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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Jul 06. 2024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날 구할 거야

취향과 기억이 담긴 책장

"예술가의 집 같아."


집을 방문한 친구가 내 책장을 보며 말했다. 언젠가 한 독서 모임에서 다시 태어나면 어떤 직업을 갖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예술가라고 답했다. 그 정도로 예술을 흠모하기에 친구의 감상평에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두운 원목 책장에 칸칸이 테마에 맞게 꽂힌 책, 철저히 심미적인 목적으로 책장 한 칸을 차지한 소품, 좋았던 경험을 떠올리게 할 물건들, 그리고 그 옆에 세워진 다홍색 기타. 책장 위에는 김보희 작가 전시회 때 받아온 작은 크기의 그림, 초록색과 갈색의 조화가 예쁜 탁상 조명, LP 플레이어가 올라가 있다.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 넣은 공간으로, 가끔 멍하니 그 책장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눈앞의 모습이 만족스럽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이사 온 첫 날, 이 책장부터 정리했다는 사실. 그만큼 책장은 집의 근간이 되는 구역이다. 특히 애정이 가는 것들을 소개해 볼까.


좋아하는 밴드인 KODALINE이 더블린에서 한 공연 실황 음원을 듣고 반해서 직구한 실황 LP부터 소개해 보겠다. 관중들의 떼창, 박수, 환호성까지 녹음된 이 LP는 틀자마자 공연장의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다.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며 흥얼흥얼 같이 떼창을 한다. 집을 공연장으로 순식간에 바꿔주는 기특한 녀석.

*사실 LP 감상은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취미다. LP가 거의 5만 원 이상이라 수집한다면 꽤나 비싼 취미이기 때문. 그래서 더 수집하진 않고 내가 좋아하는 LP 딱 3장을 돌려 듣는다.


그동안 갔던 페스티벌 입장 팔찌도 올려두었다. 초록색, 하늘색, 분홍색… 형형색색의 색상부터가 사람을 참 설레게 한다. 팔찌를 모아둔 이유는 미래의 나를 위해서였다. 언제든 페스티벌에서의 즐거움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장치랄까. 해리 포터에 나오는 포트키*가 물리적인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면, 페스티벌 입장 팔찌들은 정신적인 이동을 돕는 셈이다. 페스티벌에 다녀오면 일주일 안에 블로그에 후기를 쓰는 습관이 있는데, 같은 맥락이다. 좋았던 기억이 휘발되지 않게 저장해둠으로써 미래의 내가 지쳐있을 때 그때의 기억을 되돌아보며 웃을 수 있길 바랐다. 일종의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

*손을 대는 순간 다른 공간으로 순식간에 이동시키는 장치


그리고 책들도 특별한데, 일차적으로는 애정 있는 책들을 선별했다. 다시 꺼내 읽거나 내게 의미가 있는 책들만 남겼다. 그다음, 나만의 독립 서점인 것 마냥 나름의 북 큐레이션을 했다. ‘마음이 힘들 때 읽는 책’ ‘최애 한국문학 작가’ ‘술이나 음식 관련 책’ ‘흥미로웠던 사회과학 / 비문학 도서’ ‘페미니즘' 등의 테마를 갖고 있고 자주 손이 가는 순서대로 배치했다.  


원목 거울과 갈색과 초록색의 조명은 4년 전 집을 계약했던 시점에 사두었던 아이템이다. 입주까지 한참이나 남았지만, 원하는 집의 분위기가 명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립이 결정되고 들뜨는 마음에 계속 오늘의 집을 보다가 내가 꿈꾸는 거실의 풍경에 딱 맞는 느낌이라 일단 사두고 찬장에 보관해 두었다. 드디어 제 쓰임을 다하는 친구들, 오랫동안 기다리느라 고생했다.


대망의 기타와 앰프! 쨍한 다홍빛의 기타와 오렌지 앰프가 인테리어적으로 일당백을 한다. 일찍이 음악엔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생에 악기를 연주할 일은 없겠구나 싶었는데, 작년 겨울부터 기타를 배우고 있다. 요즘엔 레슨을 그만두고 그전만큼 자주 연습하고 있진 않아서 이 친구들을 볼 때마다 양심에 찔리지만, 아무튼 아름답다. 기타 밑에는 친구가 선물해 준 LP 모양의 러그를 깔았는데, 단순히 멋을 위해서 그랬다. 연주 영상들을 보면, 악기 밑에 러그(대체로 페르시안 패턴의 러그)를 깔아두었더라. 멋있어 보이는 것, 따라 하는 수밖에.


이렇게 철저히 내 취향과 기억이 담긴 책장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책장 인테리어를 위해 한꺼번에 산 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하나씩 모아두었던 것들이기에 더 애정이 가고, 한편으로는 과거의 나에게 아주 고맙다. 지금은 사정상 취향을 위한 소비를 줄였는데, 과거의 내가 뭘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고, 활발히 소비해 둔 덕분에 소비에 대한 갈증을 덜 느끼며 충분히 만족하고 지낸다.


좋아하는 것이 있을 때 역시 최선을 다해 좋아하는 것이 이롭다. 당시의 나에게도, 미래의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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