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 특히 맥주를 좋아한다. 한창 자주 갈 때는 매주 크래프트 비어 바에 혼자 가서 홀짝홀짝 여러 잔을 맛보는 걸 즐겼다. 조금만 좋아해도 “나 이거 좋아해! 진짜 좋아해! 진짜 진짜 좋아해!” 외치는 사람이라, 주변 사람들도 나의 술에 대한 사랑을 잘 알고 있었다. 맥주 사진을 뜸하게 올렸더니 오랜만에 간 카페 사장님도 “요즘은 맥주를 자주 안 드시나 봐요"라고 하실 정도.
그랬던 내가 퇴사를 앞두고서부터 술을 멀리했다. 완전한 금주를 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와 마실 때는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셨고, 혼자서는 절대 술을 마실 생각을 안 했다. 본능적으로 내가 취약한 상태임을 알았기 때문. 술에 취해 알딸딸한 상태가 되면, 잠깐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 감각에 또 취하면 계속해서 술을 찾게 될 것이 뻔했다.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동굴에서 혼자 술을 마셨던 대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니지만, 그때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할 괴로움이 있었다(말하기도 창피할 정도로 사소한 것이라 뭐 때문에 힘들어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저 ‘말해봤자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는 나르시시즘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건데,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매화수, 자몽에이슬 같은 과일 맛 술을 혼자 학생회실과 방에서 홀짝이곤 했다. 고백하자면, 술에 취했다기보단 ‘혼자 방에서 처량하게 술을 마시는 나,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하는 나, 너무 불쌍해'라며 나의 고통에 취했다. 눈물 셀카를 찍는 사람처럼. 고통에 취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사람은 바뀌지 않을 것. 또 현실 도피를 위해 술을 혼자 마시면 불행에 취해있을 내가 훤히 보였다. 인간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지만, 그 짓만큼은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다수와의 술자리는 조금은 다른 이유로 즐기지 않기 시작했다. 3인 이상의 다수가 함께하는 술자리의 기본 무드는 ‘흥'인데, 좀처럼 흥을 낼 수 없는 상태라 군중 속 고독을 느끼게 됐기 때문.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 물 위의 기름처럼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하고 둥둥 찌꺼기처럼 떠 있는 나를 자각하는 순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따라서 웃고는 있는데, 마음은 지옥이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집중이 안 되는 건 물론, 분위기가 가라앉을까 봐 내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시간을 견뎌냈다.
다만, 일대일 술자리는 종종 가졌다. 각자의 페이스대로 술을 홀짝이며 조용하게, 때로는 화를 내면서, 슬퍼하면서 일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어 입술을 옴짝달싹하기만 했던, 쌓아 두었던 화와 슬픔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흥이 아니라 감정의 발산이었던 것 아닐까.
그렇게 한 달을 보냈을 무렵, 저녁에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오늘은 혼자 술을 마셔도 괜찮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동굴로 들어가지 않을 자신, 취기가 내 상처를 헤집어 놓지 않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으며 화이트 와인 두 잔을 마셨고, 다행히 즐거운 취기가 올랐다.
술을 멀리해 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술을 다시 마실 수 있게 된 순간 기뻤다.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정신으로 지내면서 상처에 무뎌졌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호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