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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Jun 25. 2022

나 안 예쁜 거 알아, 엄마

“나 안 예쁜 거 알아, 엄마! 사람들이 언니한텐 예쁘다고 하고, 나한텐 귀엽다고만 해!”


7~8살 무렵,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날씬하고, 눈도 큰 언니와 통통하고, 작은 눈의 내 모습이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나는 예쁘지 않다는 것도 눈치챘다. 어린아이였지만, 사람들이 우리 자매의 외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너무나도 잘 느껴졌고, 귀여운 것보다 예쁜 것이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는 뉘앙스도 읽어낼 수 있었다. 내가 진짜 귀여운 아이였어도 예쁜 언니라는 비교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어른들의 “귀엽다”는 말은 안 예쁜 나에게 마지못해 해주는 칭찬일 뿐이었다.


크면서도 예쁜 아이로서의 노선을 탈 수도, 억지로 예뻐지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사춘기 때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들 하지만, 내게 사춘기는 되려 외모를 포기했던 때였다. “나는 예쁘지 않으니까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 해”라는 구시대적 생각을 하며 공부만 했더랬다. 아, 고등학생 때는 몽셸 한 박스를 우걱우걱 먹는 행위를 합리화하고자 ‘대학만 가면 예뻐질 수 있다’라는 망상을 갖고 있었다.


망상을 실현하고자 수능이 끝나고 개인 PT를 받으며 살을 10kg 넘게 뺐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살을 뺀 내 모습도 그다지 예쁘지 않았다. 그냥 덩치가 더 작아진 나인걸..? 하얀 시폰 소재의 블라우스와 짧은 치마도 입어 보고, 아이라인을 그려보고, 머리띠도 해보고… 별의별 시도를 했지만,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었다(당연함). 게다가 어릴 때는 주변 친구들도 다 꾸미지 않고 다녔던 어릴 때와 달리, 대학에 오니 모두가 연예인처럼 꾸미고 다녔고, 그래서 그런 친구들과 남몰래 나를 비교했다.  


그땐 싫어하는 남자 선배가 “오늘 좀 괜찮네?” 라고 하는 말을 칭찬으로 듣기도 했다. 왜 나는 그 말을 칭찬으로 들었을까. 살면서 외모로 “예쁘다”라는 평가를 듣지 못해봐서였을까? 언니만 듣던 말을 나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성취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예쁘다”는 평가는 일종의 훈장이었고, 누구나 들으면 기분 좋고, 듣고 싶어 하는 칭송이었다. 그리고 그 평가가 어린 시절의 나를 속상하게 했던 것은 망각해버린 거다. 


여성주의 활동을 하면서 그런 평가가 칭찬이 아니라 "얼평"이고, 대상화 하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예쁜 게 좋다"는 생각을 놓지 못한 것을 고백한다. 지금과는 다른 당시 여성주의 흐름의 영향도 있었을 테지만, 외모지상주의에 반대하는 캠페인으로 이곳저곳에 “당신도 예뻐요”와 같은 메모를 붙여놓기도 했다(진짜 흑역사여서 아무한테도 말 못했던 건데, 특별히 여기서만 푼다. 소문내지 말아 주시길…). “예쁘다”는 가치는 여전히 좋다는 전제가 깔려있고, 예쁨의 기준이 획일화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딱 붙는 바지를 안 입고 벙벙한 청바지를 입었지만, 여전히 나는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은 욕구는 벗지 못했다.


그래서 이후 탈코르셋 운동을 보며 그때의 욕구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해서 한순간에 변하지는 않는다. 탈코르셋 한 여성들을 보며 멋있어했지만, 조금은 거리를 두었다. 갑자기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하지 않고 출근하면 회사 사람들에게 들을 말에 대응할 자신이 없어 뒷걸음질 쳤다. 동시에 이렇게 거리를 두는 자신을 비겁하다고 여기고, 탈코한 여성들에게 부채감을 안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부채감이 무색할 정도로,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탈코르셋에 가까워지고 있다. 도쿄 올림픽에서 내 가슴에 불을 지른 안산 선수를 흠모하며 숏컷으로 쳤고, 짧은 머리에 어울리는 옷을 사다 보니 유니섹스 옷을 즐겨 입게 됐다. 또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화장도 안 하게 됐더니, 맨얼굴로도 잘 돌아다닌다. 비장함 없이 그냥… 그렇게 됐다. 탈코르셋 운동에 거리를 두었지만, 취지에 공감하고 또 많은 여성을 보며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스며들어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예쁘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고 해서 거울을 보며 속상해하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면, 평생을 외모로 압박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거울을 보든, 누군가 찍어준 내 사진을 보든 ‘눈이 더 컸으면 좋았을 텐데’, ‘두 턱이네…’ 같은 생각을 잠시 하며 시무룩해지긴 한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것은 그 시무룩함에서 끝난다는 거다. 악착같이 살을 빼려고 한다거나, 화장품을 얹는 등의 행위로 이어지지 않고 말이다. 예쁘지 않은 본판을 예뻐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보다 안 예쁘지만, 나답게 보이는 게 더 좋아졌기 때문에.


그래서 누군가 외모 지적을 해도(가족 외에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긴 하지만), 타격감이 없다. 오른쪽 귀로 들어와 왼쪽 귀로 바로 흘러나가는 정도의 깃털같이 가벼운 잡음이 되었다.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예쁘다”는 말은 못 듣고 “귀엽다”는 말은 많이 듣지만, 마지못해 하는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속으로 ‘제 매력을 알아버리셨군요…’라고 생각하며 흐뭇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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