만, 이거 스피커폰이야. 옆에 K가 있어.”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스피커폰이라고 진작 얘기했어야지 왜 가만히 있었냐고 원망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K도 알고 있는 P에 대한 험담을 이미 한두 마디 내뱉은 후였고, 너무 날것 그대로의 험담이었기에 이제 와서 그걸 훈훈하게 포장할 방법이 없었다. 설령 방법이 있었다 한들 그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스피커폰이라는 것을, 조수석에 K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주지 않은 친구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사실 친구로서는 갑자기 예고 없이 P에 대한 험담을 시작한 내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한 내가 한심하고 바보 같아서 화가 났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으로 밤늦게까지 이불킥을 되풀이했다. 

최근 들어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순간이었다. 


이런 크고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필요한 게 바로 나만의 보물섬, 안전지대이다. 

사실 안전지대는 이런 일상의 스트레스보다는 트라우마 상황에서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오래전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는 나의 인생 드라마 중 하나다. 나이가 든다는 것, 친구가 있다는 것,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몇몇 장면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완이(고현정)가 엄마(고두심)에게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완이는 엄마가 6살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 자신을 데리고 동반 자살을 시도했던 기억을 강렬한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왔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에게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그 트라우마를 표현한 것이다. 마침 내가 당시 대학원에서 위기 상담 수업을 듣고 있던 터라 그 장면이 더욱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기록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약 60%의 사람들이 평생 적어도 한 번 이상 외상 사건에 노출되며 이들 중 8~14%의 사람들이 PTSD,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한다고 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PTSD는 그리 낯설지 않은 용어가 되었다. 물론 의학적인 DSM 진단 기준에 따르면 트라우마란 죽음의 위협이나 심각한 상해, 성적인 폭력을 직접 경험하거나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 상해 등을 직접 목격한 경우, 또는 이를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경우, 충격적인 사건들의 혐오감을 주는 세부적인 것들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사건 등을 경험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기준을 조금 더 확장한다면 사실상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겪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의학적 기준의 트라우마는 겪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소소한 트라우마는 늘 안고 살아온 셈이다. 


트라우마 치료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생활 속의 작은 트라우마 상황, 또는 긴장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안전지대 방법'이다. 정서적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그라운딩 Grounding' 전략의 하나인 ‘안전지대 방법'은 말 그대로 우리 삶의 ‘안전지대'를 만들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즉, 트라우마가 침습해오거나 강한 스트레스 상황을 만났을 때 마음을 잠시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만들어놓는 것이다. ‘안전지대'는 내가 실제로 가봤던 장소도 좋고 가상의 어떤 장소를 만들어도 좋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긴장 상황을 만나면 일단 눈을 감고 그 장소로 가서 그곳을 찬찬히 둘러보며 그곳의 느낌, 냄새, 촉감 등을 충분히 느껴본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곳, 나만의 안전지대에 머물다 보면 마음이 서서히 편안해진다. 

안전지대가 반드시 특정한 ‘장소'일 필요는 없다. 보면 기본이 좋아지는 사진, 글귀, 노래 등도 모두 나의 안전지대가 될 수 있다. 아예 휴대폰 안에 ‘안전지대’ 폴더를 만들어서 그 안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을 넣어둔 다음, 스트레스 상황 때마다 꺼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의 안전지대는 몇 년 전에 여행했던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 한가운데 있는 태양의 섬 Isla del Sol이다. 

이곳은 우리가 태양의 섬을 걷다가 잠시 멈춰서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지 계속 갈지를 고민했던 지점이었다. 앞으로의 동선을 의논하기 위해 친구가 앞서 걸어간 일행을 부르러 간 사이에, 난 이곳에 혼자서 10분쯤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양 두세 마리가 나무 옆에서 풀을 뜯고 있었으며 바람 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듯 철저하게 고요하고 철저하게 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던 바람의 흔적, 눈부시게 강렬했던 태양의 빛, 흙냄새 비슷한 칼칼한 자연의 냄새, 나 혼자 가상의 어떤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낯선 느낌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마치 지금 손을 뻗으면 그 냄새, 바람, 느낌, 햇살 등이 그대로 만져질 것 같다. 

비록 1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공간, 그 시간, 그 느낌은 내 안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이곳으로 잠시 피하면 나는 안전하게 쉬면서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이 든다. 그래서 난 이곳을 나의 안전지대로 정하고 휴대폰 안에도 사진을 넣어두었다. 


처음 트라우마 수업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그게 현실에서 가능할까, 진짜 트라우마 환자가 아닌 바에야 이런 방법이 뭐 통할까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강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이곳에 머물면 정말로 마음이 편해졌다. 눈을 감으면 난 어느새 지구 반대편 태양의 섬에서 칼칼한 자연의 흙냄새를 맡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내가 더없이 한심한 오늘, 이 안전지대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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