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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Sep 19. 2023

이상적인 미래의 나를 위해 계속 달려야만 해

2014년 1년 차 기획 피디의 기록

2014년 6월 25일

피칭 날짜가 미뤄진 것을 기회로 삼아 이번 주는 내용 고민을 더 하고, 다음 주는 피칭을 잘할 수 있는 노력을 하자. 주말까지, 아이템의 재미가 뭔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재미있게 생각할 지에 대해서 고민할 것. 


자신이 큰 모자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채우기 위해, 미래의 위치에 이상을 맞추어 달려갈 필요가 있다. 이것이 당장은 힘에 부치고 스트레스를 받게 하더라도 언젠간 해야 할 일이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스트레스받지 않고 안주하길 원하지만, 당장은 편할지라도 그렇게 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회사는 결과를 보고 판단하지만 내가 처음 내놓은 결과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나 자신에게는 큰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쁜 일은 하나도 없고, 쓸모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


2014년 7월 6일

PPT에 레퍼런스 영상 2개 삽입. 대본 짜기, 연습하기, 이번 주에 미리 7월 피칭 아이템 생각하기. 

피디님께 보내기. 


2014년 7월 11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안달을 내고 시행착오를 겪던 몇 주가 흐르고, 약 한 달이 흐른 지금은 조금은 회사에 적응한 것 같다. 회사의 성향도, 사람들의 성격과 일하는 방식도, 출퇴근이 없는 구조도. 


나의 장단점. 일단 스케줄에 철저하다.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더 노력하고, 미리부터 걱정을 많이 한다. 겁을 내는데 비해 결국 해야 할 일이면 받아들이고 움직인다. 단단한 부분도 장점이다.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데 능숙하다. 유연하다. 융통성이 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나만의 생각이 있다. 주관을 펼칠 날을 꿈꾼다. 앞으로의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갈까. 


2014년 7월 12일

오늘 목표한 일을 끝낼 수 있을까? 


2014년 9월 4일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닌데 나의 무른 부분을, 소중히 품어왔던 꿈을 사정없이 두드려 맞았다. 그녀를 탓할 생각은 아니다. 내가 경솔했던 것이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 여기며 잊어버리자고 생각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상처는 이미 나버렸다. 


난 정말 복잡한 사람인 것 같다. 스스로도 내가 미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단순해질 수 없는 걸까. 왜 나는 한 가지 일을 겪었을 때 수만 가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감각의 촉수가 불필요하게 많다. 손해다. 이건 분명.


앞으로 꿈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겠다. 나만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타인의 흉폭함으로 오염시키고 싶지 않다. 나만이 그 경험의, 그 감정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다. 이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만들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어떤 구절, 

내가 올바르게 해독하고, 올바르게 연주하더라도 평가는 제각각. 


2014년 9월 모일

그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곳에서 도망쳐. 더 있다가는 크게 다칠지도 몰라. 내 좋은 기운이 모조리 빼앗기는 느낌. 그들의 묘한 그 우월감. 웃음. 욕설. 찌푸림. 술. 맥주잔 위로 떠오르는 탄산과 거품. 쓸데없는 잡담. 기묘한 침묵, 테이블 너머 또 다른 세상. 언제나 같은 장소에 있어서 가깝게 느껴졌던 사람이 너머의 세계에 있는 것을 보고 느끼는 소외감. 난 그녀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생각하게 되었던 저녁. 모두가 기묘한 우월감을 번들번들 얼굴에 바르고, 어깨를 펼치고 들어와 바보 같은 말만 지껄이고 서로를 곁눈질하는 자리. vip 시사회 뒤풀이 술자리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2014년 9월 28일

이번주만 지나가면 엉켜서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았던 실타래가 풀리고 다시 뜨개질을 시작할 수 있게끔 많은 일들이 정리가 되고, 일단락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희망적인 미래를 즐겁게 기대하도록 하지만 당장은 바쁘고 정신없을 거라는 사실.. 


아무래도 직장인 극단을 계속할 순 없을 것 같다. 내 생각과 다르게 연기라는 것이 참 나와는 맞지 않았다. 경험했고, 알았으니 됐다. 해보고 싶은 목록 중 한 가지는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은 했다. 부산 국제 영화제를 다녀와서 앞으로 기획 아이템을 어떤 식으로 준비하고 쌓아갈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올해는 그렇게 또 내년에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면서 마무리를 해야겠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순간들은 마치 정해져 있는 수순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급해할 필요 없는데 마음으로 믿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를 느낄 만큼 사람이 아직 안된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바람 한 점 몸 안을 훑고 지나가면 구멍이 뚫린 듯 스산해오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방황하고 만다. 결국엔 실제로 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대하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음을 알아볼 수 있을까? 느낄 수 있을까? 


느껴질 것 같다고 막연하게 믿음을 가지고 있긴 하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내게 중요했던 모든 순간들에서 난 느꼈으니까. 그리고 그때가 오면 정말 나를 위해 그 일이 준비된 것처럼 사건들이 완벽하게 정렬되고 일사천리로 일이 풀리게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내가 생각한 기획방향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지 않을 수도 있어. 그걸 생각하고 레퍼런스 영화를 정리하자. 피곤하지만 오늘 정리하고 자고, 내일 오전에 연락 오면 곧장 보내도록!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고독이란 다시 감각의 부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느끼는 것들을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제가 느끼지 못한다거나. 예컨대 그게 책갈피에 검지가 베이는 것 정도로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다니카와 슌타로 <이십억 광년의 고독>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2014년 10월 19일

거짓말처럼 바쁘게 계획된 일들이 모두 끝났다. 분명 매 순간 힘들었던 것 같은데 이젠 과거의 저편으로, 과거의 집합체에 엉겨 붙어 버렸다. 시간이 참 빠르다. 현재에 집중하면 할수록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래서 이번 달은 급한 대로 기획안 3개를 대충 구색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음 달은 어떻게 할까. 기획을 어디서 가져올지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기획의 톤 앤 매너도 선이 굵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해야 할 듯하다. 


투덜대는 건 그만두자. 이만한 직장이 어디인가. 사람은 모두 각자의 가치관이 있는 법이다. 처음부터 굳건할 수 없다. 처음에는 누구나 애송이니까. 4개월 간 흔들릴 것은 다 흔들렸다. 바보처럼 휘청댔다. 하지만 먼저 인생을 산 선배들은 말한다. 후회 없이, 소신껏 가라고. 시야를 넓게 가지고.


리더로 향하는 길은 리더의 생각을 헤아려 보는 것. 나도 그런 식으로 꾸준히 윗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생각하자.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던 것은 내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진실을 보고자 애쓰는 눈이 생생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타락하지 말자. 타락이란, 내 가치관에 반하는 일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즐겁게 하고 싶다. 힘들지만 보람차게. 


2014년 11월 30일

이 회사에 들어와 이제 6개월 차에 접어든다. 벌써 반년이 지난 것이다. 내가 반년 간 이룬 성과는 두 편의 시놉시스 작성, 10편의 아이템 피칭, 자료조사 및 시놉 초안 작성과 잡다한 사무실 행정 업무. 결과만 보면 별 것이 없으나 1년간 인턴 기간에서 배웠던 것들을 실제로 적용해 보았다는 것이 의미 깊다. 


둥글하게, 유하게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사건임에도 내가 돌출행동을 한 이유를 분석해 보면 그 원인은 항상 부당함이나 억울함이었던 것 같다. 비합리적, 비효율적 방식을 강요하며 무조건적인 좋은 결과를 원하는 지시들. 나의 존재가치를 무시하는 처사들. 반말을 하며 건건이 신경질을 낸다. 열심히 하니 욕심이 많다고 한다. 항상 일을 떠넘기기 일쑤다. 늘 말이 바뀐다. 관심도 해결의사도 없다. 매뉴얼이 없다. 이 회사에서 겪은 문제들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때까지 대처방식은 어땠나? 참았다. 다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기 때문에. 나는 신입 여직원이기 때문에.


2014년 12월 11일

내일이면 사무실 추가 세팅 건은 일단락이 난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그래도 결국 매듭이 지어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다. 뿌듯하다. 




커버 사진

장 뤽 고다르 <비브르 사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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