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년 차 기획 피디의 기록
2016년 1월 1일
새해라고 해봤자, 특별할 일도 없고 그 어느 때보다 무덤덤했는데 그래도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새해 기분이 나는 것 같다. 새해기분이 나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면 내가 계속 일을 진척시키거나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찝찝함 때문이 아닐까. 이대로 쓸모없다고 여겨지거나 도태될까 봐 두렵고, 시선도 신경 쓰이고. 난 어쩌면 지금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월급을 따박따박 받는 입장으로써 실적을 신경 써야 하지만 조금 뻔뻔하게 생각하면 계약을 성사하는 '결과'보다 자립한 프로듀서로써 아이템을 들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이 더 가치 있는 일 아닐까. '결과'가 내 가치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일인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16년이 되어서야.
눈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내가 발버둥 치며 움직였던 것, 느꼈던 것, 모두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경험이 아닌가. 매 해, 매 단계마다 변해야 한다면 그 과도기에 방황을 했던 거라고(당연한 수순으로),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싶다. 이 일을 계기로 난 두 번의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학생에서 사회인으로의 변화 두 번째는 신입 피디에서 본격적인 실무 담당의 피디로의 변화.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이젠 서른 살이 된 만큼 좀 뻔뻔해지자. 뻔뻔하게 그리고 매우 솔직 담백하게.
2015년까지 세상에 나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써왔다면, 2016년부터는 내가 나의 세상을 만들어가야지. 서른 살에 걸맞은 좋은 포부인 것 같다. 언제나 기억할 것. 내 삶 자치게 가치 있다는 것. 나쁜 짓하지 말고, 언제나 당당하게, 상냥하고 솔직하게. '사람 냄새'가 나는 어른 여자가 될 것.
2016년 1월 5일
작가가 아이템을 어떻게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에 대한 아이디어나 플랜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 작가와 작업을 안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 자체가 아이템의 평가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희일비하지 말자. 인연이 있고 맞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없고 계속 작업이 난항이면 이 아이템과 내가 인연이 아닌 것이다. 그것에 대해 책임을 쳐야 한다면 지면 되고, 엎어지면 그만이다.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2016년 1월 8일
프로의 세계는 그런 거라고 아마추어 취급당한 것에 마냥 열받은 건 아니다. 잘 모른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깊숙하게 내면을 들여다보면, 난 이 일이 힘들었고 계속 벽을 깨고 나아가야 함에 그렇지 않으면 프로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다그치는 세상과 또 하나의 나에게 울며 징징대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왜 그래야만 하냐고, 그러지 않으면 안 되냐고. 이때까지, 비록 3년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앞으로 그래야 하냐고. 내 맘 속에서 안 그래도 된다고 동의해 주길 바라는데 내 맘 속의 나도 냉정히 그렇다며, 스스로를 깨부수지 않으면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될 거라고 말한다. 그것이 네가 원하는 거야? 라며 조용히 나를 또 다른 내가 들여다본다. 언제까지, 죽는 순간까지? 더 강해져야만 해? 아직까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당장 바뀔 수도 없다. 조금은 애매하지만 이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나는 지금 과도기에 서 있기 때문이다. 30살이 되었다고 해서 내가 순식간에 바뀌지 않는다. 이렇게 계속 고통스럽게 궤도 수정을 해나가는 수밖에.
2016년 1월 9일
어제 S, W, S 친구들을 만나서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이래서 같은 일을 하는 또래 동료들이 필요하구나 절실히 느꼈다. 너무나도 착한 아이들은 내가 듣고 싶은 말도 해주고, 응원도 해주고, 가만히 듣고 있어주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들 마다 자기 자신의 삶과 가치에 비추어 이야기를 할 뿐, 그 어디에는 상처받고 그 어디에는 구원받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 애들의 존재가 너무 감사했다. 이제는 쓴소리건, 받아들여지지 않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이 모두 내게 애정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 인생 누가 대신 살아주는 건 아니니까. 결국 선별해서 듣고 선택은 내가 해야 한다.
2016년 1월 12일
기분이 다시 아주 엿 같아졌다. 사람들이 싫어 죽겠는데 사람들과 떨어져 있으니 또 소외될까 봐 안절부절못한다. 이런 내 모습이 죽도록 싫다. 업계에서 미운털 박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미워하고 날 도와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다 까고 살란다.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했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눈치 보고 맞추는 거 못해먹겠다. 평생 그렇게 살지 않았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사람 장사라고 하면서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만 죽어나는 이 업계. 약하면 물어뜯고 올라오려고 하면 밟아버리는 사람들 투성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이것이 내가 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이 정도의 이력. 사람들에게 별 것 아니겠지. 하지만 내 인생에서는 중요한 과정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이대로 살다 간 정말 내 안에 있는 중요하고 소중한 무언가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뚝 끊어지거나 깨져서 영영 되돌릴 수 없거나, 죽어서 다시는 빛을 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이 사회의 모든 것들이 나를 다치게만 한다. 결국 빠르든 늦든, 홀로 서기를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크리에이터로써. 모든 사람이 각자의 고민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걷는 것은 안전하지만 내 길은 아닐지도 모른다.
난 내 길을 가고 싶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인 것 같고, 그것이 내 사명인 것 같다. 일단 올 한 해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열심히 해서 결과를 낼 것이다. 그리고 내년은 올해를 지내보고 결정하자. 내년까지 견디면 내 애초의 목표가 달성되는 건데, 목표란 건 늘 수정되고 바뀌는 거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차근차근히 하자.
2016년 1월 13일
내가 앞으로 이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
(1) 모 아이템 시나리오 개발, 매듭짓기
(2) 중국/CG 아이템 개발 : 욕심은 안 나는데 해야 할 것 같음. 근데 방안은 없음. 전문분야도 아니고. 그렇다면 한국을 베이스로 하되 중국에도 먹힐 수 있는 아이템을 선별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원작 기반 기획 아이템, 한국 영화 아이템 개발. 이 개수를 지금에서 2개 더 추가할 계획.
(3) 내부 기획 업무 협조.
(1), (2)의 일을 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
아이템 선정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의 지원. 시놉단계부터 작가 고용, 지속적인 일정과 진행상황 컨트롤링. 관심을 가져줬으면, 선정이 되었으면 밀어주었으면.
사업부 내부적으로 동의가 된 아이템 + 아이템 제안, 팀 내부에서의 논의 결정. 누가 결정? 다수결이 옳은가? 그렇다면 평가 기준이 있어야. 결정을 누가 하느냐, 평가 기준은 무엇인가 정하고 내부에서 통과되면 시놉시스 작업은 바로 외부 인력과 적업 하도록(비용 투여)
(1) 아이템 선정의 기준과 과정의 재정비
(2) 선정된 아이템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빠른 시일 내에 아이템의 가능성 파악)
제일 답답한 부분. 요구하는 것은 회사인데 진행할 의지가 없고 가이드라인이 부족.
솔직하자면 회사에 제안한 기획 아이템이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회사가 선택한 이유에 따라 움직이고 싶음. 혹은 결정이 되면 작가에게 맡겨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음. 속도를 낼 수 있게끔 비용투여가 필수. 그런 것 보면 난 정말 이 일에 애정이 없나 보다. 회사란 곳과 맞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래도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 앞날이 보일 것 같다.
내가 회사에 다니는 이유.
1번. 돈이 필요해서.
2번.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을 벌기 위한 능력이 충족되고, 장래를 생각해 봤을 때 성장에 도움이 됨.
시키는 일 하는 것을 마다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시나리오 개발의 끝은 보고 싶다. 그게 현재 내게 가장 자극이 되고 즐거운 일이다. 힘들기도 하지만 물론. 빨리 하고 싶다! 동세대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검토하고 서로 응원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쪽 모임도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 안에서 해답의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2016년 1월 17일
또 다른 W와 단둘이 만나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내게, 내 영화의 진정성을 높이 평가했다. 영화 연출에 대한 의욕을 자극했다.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 C는 그래도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좋지 않냐 했다. 나는 이제 이렇게 생각한다.
영화의 구분은 사실상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언젠가 좋은 아이템을 만나면 상업영화가 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론 예술영화가 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테마가 아직 뭔진 모르겠다. 세상을 모를 때는, 시선이 편협해서 오히려 이런 건 잘 떠올랐는데. 나이가 어중간하게 드니까, 세상이 복잡하다는 것을 알다 보니까.
두 가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하나는 지금 내가 준비 중인 프로젝트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른 하나는 매체와 상업성을 떠나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혹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건지.
상업영화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일에는 '기획'이 빠지지 않는다. (기획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했던 생각들은 사실 도피에 가깝다. 하면 할수록 어려워서, 내가 잘 해내지 못해서, 이 일이 맞지 않고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정하자. 스스로의 단점과 스스로의 생각을.
무언가 이루려고 애쓰지 말자. 모든 것의 시작인 기획을 배우고, 사람들과 협업을 잘할 수 있게, 내 안으로 도망치지 말고 세상과 맞서야 한다. 나 자신을 억지로 바꾼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조급해하지도 말고, 매 순간 나답게 최선을 다하자. 솔직하고 열정적으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게 뭘까. 실패했다고 믿은 삶이 실패가 아님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 대한 이야기. 자본주의로 인한 인간성 상실, 참된 교육의 부재, 갈 곳 잃어 방황하다 절망하고 분노한 젊은 영혼들. 그조차도 생각할 수 없어 무기력이란 이름으로 침전된 청춘. 내가 움직여도 내가 죽어도 변하지 않는 세상.
주인공을 거듭해서 좌절시키기.
아주 작은 좌절 → 조금씩 더 큰 좌절 → 주인공의 모든 걸 빼앗음 → 최종승부 (목숨을 담보로)
2016년 1월 19일
면담일. 기분이 몹시 오락가락했으나, 혼자가 되니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 그녀의 이야기와 의견은 타당성이 있지만, 그 의견 역시도 그녀의 프레임에 국한된 이야기다. 모두 자신이 가진 생각과 가치관, 후회와 신뢰가 있다. 물론 무시해 버릴 만한 의견은 아니다. 충분히 참고할 여지가 있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결단과 내가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느냐이다.
그녀가 보는 나의 장점. 1. 집요하다. 2. 기획에 능력이 있다. 3. 시나리오 검토를 잘한다. 내가 만약 회사를 그만둔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현실적인 그리고 구체적인 길이 보일 때다. 그러니 섣부르게 회사를 나가는 것은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그 길이 무엇인지 회사를 다니며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를 고민해봐야 하는 시점이다. 그녀의 말은 무언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더 갖춰져야 하는 거고, 더 갖추기 위해, 지금 경험을 쌓으며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과연 그 일을 하고 싶은가 하면, 그렇지 않다. 최종적인 내 모습도 아니다. 난 그럼 감독이 하고 싶은 건가, 작가가 하고 싶은 건가. 나도 내 삶이 회사원으로 지속되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회사를 나간다 해도 돌아올 판은 결국 여기다. 회사 안에서도 돌파하지 못한 일을 과연 회사를 나가서 맨몸으로 돌파할 수 있을까. 그 두려움이 큰 것이다. 기회비용이다. 지금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이 더 먼 미래를 위해 나은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일은 이 열정은 오로지 서른 살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잘되지 않는다 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왜 그땐 그래보지 못했냐고 후회할지 모른다. 그때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내 마지막 청춘일지도 모른다.
2016년 1월 30일
영화를 보는 중에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감상을 공유할 사람이 없더라도, 영화 상영 중에 익명의 사람들과 공유한 감정으로 충분한 느낌이다. 그것이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의 특수성이자 진수가 아닌가 한다. 잘 만들어진 영화는 어둠 속의 수많은 정체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빅쇼트>를 보며 든 생각.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 동시에 좋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그들과 즐겁게 일하고 살아가고 싶다는 것. 영화 메시지와 전혀 상관없는 생각이지만.
2016년 2월 5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보다,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것이 더 많다. 그 사람은 커피보다 차를 좋아하고, 문서를 남기는 것을 싫어하고,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미처 생각도 안 하는 사정까지 생각한다. 거짓말을 못하고 무척 솔직하지만 사리분별이 빠르다. 출근할 땐 항상 달콤한 향기를 풍기고, 작은 몸에서 항상 에너지가 넘친다.
책을 끊임없이 읽고,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를 읽을 때마다 부쩍 영화를 찍고 싶다는 욕망,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진다. 올해 단편 작업을 꼭 하고 싶다. 정말 힘들고 지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하고 싶어 진다. 사무실에 앉아 관련 일을 하면 할수록.
2016년 3월 6일
금요일에 계단에서 구른 탓에 온몸이 욱신거리고 피멍이든 오른쪽 반신이 아프다. 얼굴에는 울긋불긋한 상처가 두 개. 피부도 예민해졌다. 비는 개고 날씨는 맑아졌으나 미세먼지와 환절기 탓에 예민해진 것 같다. 그리고 며칠 째 설사 중이다. 얼굴도 퉁퉁 부어있고, 앞머리는 눈을 찌르고. 주말인데도 컨디션이 엉망이다. 이제는 잠을 자도 회복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오늘로써 주말이 끝난다. 조직개편 후로는 늘 주말이나 휴일이 순식간에 흘러가 아쉽다. 책도 영화도 안 본 지 6일이나 흘렀다.
2016년 3월 8일
헤매고 있다. 내가 속한 집단과 나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애매한 마음가짐으로는 번뇌할 뿐이며 이쪽도 저쪽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목 뒤를 서늘하게 하는 감각.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직도 나는 번뇌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모습 그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매번 이곳을 벗어나는 꿈을 꾸면서, 막상 그것이 내가 원한 것이 맞나에 대해서 다시 또. 내가 있는 이 세계는 너무나 달콤해 보인다. 장밋빛으로 보이며, 누구든 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돈과 명예가 주어진다. 그런 삶을 내가 원하는 것일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 한마디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 마디는 정체성 혼란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 살아가듯 살아가고, 내 능력을 인정받고, 돈도 벌고, 몸도 건강한데 난 뭐가 이렇게 불만인지. 욕심이 많기 때문인지.
문득 고등학교 때 방송부 일이 생각났다. 그때 난 대본을 쓰는 PD가 하고 싶었는데, 내가 맡은 일은 기술담당인 ENG였다. 나는 낙담했고, 질투만 커져갔다. 너무도 이른 아침 8시 등교도 견딜 수가 없었다. 애써서 들어간 방송부였는데. 훗날 방송부를 그만둔 것을 후회했다. 포지션을 바꿔달라고 해볼 걸, 원하는 포지션이 아니라도 한번 해볼걸. 나는 몸이 달아있었던 것이다. 방송부를 그만두고 영화 동아리를 만들기 위해 선생님들을 괴롭히며 사방팔방 뛰어다녔고, 동아리는 만들지 못했지만 결국 그렇게 찍고 싶었던 영화를 친구들과 함께 만들었다. 정작 대학에 와서는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했고, 좌절했다.
사회에 나올 때는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원래 내 모습을 숨기고, 달라진 내 모습으로. 이젠 감당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대학 6년간, 내가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면, 앞으로 이런 방식으로 사는 것쯤은 감당해야 한다고, 한계 속에서 해낼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이제 양립하는 것이 점차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좋은 모습인지 나쁜 모습인지 모르겠으나 숨기고 있던 내가 자꾸 튀어나오려 한다. 그 억누름이 누군가에게는 보이는 거고. 그래서 항상 경직되어 있는 거고.
자유롭고 싶다. 자유는 곧 돈이 아닐까? 돈이 있는 상황에서 지금의 고민을 할 수 있는 건가. 이 고통을 이겨내려면 생각을 달리 해야 한다. 난 참고 감당하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것이 아니다. 난 지금 내 대학시절의 방만함을 스스로 벌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난 3년 경력을 채우기 위해 이 회사를 다니는 것이 아니다. 난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이를 배우기 위해 사회 속으로 뛰어들었다. 21개월간 내가 배운 것은, 사람들이 익숙해하는 구조와, 큰돈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템이 무엇인지 판별하는 능력이다. 현재의 결론은, 만드는 것은 보는 눈과 별개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영화를 보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모두가 좋아하는 것은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성이다. 개성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내 영화관과 작품관을 공고히 하는 중이다. 아직 정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2016년 3월 28일 기획일지
가장 큰 고민. 빠른 손을 부족 외부로 보내 모험을 하고 돌아오는 영웅으로 할 것인가. 빠른 손이 부족 내부에서 성장하는 영웅이 될 것인가. 나는 부족 내부에 있는 것은 재미가 없는 것 같다. 애니메이션에서 항상 재미있는 지점은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이다.
원령공주에서 아시타카가 자신의 몸에 씐 저주를 풀기 위해 여행을 시작하고, 주토피아의 주디가 경찰관이라는 꿈을 이루러 떠나고, 겨울왕국의 안나가 언니를 찾기 위해 정든 왕국을 떠나고, 센과 치히로의 치히로가 강 건너편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라이온킹의 심바가 자신이 살던 왕국을 떠나 티몬과 품바와 하쿠나마타타의 삶을 살게 되고, 알라딘이 지니를 만나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하는 것처럼.
그래서 외부로 나가기 위한 가능성은 두 가지다.
1) 부족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야 한다.
2) 부족의 위기가 닥쳤는데 실수를 해서 추방된다.
2016년 3월 29일
1) 플롯의 패턴
- 등장인물의 행동 전체를 이끌 추진력이 생긴다.
2) 등장인물의 패턴
- 등장인물에게 의도와 동기를 부여할 역동성이 생긴다.
가장 좋은 이야기는 좋은 편과 나쁜 편을 대립시켜서는 나오지 않는다.
좋은 편과 좋은 편이 맞붙어야 좋은 이야기가 된다.
2016년 4월 2일
애니메이션이고 시대도 고대인데 리얼리티에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다는 생각. 이야기는 '기대'하게 하는 것이 중요. 기대를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되게 해야 하고 그 예상이 '빗나가게'해야 재미있게 볼 수 있음. 목표(목적)는 심플하고 구체적일 것!
2016년 4월 4일
작가 마인드로 생각하다 보면 문제가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제작사, 피디 마인드로 다시 점검해 보자. 어떻게 하면 가장 심플하고 재미있을지.
2016년 4월 8일
어제의 작가 미팅. 15년 말 - 16년 초의 작가 미팅의 경험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해 일단 기뻤다. 그동안 '사람 만나는 일'을 곁에서 많이 보아왔고, 조언도 많이 들었고, 체득한 것도 있었다. 사람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편안해야 상대방도 편안하다. 약점이나 다소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방법이다. 가장 잘 먹히는 건 진솔함이 아닐까 한다. 무엇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이런 점이 재미있는 것 같고, 이건 재미없고.. 이처럼 이야깃거리를 하나씩 풀어내는 것이다. 혹은 나라는 사람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동안은 내가 너무 비굴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사실 그런 모습에서 누가 신뢰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나 더 느낀 것. 인간은 누가 더 약자인지, 만만한지 아닌지를 놓고 매우 동물적으로 우위를 파악하고 행동한다 만만한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를 구분해 행동이 달라진다. 기억해 둘 것은, 다음에 어떤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편안하고 즐겁게, 당당하게 행동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주는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J감독, Y대표, S작가. 그리고 이와 얽힌 많은 사람들. 좋은 건 모조리 내 것으로 흡수해야지.
2016년 4월 14일
확실히 기획 일이라는 것이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고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기획안 준비할 때, 수정할 때 모두 잠깐 혹은 며칠씩 머리 비우는 시간이 있었다. 기획안을 처음으로 선보인 이후의 피드백은 어떻게 반영하고 정리할 것인지, 아직 들여다볼 힘이 나지 않는다. 주말까지 푹 쉬고, 다른 영화 보고, 책 읽고 티브이보고, 게임하고, 그러다 보면 다시 신선한 상태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거야.
2016년 4월 29일
너무 큰 꿈을 그리지 말자. 현재 내가 있는 곳에서 차근차근. 내가 나설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고. 내가 활약해야 할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고. 일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재미있게 살고 싶다. 무엇보다 겸손하게.
2016년 5월 5일
이번주 공동제작사 미팅을 다녀와서, 그리고 프로젝트 회의를 하면서 또 한 번 많은 것을 느꼈다. 우선 공동제작사 대표님의 회의는 항상 놀랍다. 능수능란하게 작가를 대하는 그의 태도, 대범함, 설득하고 푸시하는 방식. 여유가 넘치고 거침없다. 군더더기도 없고 매우 정확한 언어와 표현으로 이야기한다. 적절한 방법 제시는 물론, 인물의 감정과 행동을 납득시키기 위한 현실 에피소드도 빼놓지 않는다. 직접 글을 쓰는 작가 입장에서 신뢰할 만하고 도움이 되는 제작자 일 것이다. 나는 당연히 아직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
반면 '우리들'의 방식은 너무 아마추어가 같았다. 느낌과 지적만 있을 뿐. 그녀 역시 이 능력에 한한 나보다 나은 점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내가 겪고 있던 고충을 작가가 대신 터뜨려주니 내 속이 다 시원해졌다. 앞으로 내 작업에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생각하고 영화적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아이디어를 생각한 후에 회의에 임해야겠다.
2016년 5월 6일
재미를 아는 자는 패배주의자가 될 수 없다.
재미를 아는 자는 힘의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 3권
2016년 5월 12일
정신적 스승의 만남
- 영웅의 여행에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는 '증여자' 또는 '제공자' 영웅의 여행의 한 과정. 영웅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여행을 시작하는데 갖춰야 할 필수품, 지식, 용기를 얻는다.
- 스토리에서 멘토는 영웅의 마음에 영향을 끼쳐 의식을 바꾸거나 의지를 다잡게 한다.
- 이 원형에 대해 작가는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그들이 없이도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지켜보는 게 좋다. 정신적 스승의 부재는 흥미롭고 흔치 않은 상황을 영웅에게 창출해 준다.
- 정신적 스승의 가면은 영웅이 악한을 위한 일임을 모르고서 위험한 모험에 뛰어들게 할 수도 있다.
2016년 5월 20일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닌 '내가 무엇을 하는가'이다.
2016년 6월 2일
일 진도가 안 나고 장기간 붙들고 있으니 진이 다 빠진다. 좀 더 효율적으로 해야 할 텐데. 어차피 수정은 불가피하고. 그렇다면 이렇게 쓸데없이 공들일 필요가 없는데. '재미있게 쓰라'는 말이 부담됐었나. 감독이 아닌 이상, 내가 해도 만족할만하진 못할 것 같은데.. 일단 시놉 쓴 것 다시 검토하고 어느 부분 줄이고 어느 부분 살릴지 다시 고민해 보자.
2016년 6월 7일
다음주 할 일. 기획회의 준비. 원작검토 관련 사업 구상. IP확보. 원작검토(도서, 웹툰) 어떻게 진행할지 사업구상.
2016년 6월 19일
요즘 회사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내부 일뿐 아니라 외부 일이 다양하게 많아서 가끔 정신이 혼미해진다. 내가 이걸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어디서 펑크가 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도 불쑥불쑥 올라온다. 하지만 내 주도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의견을 공유하는 일은 즐겁다. 무엇이든 처음이 힘든 것처럼 내 업무량도 언젠가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고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가져본다.
2016년 7월 6일
맥북을 쓰기 시작하면서 손으로 쓰는 기록들이 많이 줄었다. 그렇다고 컴퓨터로 매일 하루를 기록해 온 것은 아니다. 스케줄 체크, 업무 기록 정도. 그러다 보니 정말 일만 하는 것 같고, 시간에 나를 무책임하게 던져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하루는 회사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서 머리를 식히는 것이 전부다. 이대로 가면 내게 남는 것이 있을까. 업력은 쌓이겠지만 마음속에 구멍이 하나 있는 채로 살아갈까 봐 두렵다.
지금 일도 재미있지만, 동시에 아니라는 생각도 들기에. 2016년도 절반이 지나왔고, 이제 1년, 길면 1년 반. 유효기간이 남았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책임이 따른다. 일단 당면한 일이 많다. 그 일부터 처리하고 시간을 어떻게 운용하면 좋을지 무엇으로 나를 채워 넣을지 꾸준히 지속적으로 생각해야겠다.
2016년 7월 19일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정신이 아득해져 버렸다. 비정상과 정상의 사이에는 까마득한 골짜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한 끗 정도의 간격이 있을 뿐이고, 우리들은, 사람들은,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먹고사는 일의 규범이라는 것, 행동 양식이란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 역시도 몹시 견디기가 괴로워졌다.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것. 내 안에 고여 응어리져 가는 무언가를 밖으로 꺼내놓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내가 간신히 '정상'의 끈을 붙잡고 지속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이다지도 허망하게 느껴지는지. 먹고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굶지 않기 위해, 세상의 규칙 아래 이 나이 여자가 가져야 할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다치지 않기 위해, 세상이 바라는 대로 가족이 바라는 내 모습을 지키며. 안락하기 위해. 먹고살기 위함 이상으로 살고 있다 사실. 그것 또한 내 욕심이고 바람이다.
목숨을 유지하려면 해야 하는 일이지만, 방법은 다 다르지 않을까? 어떻게 사느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주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규범, 사회의 시선은 물로 내 뱃속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이 간사하고 게으른 녀석에게도 져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써야 한다. 뒤돌아서면 휴지조각이 되고, 이리저리 혼탁해져 버리는 것 말고, 고유한 것. 어떤 첨가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아주 진한 것. 내 안에 고여있는 것. 그리고 내 안에 펼쳐져 있는 세계. 대다수의 마음에 드는 알량하고 뭉툭한 것이 아닌, 자유롭고, 자신감 넘치고, 날카로운 무언가. 그런 것을 세상에, 세월에 빼앗기면 안 되는 것 아닐까.
<채식주의자> 영혜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왜 죽으면 안 되느냐고, 그녀는 인혜에게 말하고 있었다. 법은 없다. 각자의 욕심과 이기심이 하나의 규칙이 되어 작용하고 있을 뿐. 인류학 책을 보면 볼수록 더 강하게 느낀다. <곡성>에서 참 기가 막힌 대사가 나왔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내게 비수처럼 꽂히는 대사. 무엇이 중요한지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엉덩이가 편하면, 그러기 시작하면 다시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여기는 아니다. 애쓰지 말자. 너무 애쓰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2016년 7월 24일
이 일에 대해 기록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듯하다. 나는 우울했다. 작가의 태도와 회사의 태도에 모두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모두 자기의 생각을 떠들고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니,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나를 믿지 못하고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고, 작가가 내 입맛에, 내 취향에 맞는 사람일리도 만무하다. 너무 큰 기대를 품었다.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는 기대. 사실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고작 출발선에 섰던 것뿐인데.
당분간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좀 더 긴밀하고, 탄탄하게. 내가 정신을 빼앗기지 않도록. 애쓰거나 정을 많이 주지 않기를. 너무 애쓰면, 너무 사랑해 버리면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 멀리 보이지 않고, 좁게만 보이고, 맹목적이 되고 말아 버린다. 이대로 괜찮을까? 이런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사람은 내 말을 잘 알아들은 것인가? 이렇게 돌려보내도 되는 건가? 뭔가 빠트린 것은 없었나? 끝도 없는 불안의 늪. 시놉시스를 읽고 나면 다음 계획까지도 고민을 해서 가야겠다. 나답게 합시다.
2016년 7월 29일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다.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무슨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건지. 사는 게 바빠서 정작 창작자로서의 시선은 모조리 무시되고 있는 것 같다.
2016년 7월 30일
지금 계속 마음이 불편하고, 악몽까지 구는 이유는 첫 번째. 아이템 제안 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 두 번째. 원작 검토 사업에 대한 부담. 첫 번째는 주말 내에 어떻게든 준비하면 되고, 두 번째는 좀 더 느긋한 마음을 가지자.
2016년 8월 3일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너무 짧다.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할 일이 많으니 늘 신경이 곤두선다. 그리고 실수를 한 것 같아 자기혐오에 빠진다. 적어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사과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잘못하지 않는 사람은 없고, 정말 무결한 사람도 없다. 오늘의 반성. 훌훌 털어버리자.
될만한 것에 더 신경을 쓰고 더 힘을 쏟으라. 맞는 말이다. 오히려 더 철저히 그래야만 한다. 이왕 지금 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미 있으려면. 의심은 넘겨버리자. 왜 모든 사람에게 맞춰주려고 하는지. 왜 좋아해 주면 그 이상으로 퍼주게 되는지. 나도 나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된다. 기질인가 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랑받고 싶은.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그것이 현재의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래도 한 고비 넘겼다. 정말 다행이다. 일이 잘 풀려서 정말 감사하다. 오늘도 감사하고, 오늘도 많이 부족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 그래도 내일 빨리 회사에 가서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 보면 확실히 지금 이 일에 집중하고 있다. 이 일이 싫지 않다는 증거이겠지.
2016년 8월 7일
날씨도 덥고, 할 일도 많고, 정신을 못 차리겠다. 그래도 운동도 하고, 목욕탕도 다녀왔고, 개봉 영화도 한 편 봤고, 일도 마무리 했다. 이번 주만 지나면 원작 검토 사업도 일단락될 테고, 더위도 한풀 꺾여 숨통이 트이겠지. 26세에서 30세. 3년이 흘렀다. 영화에 대해서만 고민했던 그날에서 멀어진 것은 확실한 듯하다.
2016년 8월 14일
미래에 대한 내 고민을 하자면 돈을 벌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여기. 이 직장에서 될만한 영화 작업에 참여하는 것.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곧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
'나는 버려진 엄마입니다.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죄인이 됩니다. 사람으로서의 존엄도 사라지고, 순수함도 지킬 수 없습니다. 돈 앞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돈이 신입니다.'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 살면 살수록. 내 인생에 '돈'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돈과 삶을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고고하게 살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추악해져야 한다. 잘 살기 위해서 잘 살지 못해야 한다. 추해 지지 않기 위해 추해져야 한다.' 아이러니. 모순.
'순수한 어린아이.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되는, 좋은 집안의 아이. 지금은 내 품에 있지만 결국에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아이. 그리고 자신도 한때 그런 아이였었다면.'
'과거 그녀는 누군가에게 만원 한 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근데 그것을 그녀가 받는다. 그걸 들고 엉망진창이 된 스스로를 수습하며. 헝클어진 머리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맨발로 걸어간다. 플랫폼을. 그것을 롱샷으로 잡고 프레임에서 사라진 그녀. 후의 풍경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이어진다. 웃음과 씁쓸함. 그 사이 어딘가 내가 지향하는 것이 있다.
2016년 8월 24일
날씨가 조금씩 시원해져가고 있다. 밤에 목이 서늘해서 깜짝 놀랐다. 결국 기관지에 적신호가 걸렸다. 정말 오랜만에 회사에서 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가만 보면 계획한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안달복달할 때가 잦은 것 같다. 그게, 그 일 들이 대단한 것도 아닌데. 내 마음 편하자고 한 건데 결국 스스로를 지독히 괴롭히는 꼴. 조금 더 여유를 가져도 될 것 같다. 알아서 못하면 좀 어때. 상대편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나 혼자 속 끓을 일이 아닌 것을.
2016년 9월 6일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안 하면 내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든다.
2016년 10월 6일
하루하루 의미가 없더라도 살아나가는 것 그 자체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업무의 의미는 '보수'이니까 그 이상의 보상(성취감, 의미, 인정 등)이 있으면 더 좋은 거고. 심플하게 생각하면 그렇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보수 위에 '인정 욕구'가 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그래야만 충만함을 느낀다.
그래 나는 현재에 집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아무런 예비되지 않은, 회사를 그만둔 후를 생각하며, 꿈꾸며. 온갖 활동과 취미를 가졌다. 학교에 있을 땐 학교에 집중하지 못하고, 회사에 있을 땐 회사에 집중하지 못한다. 항상 무언가 다른 것을 꿈꾸고 있다. 그것이 현실의 불안함과 고통에서 회피, 도피하는 수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결실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 건가. 친구가 말했다. 회사는 내가 80%를 해와도 60%를 했다고 생각하고, 30%를 해도 50%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딱 주어진 일만 하라며. 이야기하면 매우 심플하고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은데 나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나 싶다. 결국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알아주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그걸 안다고 해서 전부 보상(정신적인 것 포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난 내 노력이 온전히 내 노력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넌 재료만 가져오면 돼. 완벽한 재료가 아닌 괜찮은 재료. 괜찮은 재료로 훌륭한 걸 만들면 돼.'
2016년 10월 17일
콘텐츠 공급자 vs 플랫폼
자체 플랫폼이 있어야 한다. 어떤 콘텐츠를 공급해야 하는가 논의를 거쳐야 할 듯.
2016년 10월 20일
오늘은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서 회사에 남아 <엑스 마키나>를 봤다. 피곤하고 졸린데 육체적 피로 이상으로 정신적 갈증이 심했던 것 같다. 정말 많은 일을 매일매일 해나가고 있는데 그것들이 지나고 나면 너무도 덧없어서 마음이 허전하다. 돈을 받는 대가가 그 덧없는 일일 텐데도.
돈 = 그냥 일 이 공식이 썩 맞는 공식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내겐.
2016년 11월 17일
결국 일은 닥쳐오게 되어 있는 것. 이번에 휴가 다녀온 후의 작업이 의의가 있었던 것은 내가 의식하는 수준에서 최초로 힘 빼고 작업했다는 것이다. 짧지만 많은 일이 있었던 2년 반의 시간들. 일이 재미있어서 다행이었고, 올해 목표였던 시나리오 작업도 진행했다.
사람들이 모두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내게 짐처럼 남은 빚을 없애고 싶었다. 마치 운명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미래. 모두가 그런 미래를 감당하고 있다. 요즘 시대에는 더욱더. 모두가 그렇다면 나는 정말 얄팍하기 그지없는 평화가 있는 현재가 아닌, 스스로 확신하고 확인하며 살아가고 싶다. One Of them이 아닌 One of one이 되고 싶다. 결실도 없고, 결국은 추락하더라도 스스로 걷는 길이면 좋겠다. 무언가를 이룩하는 것이 인생의 가치를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내 인생의 가치가 된다. 그 누가 평가하는 가치가 아닌, 나 스스로 내 인생을 바라보았을 때.
30년 살아오면서 후회가 되는 지점이 없는 건 아니다. 한번 해봤기 때문에 그러지 않도록 발버둥 치고 있지만,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내가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은 대학 생활이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히 했어야 했다는 생각. 여기서 그만두면 또다시 후회가 될 수 있겠지. 당장 벌어먹고 살고, 대출해서 집도 구하자고 했는데.
근데 여기서 계속 일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지 알기 때문에, 더 있으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을 나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회사를 다녀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회사를 나가면 오롯이 내가 될 수 있다. 내년 5월 말에 이야기하고 3년째가 되는 6월에 회사를 그만두자.
2016년 12월 5일
기획 영화 말고, 감독의 영화가 하고 싶다. 우물 한 개구리였던 학생에서, 상업영화와 기획영화를 만드는 기획 피디로 일하며 영화가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름대로의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왔다는 생각이 들고,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 예정된 길을 나도 모르게 걷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 이 성격 어디 가겠는가. 때가 돼서 깨달은 건가. 지금에서야 눈에 보이는 건가.
찾아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요즘 내가 보는 영화마다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로맨틱 홀리데이>도 의미 있었다. 감독이 아주 섬세하고 정성껏 엮은 스토리는 매우 공감 가는 이야기였고, 기획도 훌륭했다. 이런 영화도 좋다. 결국 나는 고발하고 싶은 것도, 마냥 내 주장에 가득 찬 영화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모두가 보고 공감하고, 웃는, 그 안에 삶의 정수가 담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데 이건 물론 내 큰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30년 밖에 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상은 높이 설정하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자.
6개월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당장 그만두고 싶은 이 마음. 무언가 더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을 간직한 채. 6개월의 수감생활을 끝낼 수 있을까.
2016년 12월 12일
내 사정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번 수정은 트리트먼트 상에서 고치려고 했던 부분, 반영이 안 된 부분을 수정하는 작업이므로, 다음 단계 반영이 안 된다고 설득해야겠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이디어 차원이 아니라 확실히 이렇게, 저렇게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2016년 12월 13일
총 64 씬. 70페이지 분량의 시나리오. 말씀하셨듯, 초고라 볼 수 없는 러프한 형태의 시나리오. 전반적으로 빈 부분이 많고 앙상하다. 사건들도 패턴 반복의 양상을 보인다. 캐릭터는 빌딩이 제대로 된 부분이 없이 표피적이고, 인물관계나 감정도 발전된 것 같지 않다. 대사가 너무 유아타깃인 거 같고, 한 인물이 말하는 것 같다. 배경 설명이 전무하다. 비주얼 작업이 안된 상태지만, 감안하더라도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통치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세계가 판타지적 요소가 공존하는 곳인지. 사람들은 어떤 것을 신성시하고 특별한 목소리는 누가 들을 수 있는지 등의 세계관 정립이 필요한 것 같다.
커버 사진
프리츠 랑 <메트로폴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