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랑 II

비가 끝나지 않는다면

by 윤담

비는 어떤 얼굴을 오래 기억했다.

한 번 물기 속에서 본 얼굴은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처음 그를 본 날도 그랬다.

낮부터 시작된 장맛비가 저녁이 되어도 좀처럼 잦아들지 않던 날이었다. 도시는 오래된 수채화처럼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간판의 불빛은 물 먹은 아스팔트 위에서 가늘게 떨렸고, 창문마다 안쪽의 삶이 희미한 등불처럼 비쳐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우산 아래로 목을 접어 넣은 채 걸음을 재촉했지만, 그날 유정은 유리창 밖 비 오는 거리를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공기 속에는 너무 많은 것이 섞여 있다. 막 갈라진 택시 바퀴의 물보라, 빗속에서 식어가는 군밤 냄새, 횡단보도 신호음, 누군가 스치듯 흘리고 간 향수의 잔향, 그리고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어떤 계절의 숨결 같은 것들.

서점의 이름은 적요였다. 조용한 노래라는 뜻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천장은 낮았고, 책장에서는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으며, 한쪽 모서리에서는 주인이 늘 작게 틀어두는 피아노 음반이 흘렀다. 비 오는 날이면 손님이 드물었다. 유정은 그 적막이 좋았다. 사람이 없는 서점은 느리고 고요한 박동을 품은 채, 조용히 저녁을 견디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그녀는 꼭 출입문 앞 바닥을 한 번 더 닦았다. 이미 깨끗한 줄 알면서도 젖은 자국이 눈에 띄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누가 다녀간 자리, 잠깐 스며들었다가 마르는 흔적을 가만히 지워보는 일은 일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웠다. 그날도 계산대 뒤에서 젖은 우산들을 내려다보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길게 떨어졌다.

그는 문간에 잠시 서서 외투의 젖은 어깨를 가볍게 털었다.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는데, 어깨가 지나치게 넓지도 좁지도 않아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은 체형이었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를 스치고 있었고, 눈은 빛이 강하지 않았지만 깊었다. 어떤 사람의 눈은 곧장 다가오고, 어떤 사람의 눈은 한 번 돌아서 닿는다. 그의 눈은 곧장 그녀에게 다가왔다. 직접 손을 내미는 대신, 빗물 사이를 한 겹 지나 들어오는 눈빛. 유정은 불현듯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조금 슬퍼 보인다고 느꼈다.

그는 책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성급한 손님들처럼 제목만 훑고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책등 하나하나에 손끝을 대고, 잠깐씩 멈춰 서서, 마치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오래된 시간을 더듬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그러다 시집 코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표지가 물빛처럼 흐린 시집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유정은 이유도 없이 그 장면을 오래 보았다.

그는 계산대로 와서 책을 내밀었다. 손가락 관절이 가늘고 희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 같기도 했고, 편지를 오래 쓰는 사람 같기도 했다. 손이 먼저 말을 배운 사람들에게만 있는 조용한 힘이 있었다.

“이 책, 혹시 상태 괜찮을까요?”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젖은 밤공기처럼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결이었다.

유정은 책을 받아 첫 장을 넘겼다. 안쪽에는 연필로 적힌 이름 하나가 남아 있었다. 오래전 이 책을 읽던 사람이 조심스레 남겨둔 서명 같았다.

“안쪽에 이름이 하나 적혀 있네요. 괜찮으세요?”

그는 잠깐 책을 내려다보다 웃었다. 환하게 번지는 웃음이 아니라, 입가의 선이 아주 천천히 풀리며 얼굴의 고요를 조금 옮겨놓는 웃음이었다.

“괜찮아요. 누군가가 사랑했던 책 같아서요.”

유정은 순간 대답을 잊었다.

창문을 때리던 빗소리가 그때 조금 더 또렷해진 것 같았다. 누군가 사랑했던 책 같아서 괜찮다는 말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흠으로 보지 않고 흔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이미 지나간 손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어쩌면, 한 번쯤 오래 잃어본 적 있는 사람.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요. 그냥 들고 가도 돼요.”

결제를 마친 뒤에도 그는 서점 안에 조금 더 머물렀다. 비가 너무 세게 와서였을 수도 있고, 혹은 그 공간이 조금 마음에 들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문 앞에서 우산을 펴기 전, 그는 돌아서서 물었다.

“비 오는 날엔 원래 이렇게 손님이 없나요?”

“거의요.”

“좋겠네요.”

“뭐가요?”

그는 유리문 너머의 젖은 거리를 한 번 바라보았다.

“잠깐 세상이 조용해지는 것 같아서요.”

서점에 대한 말인 줄 알면서도, 이상하게 자기 얘기처럼 들렸다. 자기 안에서도 가끔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서, 비가 잠깐 그 위를 덮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유정은 대답했다.

“좋기도 하고, 조금 외롭기도 해요.”

그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외로운 곳은 오래 기억에 남아요.”

말을 고쳐 삼키듯 잠깐 멈춘 뒤, 그가 아주 작게 덧붙였다.

“아름다운 것처럼.”

그리고 그는 나갔다.

문이 닫히자 종소리가 작게 울렸다. 유정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빗속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은 우산 아래 반쯤 가려졌고, 건너편 가로등 불빛이 젖은 셔츠 칼라를 희게 비추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느린 장면이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훗날 비슷한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떠오를 것 같은 얼굴. 그날의 그는 벌써 그런 쪽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자주 왔다.

매일은 아니었다. 사흘에 한 번, 혹은 일주일에 두 번. 비 오는 날이면 조금 더 자주. 마치 비가 그를 조용히 밀어 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문 위의 종이 울리는 소리만으로도 유정은 어느 날부터 그가 왔는지 아닌지를 어렴풋이 알아차리게 되었다. 문을 급히 밀지 않고, 우산의 물기를 조금 털어낸 다음, 한 박자 늦게 안으로 들어오는 식의 사람.

이름을 안 것은 세 번째쯤 만났을 때였다. 낡은 잡지 더미 사이에서 오래된 건축 사진집을 찾다가, 유정이 “그 책은 창고에 한 권 더 있을지도 몰라요” 하고 말했을 때였다.

“찾아주시면 감사하죠. 저는 이서진이라고 해요.”

“저는 최유정이에요.”

이름 하나가 더해지자 흐리던 윤곽에 가느다란 선이 들어가는 듯했다. 이서진. 최유정은 속으로 몇 번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소리 내지 않아도 혀끝에서 물기처럼 맴도는 이름이었다.

서진은 건축 사무소에서 일한다고 했다. 정확히는 오래된 건물을 복원하는 일을 했다. 금이 간 벽을 조사하고, 철거 직전의 창틀을 살리고, 버려진 시간의 구조를 다시 읽어내는 일. 그는 그 일을 말할 때만 약간 길어졌다. 어떤 벽돌의 색은 오후의 빛에서야 비로소 드러난다든지, 오래된 계단참의 높이는 사람의 걸음을 기억한다든지, 낡은 건물은 무너지기 전에 먼저 버티는 법을 배운다든지. 유정은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분명 사물의 표면보다 그 안에 남은 시간을 먼저 보는 사람이구나.

유정은 서점에서 일했고, 대학에서는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끝내 무언가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컴퓨터 안에는 몇 편의 단편과, 중간에 끊어진 원고와, 저장만 되어 있는 제목 없는 파일들이 쌓여 있었다. 늘 시작은 잘했지만, 끝으로 가는 길에서 자꾸 걸음이 멎었다. 이야기가 절정 가까이 올라가고, 감정이 어떤 결말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이상하게도 그만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 그래서 서점 일은 좋았다. 남이 끝낸 이야기들 속에 오래 머물 수 있었으니까.

“왜 글을 안 쓰게 됐어요?”

어느 저녁, 서진이 그렇게 물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유리창 바깥은 막 비가 그친 뒤처럼 젖어 있었다. 유정은 계산대 위에 놓인 영수증 뭉치를 괜히 반듯하게 맞추며 웃었다. 긴장할 때마다 작은 것들의 방향을 고치는 버릇이 있다는 걸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글을 끝내고 나면, 내가 그렇게까지 붙들고 있던 마음이 종이 위에서는 너무 초라해 보일까 봐 무서워요.”

“그게 무서워요?”

“네. 써놓고 나면 제가 느꼈던 것보다 작아 보일 때가 많았어요. 내가 믿었던 슬픔이나 사랑이나 상실이 종이 위에선 너무 평범해지는 거예요.”

서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유정 씨는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왜요?”

“평범해져도 남는 게 있을 테니까요.”

유정은 그를 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책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조금 뒤에 덧붙였다.

“원래 오래가는 건 그런 모양일 때가 많잖아요.”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유정은 그날 밤 집에 돌아가 물컵을 내려놓다가 한참 멈춰 있었다. 사랑도 슬픔도 결국은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밥 냄새와 세탁물과 잠든 얼굴의 온도 같은 것이 되는 쪽으로 남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 그녀 안에 들어왔다.

그들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점 문을 닫고 지하철역까지 가는 짧은 길이었다. 유정은 퇴근할 때 꼭 셔터를 내리고도 한 번 더 문고리를 잡아보는 버릇이 있었고, 서진은 그런 그녀가 다시 뒤돌아 잠금장치를 확인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었고, 어느 날은 늦은 버스를 놓쳐 강변까지 걸었다. 말이 많은 밤도 있었고, 거의 말하지 않은 채 같은 방향으로만 걷는 밤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곁에 있어지는 시간이 있다는 걸, 유정은 그와 나란히 걷는 저녁마다 조금씩 알아갔다.

그해 여름은 비가 많았다.

도시는 자주 젖었고, 두 사람은 더 자주 만났다. 강가의 벤치에서 비를 피하다 같은 우산 아래 너무 가까이 서게 된 날, 유정은 그의 셔츠에서 아주 희미한 나무 냄새를 맡았다. 오래된 서가처럼 마른 냄새였다. 서진은 비를 맞고 들어오면 늘 손목시계를 먼저 빼서 주머니에 넣곤 했는데, 그날도 그랬다. 젖은 손목뼈가 잠깐 드러났다. 그의 손등 위로 빗방울 하나가 천천히 미끄러졌다. 유정은 그 작은 물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말고, 제 안에서 무엇이 조금 먼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그는 젖어 있을 때 더 또렷했고, 그 또렷함에는 희미한 쓸쓸함까지 함께 배어 있었다. 그는 어쩐지 늘 조금 젖어 있는 사람 같았다. 몸보다도, 그가 지나온 시간의 안쪽이 먼저 비를 맞은 사람처럼.

유정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빗소리가 너무 큰 밤이면 세상에 자기 혼자 남은 줄 알고 울었다는 이야기. 서진은 그 말에 “전 반대였어요. “빗소리가 크면, 어딘가에선 누군가도 이 비를 함께 듣고 있겠구나 싶어서 안심됐어요.”하고 말했다. 이상하게 두 사람 모두 그 말에 웃었다. 같은 비를 듣고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안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그날은 너무 선하고 이상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비는 버스정류장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고, 전광판의 푸른 불빛이 유정의 뺨과 서진의 목선을 번갈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먼저 손을 뻗지 않았다. 다만 아주 가까이 다가와, 그녀가 피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래 확인했다. 그래서 그 입맞춤은 갑작스러운 충동이라기보다, 오래 참고 있던 떨림이 더는 숨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 순간에 가까웠다.

그의 입술은 차갑지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유리창 안쪽에 맺힌 물기를 손끝으로 조용히 걷어내듯, 아주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유정은 눈을 감은 채 제 안의 무엇이 먼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생각했다. 마음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조용한 데서 열리기도 하는구나. 거창한 약속보다, 이렇게 망설이며 닿아오는 손끝 하나에 더 먼저 흔들리기도 하는구나.

그날 이후 유정은 제 마음을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비가 오면 가장 먼저 그가 떠올랐고, 길을 걷다가 젖은 나무 냄새만 맡아도 서진의 셔츠 깃이 생각났다. 집에 돌아와 컵을 두 개 꺼내놓고서야 혼자라는 걸 알아차리는 날도 있었다. 서진은 조금씩,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그녀의 하루 안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집에 가기 시작했다.

유정의 방은 작았다. 창가에 화분 두 개와 책상 하나가 전부였지만, 서진은 그곳을 좋아했다. 특히 비 오는 날 창문을 조금 열어두면 커튼이 젖은 바람을 안고 부풀어 오르는 순간을. 유정은 머리를 감고 나오면 젖은 수건을 꼭 방문 손잡이에 걸쳐두는 버릇이 있었는데, 서진은 갈 때마다 말없이 그것을 걷어 욕실 쪽으로 옮겨두곤 했다. 유정은 몇 번이고 그걸 보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입 밖으로 말하면 갑자기 너무 환해질 것 같은 다정함이 세상에는 있었다.

서진의 집을 처음 보았을 때 유정은 조금 놀랐다. 예상대로 정돈되어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 소파, 원목 테이블, 스탠드 조명 하나, 벽에 걸린 흑백사진 두 장. 아름답게 정리된 공간이었지만 사람이 살며 남기는 작은 어지러움이 거의 없었다. 마치 누군가 오래 머물 준비를 하지 않은 집 같았다. 그는 집에 들어오면 늘 열쇠를 현관 선반 위에 반듯하게 눕혀두고, 컵 손잡이를 같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질서라기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겨우 맞춰놓은 균형처럼 보였다.

“너무 휑하죠.”

서진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말했다.

유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조용하네요.”

서진이 잠깐 웃었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좀 오래 비워둔 집 같죠.”

찻잔에서 가느다란 김이 올랐다. 그 집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지만, 유정은 그 고요가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서진의 곁을 지켜온 침묵처럼 느껴져서,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작게 줄였다.

그 후로 두 사람의 시간은 서두르지 않은 채, 아주 천천히 함께 사는 날들의 모양으로 기울어갔다.

함께 영화를 보다가 소파에서 잠드는 밤,

새벽 세 시에 갑자기 라면을 끓여 먹는 밤,

유정이 머리를 말리며 서진의 셔츠를 입고 부엌 문턱에 기대 서 있으면, 그가 뜨거운 냄비 손잡이를 잡은 채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던 밤.

돌이켜보면 마음이 깊어진 것은 그런 밤들이었다.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상대의 발뒤꿈치를 먼저 알아보는 일, 씻고 나온 뒤 목덜미에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주는 일, 졸린 얼굴로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말하는 순간 같은 것들. 어느새 그는 그녀의 하루 안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가 오면 먼저 생각났고, 사소한 순간마다 불쑥 떠올랐다. 유정은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가까워질수록 유정은 그에게 아직 닿지 않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께 있어도 문득 멀어지는 순간이 있었고, 그 자리는 늘 조금 서늘했다.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었다. 전화가 울리면 화면을 보는 그의 눈빛이 짧게 굳는 일. 어떤 날짜를 앞두고 유난히 말이 적어지는 일. 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 거실에 나가면, 불도 켜지 않은 창가에 서서 비어 있는 거리를 오래 내려다보는 일. 그럴 때면 그는 늘 컵 손잡이를 한 번 돌려 잡았다 놓곤 했다. 유정은 그 버릇이 나온 뒤에는 대개 “아무것도”라는 말이 따라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무슨 생각해?”

그럴 때 물으면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하지만 그 얼굴은 정말 아무 일도 지나가지 않은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쪽으로, 제 아픔을 겨우 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유정은 더 묻지 않았다. 어떤 말은 재촉한다고 빨리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슬픔은 대개 스스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차올랐을 때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오는 법이었으니까.

그 이야기는 가을 문턱에 이르러서야 겨우 입 밖으로 나왔다.

그날도 비가 왔다. 여름의 비가 아니었다. 여름의 비가 갑작스럽고 몸에 닿는 온도를 가지고 있다면, 가을비는 오래된 편지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유정은 서점을 일찍 닫고 서진의 집에 갔다. 초인종을 누르고도 안에서는 한동안 아무 기척이 없었다. 유정이 한 번 더 벨을 누르려던 순간에야 문이 열렸다. 서진은 문짝에 한쪽 어깨를 기댄 채 서 있었고, 얼굴빛이 물에 오래 잠겼다 나온 사람처럼 옅었다.

“아팠어?”

“조금 피곤했나 봐.”

말은 가벼웠지만, 그 얼굴은 그보다 더 오래된 무언가를 지나온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다.

그날 저녁 내내 서진은 자꾸만 어딘가 비어 보였다. 컵을 쥔 채 한참 말을 잊고 있거나, 유정의 목소리를 듣다가도 어느 순간 시선이 창밖으로 미끄러졌다. 빗줄기만 오래 바라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유정은 더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서진아, 혹시… 나한테 아직 말 못 한 거 있어?”

서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빗소리만 창문을 오래 두드렸다.

유정은 괜히 너무 깊이 들어왔나 싶어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 내가..”

그때 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있어.”

짧은 한마디였는데도 방 안이 전과는 달라졌다.

서진은 한동안 시선을 내린 채 컵 가장자리만 만지작거렸다.

“근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는 숨을 한 번 고른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몇 년 전, 오래 만나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이름은 하연이었다.

대학 때 만나, 헤어지는 날보다 함께 있는 날이 훨씬 더 익숙해질 만큼 오래 곁에 있던 사람이었다. 비좁은 원룸에서 시작해 주말이면 함께 시장을 보고, 지친 날에는 말없이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언젠가는 지금보다 조금 더 넓고 환한 집으로 옮겨가자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사람. 서진은 그런 날들이 조금씩 쌓이면, 그 다음은 자연히 같은 방향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다음이 오지 않았다.

결혼식을 반년쯤 앞두고 하연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장은 담담했지만, 담담해서 더 늦게 아팠다. 마치 오래전부터 수도 없이 되뇌어 이제는 울지 않고도 말할 수 있게 된 문장처럼 들렸다.

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손만 바라보았다. 컵 가장자리를 문지르던 손끝이 어느 순간 멈춰 있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유정은 오히려 그 담담함이 더 아프다고 느꼈다. 아무렇게나 꺼낸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 삼키고 삼켜서 겨우 저만한 높이로 밖에 나오지 못한 말 같았다. 그의 시선은 한 번도 완전히 유정에게 닿지 못한 채 자꾸 창밖의 빗줄기 쪽으로 미끄러졌다.

유정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이 사람은 한 번 크게 무너진 뒤에야 다시 일상을 배운 사람이구나. 아침에 일어나는 법,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출근하는 법, 끼니를 거르지 않는 법, 계절이 바뀌어도 그 안에 가만히 남아 있는 법. 그렇게 겨우 살아가는 쪽으로 몸을 익혔는데도, 어느 날 갑자기 들이치는 빗소리 하나에 오래 묻어둔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사람.

“그 일 있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못 했어.”

그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했어. 맞는 말이기도 했지. 어떻게든 견디게는 되니까. 그런데 견디고 난 뒤에도, 예전의 내가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더라.”

유정은 그의 손을 보았다. 컵 가장자리에 걸린 손끝이 갈 곳을 잃은 듯 한 자리를 천천히 맴돌고 있었다. 그 조용한 움직임이 이상하게 더 아팠다.

그 밤 유정은 그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지나간 계절이 겹쳐 보였고, 잃어버린 이름들이 어른거렸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도 아직 그를 떠나지 않은 시간이 얇게 따라붙어 있었다.

“나 너한테 말했어야 했어.”

서진이 낮게 말했다.

“말하면 네가 자꾸 나를 있는 그대로 못 볼까 봐 무서웠어. 내 옆에 없는 사람까지 같이 상상할까 봐.”

유정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하지만 그 짧은 부정 뒤에도, 마음 한쪽은 오래 가만히 있었다.

정말 아니라고만은 할 수 없어서.

그날 밤 유정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울었다.
신호를 기다리면서도,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편의점 불빛 앞을 지나면서도 자꾸 눈물이 났다.
그것은 질투와는 조금 다른 울음이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을 향해서는 누구도 이길 수도, 밀어낼 수도 없었다.
유정을 아프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 내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오래된 자리 하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차갑고 무너진 자리까지도 결국은 그 사람의 일부라는 것.

그 일을 지나고 나서 둘은 전보다 더 가까워졌지만, 동시에 예전처럼 쉽게 넘기지 못하는 것들도 생겼다. 말 한마디가 오래 남고, 침묵 하나가 생각보다 깊어지는 날들이 있었다.

유정은 하연의 이름을 먼저 입에 올리지 않았고, 서진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이 모든 것을 지워주지는 않았다. 때때로 서진은 아주 먼 데를 보는 눈을 했고, 유정은 그 시선이 닿는 곳을 알 것 같았다. 어떤 날은 둘이 함께 있어도 그의 마음 일부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 느껴져 외로웠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상처가 없는 남자가 아니라,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을.

문제는 유정 자신에게도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떠나는 데 아무런 사고도 비극도 필요하지 않은 종류의 사람이었다. 조금씩 무심해지고, 조금씩 다른 데를 보고, 마지막에는 “나는 더 가벼운 사람이 좋다”라고 말하며 떠난 남자. 그 일 뒤로 유정은 마음을 다 내어주는 일에 서툴러졌다. 사랑은 어느 순간부터 상대에게 맞추느라 스스로를 조금씩 접어 넣는 일처럼 느껴졌고, 다 접고 나면 손에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진을 만나면서도 끝내 다 주지는 못했다. 사랑하면서도 늘 조금은 물러서 있었다. 혹시 또 버려질까 봐, 혹시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할까 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난 시간에 발목이 묶여 있었다. 서진에게는 잃어버린 사람이 아직 현재의 바깥에서 조용히 남아 있었고, 유정에게는 떠나간 사람 이후로 생긴 두려움이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둘 사이에 얇게 가 있던 금은, 겨울 초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첫눈이 내리기 전날이었다.

그 말을 들은 건 첫눈이 오기 하루 전 저녁이었다. 서진은 물컵을 내려놓듯 담담하게, 지방 현장으로 두 달쯤 내려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 일정은 거의 정해져 있었고, 떠나는 날짜도 대충 나온 뒤였다. 유정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이제 말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서진이 먼저 일부러 숨긴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 변명을 듣는 순간 유정은 알았다. 서운한 건 출장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또다시 자신이 그의 삶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늦게 불려 들어오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걸.

“왜 이제야 말해. 그것도 다 정해진 다음에.”

“정리되면 말하려고 했어.”

“나는 왜 맨날 다 끝난 다음에야 듣게 되는데?”

“그런 뜻 아니야.”

“넌 늘 그래. 중요한 건 다 지나가고 나서야 나한테 말하잖아.”

그 말은 서진을 상처 입혔다. 그도 참다못해 말했다.

“그럼 너는? 너는 정말 나한테 다 보여줬어?”

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박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은 목구멍 어딘가에서 오래 걸려 있었다.

“우리 둘 다 똑같아. 가까워지고 싶다고 하면서, 정작 제일 아픈 데는 죽어도 안 내보이잖아.”

서진의 말이 떨어지자 유정의 입가가 아주 잠깐 비뚤어졌다. 웃음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보다 더 아픈 쪽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넌 아직도 네 안에 그 사람을 두고 있잖아.”

말이 떨어진 뒤에야 유정은 알았다. 방금 제 손으로, 가장 아픈 데를 건드렸다는 것을.

서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빛이 먼저 흔들렸고, 그다음에야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화를 참는 사람보다는, 너무 정확하게 찔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했어?”

그는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

유정은 바로 사과했어야 했다. 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나한텐, 가끔 그렇게 느껴졌어.”

그날 서진은 그녀가 돌아서는 것을 끝까지 보기만 했다. 한 걸음도 따라가지 못했다.

출장을 간 뒤에도 두 사람은 연락을 끊지는 않았다.
아침이면 잘 잤냐는 말이 왔고, 밤이면 밥은 먹었냐는 메시지가 남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들은 전처럼 오래 머물지 못했다. 답장은 점점 짧아졌고, 사진은 어느새 오지 않게 되었고, 전화를 걸어도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다 보면 금세 할 말이 바닥났다.
멀어진 것은 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정은 통화를 끊고 난 뒤에도 한참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제가 내뱉었던 말들이 자꾸 뒤늦게 돌아와 박혔다. 나는 너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넌 아직도 네 안에 그 사람을 두고 있잖아. 그런 말들이 밤이 깊을수록 더 선명해져서, 가만히 있어도 마음 어딘가가 자꾸 저리게 했다.
비 오는 밤이면 그녀는 무심코 커튼을 조금 열어두곤 했다. 창문에 빗물이 번지고, 젖은 바람이 틈으로 스며들면, 잠깐은 그가 곁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다 방 안에 자기 숨소리만 남아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면, 유정은 말없이 다시 커튼을 닫았다.

그해 겨울엔 눈 대신 비가 자주 왔다. 차갑고 젖은 저녁들이 오래 이어졌다.

차가운 비가 자주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유정은 자꾸 그가 처음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오던 날로 돌아가곤 했다.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길게 떨어지던 순간, 누가 사랑했던 책 같아서 괜찮다고 말하던 목소리, 잠깐 세상이 조용해지는 것 같다고 하던 얼굴.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가 오래 품고 있던 상처는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해 남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상처를 지나 여기까지 살아온 사람의 안쪽에, 끝내 지워지지 못한 자리 같은 것이었다. 유정은 너무 늦게 그걸 알아버린 자신이 서글펐다.

비가 창문을 두드리던 밤, 유정은 오래 덮어두었던 원고 파일을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몇 줄 쓰다 멈추고 저장만 해둔 채 창을 닫아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손이 멈추면 잠깐 울었고, 울음이 잦아들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새벽이 밝아오면 손바닥으로 젖은 창문을 한 번 훔치고, 식어버린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문장을 이어갔다.
그녀가 쓰기 시작한 것은 비를 무서워하는 여자와, 빗소리가 들리면 오히려 안심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같은 비를 전혀 다르게 견디던 두 사람이 끝내 한 창문 앞에 나란히 서게 되는 이야기. 쓰다 보니 문장 사이사이로 자꾸만 서진이 스며들었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던 물방울, 젖은 셔츠 깃의 냄새, 끝내 다 말하지 못한 침묵, 너무 늦게 내뱉어버린 말들까지.
유정은 이번에는 문장을 꾸미는 쪽으로 숨지 않았다. 슬픔을 더 슬프게 만들지도 않았고, 사랑을 실제보다 더 빛나게 닦아두지도 않았다. 다만 그 안에 있었던 온도와 냄새와 망설임과 실수를, 제가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어느 새벽, 마지막 문장을 끝내고 나서야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오래 울었다. 슬퍼서라기보다, 이제야 겨우 자기 마음의 모양을 손끝으로 만져본 것 같아서.

서진이 돌아온 것은 초봄 직전이었다.

공항도 역도 아닌, 그들이 처음 자주 만나던 서점 앞이었다. 유정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다만 이상하게도, 돌아온다는 말을 들은 날부터 그는 그리로 올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서진은 적요의 처마 아래 서 있었다. 겨울 끝의 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비에 젖은 공기 안에는 아주 조금 부드러워진 결이 섞여 있었다. 가로수의 마른 가지 끝도 금세 무언가 틔울 듯했고, 해는 전보다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그는 서점 처마 아래 서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머리는 조금 길어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보였다. 그런데 눈빛만은 전보다 또렷했다. 유정은 그를 보는 순간 울음이 먼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이번에는 울기 전에, 먼저 꺼내야 할 말이 있었다.

“여기로 올 것 같았어.”

그녀가 말했다.

“응.”

말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만 둘 사이를 조용히 메우고 있었다.

유정이 먼저 가방에서 원고 뭉치를 꺼냈다. 흰 종이가 습기를 머금어 가장자리가 조금 말려 있었다.

“이거, 너 때문에 끝냈어.”

서진은 의아한 얼굴로 원고를 받았다.

“소설이야?”

“응.”

“읽어도 돼?”

“지금 말고. 집에 가서.”

그는 원고를 품에 안듯 조심스럽게 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유정은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책을 건네받던 때와 닮은 손이었다. 흠 없는 것만 고르는 대신, 그 안에 남아 있는 시간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손.

“서진아.”

“응.”

“그날 내가 너무 함부로 말했어. 미안해.”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보았다.

“나는 네가 나를 밀어낼까 봐 무서웠어. 그런데 그 무서움을, 다 네 잘못처럼 말해버렸어.”

빗소리가 잠시 더 굵어졌다.

“나도 미안해.”

그가 낮게 말했다.

“난 너를 사랑하면서도, 내가 잃어버린 것들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봤어. 네가 느꼈을 외로움을 알면서도.”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누구한테나 지나온 시간이 있잖아. 그게 잘못은 아니야.”

서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유정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 이제 알아. 네 안에는 내가 끝내 다 닿지 못할 데가 있다는 거. 근데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그런 자리를 하나쯤은 안고 살잖아. 나도 있어. 그래도 그걸 안고서, 서로에게 갈 수는 있는 거잖아.”

서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비에 젖은 불빛이 그의 속눈썹 끝에 얇게 맺혀 있었다. 유정은 그가 이제야 겨우 숨을 쉬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 다시 너한테 가도 될까.”

그가 말했다.

“이번엔 네가 안 기다리게.”

유정은 웃으려다가 끝내 울고 말았다.
눈물이 먼저 뺨을 타고 내려왔고, 입가에는 아직 웃음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었다.
서진은 바로 다가오지 못하고 잠깐 그녀를 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뺨을 닦아주었다.
비를 맞은 손끝이 차가웠다. 그런데 그 차가움에 닿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먼저 풀어졌다.
그의 손등 위로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유정은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서진이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래 잃어버린 것을 다시 다루듯, 놀랄 만큼 조심스러운 포옹이었다.

한 번 서로를 아프게 해 본 뒤라서, 그 포옹은 처음보다 더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서진은 그녀를 급하게 끌어당기지 않았고, 유정도 그의 품 안으로 바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둘은 아주 조금씩 서로의 온도에 익숙해지듯 가만히 붙어 있었다. 사람은 한 번 다치고 나면, 어느 정도의 힘이 상대를 더 놀라게 하는지부터 먼저 배우게 되는 것 같았다.
유정은 그의 코트 안쪽에서 낯익은 나무 냄새를 맡았다. 오래된 서가와 비에 젖은 겨울 사이 어디쯤에 머무는 냄새였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한 번 어긋난 사람들만이 알게 되는 조심스러움 속에서 다시 나란히 서기 시작했다.

유정은 여전히 서점에서 일했고, 밤이면 돌아가 소설을 썼다. 서진은 일을 마친 뒤 종종 적요에 들렀다. 예전처럼 시집 한 권을 사 가는 날도 있었고,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한참 앉아 있다가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함께 나서는 날도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먼저 젖은 우산을 접어 문가 매트 위에 세워두었고, 유정은 계산대 아래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말없이 그의 손목에 쥐여주곤 했다. 그런 사소한 일들이 오래 반복되면서, 둘 사이에는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되는 다정이 조금씩 쌓여갔다.

서진은 마음이 무거운 날이면 먼저 말했다. 오늘은 좀 가라앉아 있다고. 유정도 불안이 밀려오는 밤이면 더 숨기지 않았다. 네가 없어질까 봐 무섭다고, 그 말만은 끝내 삼키지 않았다. 둘은 그럴 때마다 대단한 해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다만 한 사람이 입 밖으로 꺼낸 두려움을 다른 한 사람이 조용히 듣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밤은 전보다 덜 어두워졌다. 말해진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도, 적어도 예전처럼 제멋대로 방 안을 떠돌지는 않았다.

봄이 오자 그들은 바다에 갔다.

늦은 오후의 바다는 잿빛으로 흐려져 있었고, 수평선 위로는 가는 비가 오래 내리고 있었다. 날이 맑았더라면 다 보였을 먼 곳들이, 그날은 물기 속에서 끝내 다 드러나지 않았다. 서진은 그런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가, 맑은 날보다 이런 날이 더 좋다고 말했다. 다 보이지 않아서 좋다고. 유정은 웃으며 젖은 모래사장을 걸었다. 발밑에 남은 발자국은 금세 무너졌고, 파도는 낮고 길게 밀려와 그 자리를 천천히 지워갔다. 바닷가의 비는 도시의 비와는 달랐다. 같은 물인데도 훨씬 넓게 내려앉았고, 더 오래 사람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우산을 쓰고 있었는데도 어깨 끝은 어느새 조금씩 젖어 있었다.

서진은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서서, 우산 끝 아래의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쁘다.”

“뭐가?”

“너.”

그녀는 민망해져 먼저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 앞에서는 다시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그 얼굴에는 장난이라고는 없었다. 유정은 괜히 젖은 머리카락만 귀 뒤로 넘겼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입 안이 이상하게 뜨거워져서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바닷가 작은 숙소에서 그들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문 바깥으로 파도와 비가 겹쳐 들렸고, 하얀 침대 시트 위에 노란 조명이 번졌다. 서진은 유정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보다가 말했다.

“나는 내가 다시 누구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유정은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사랑이 끝나면 나도 거기서 같이 끝나는 줄 알았어. 다시 누굴 사랑하는 건 배신 같았고, 나한텐 아예 안 될 일 같았고.”

그럼 지금은?”

서진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리창을 타고 빗물이 만나고 갈라지고 있었다.

“지금은… 끝난다고 다 없어지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냥 다른 모양으로 남는 거지.”

유정은 그 말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남아 있는 건 남아 있고, 새로 오는 건 또 오더라. 꼭 서로를 밀어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유정은 이제 그가 하연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예전처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음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하나를 넣기 위해 다른 하나를 밀어내는 좁은 서랍 같은 것이 아니라, 먼저 스며든 것과 나중에 스며든 것이 서로 다른 결로 오래 남는 쪽에 가까웠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가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지, 누구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지였다.

유정은 더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였다. 서진은 아주 잠깐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이내 웃음 같은 숨을 내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입맞춤은 짧게 끝나지 않고 오래 머물렀다. 창문 밖에서는 비가 유리를 가만가만 두드리고 있었고, 그 소리를 한 사람의 품 안에서 함께 듣는 순간만큼은 세상도 조금 멀어지는 것 같았다.

시간은 흐르고, 두 사람은 조금씩 함께 늙어갈 준비를 했다.

여름에는 이사를 했다. 둘이 살기에 너무 크지도 좁지도 않은 집. 남향 창이 길게 나 있어 비 오는 날이면 거실 바닥까지 회색 빛이 번져 들어오는 집이었다. 유정은 창가에 식물을 놓았고, 서진은 오래된 나무 책장을 들였다. 책은 조금씩 섞였다. 그녀의 소설과 시집 사이에 그의 건축 도록이 들어가고, 그의 설계 노트 옆에 그녀가 쓰다 만 원고와 수정한 교정지가 포개졌다. 두 사람의 삶이 꼭 닮지는 않았지만, 한 공간에서 천천히 서로의 질감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여름밤, 정전이 된 적이 있었다.

폭우 때문이었다. 집 안이 갑자기 캄캄해졌고, 냉장고 소리도 에어컨 바람도 멎었다. 바깥은 번개와 비로 가득했다. 유정은 순간 어린 시절처럼 불안해졌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서진은 서랍에서 양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유정은 그제야 그가 비 오는 날이면 서랍 속 양초 위치를 꼭 한 번 확인해 두는 버릇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불꽃이 흔들리며 그의 얼굴을 따뜻하게 밝혔다.

“이리 와.”

유정은 그의 옆에 기대앉았다.

어둠 속에서 비가 더 크게 들렸다. 그 소리의 한복판에서 그녀는 이상하게 안심했다. 예전엔 빗소리가 세상에 혼자 남겨진 소리 같았는데, 이제는 누군가가 같은 어둠 속에서 함께 듣고 있는 소리가 되어 있었다.

그거 알아?” 그녀가 속삭였다.

나 예전엔 빗소리 무서워했었잖아.”

그럼 이젠?”

유정은 창밖을 보았다. 끝없이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로 맞은편 건물의 불빛들이 번지고 있었다.

“이젠 조금 슬프고, 조금 예쁘고, 많이 안심이 돼.”

서진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해 가을, 유정의 첫 책이 나왔다.

작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었고, 세상이 떠들썩할 만큼 큰 화제를 모으지도 않았다. 그래도 유정에게는 그 한 권으로 삶의 결이 조금 달라진 듯한 시간이었다. 책 제목은 《비가 계속된다면》이었다. 헌정 페이지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끝내 다 알 수 없는 마음까지 품은 채, 내 곁에 남아준 사람에게.

서진은 그 문장을 읽고도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시선이 헌정 문구 위에 오래 머물렀고, 엄지손가락이 책장 끝을 가만히 눌렀다. 그러다 천천히 책을 덮었다. 아무 말도 없이 다가와 유정을 끌어안았다.
유정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셔츠 안쪽에서 심장이 또박또박 울리고 있었다. 귓가에 닿는 그 둔한 박동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비 오는 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사이로도 그 리듬만은 또렷했다. 유정은 눈을 감은 채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말보다 먼저 닿는 것이 있다면, 아마 이런 쪽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물론 삶은 한 번의 화해와 한 권의 책으로 영원히 평온해지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둘은 종종 다투었다. 사소한 집안일로, 제때 풀리지 않은 피로로, 말끝에 스친 미묘한 온도 차이로. 어떤 날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너무 오래 걸렸고, 어떤 날은 침묵이 밤보다 길게 이어졌다. 그래도 전과 같지는 않았다. 둘은 이제 사랑을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만 여기지 않았다. 금이 가도 손에서 놓지 않고, 손때가 묻으면 닦아 다시 쓰고, 흠집이 생겨도 쉽게 버리지 않는 것들처럼. 사랑도 그렇게 오래 곁에 두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두 사람은 늦게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서진은 가끔 하연의 기일에 꽃을 샀다.

처음 그 사실을 말했을 때, 유정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갈까?”

그는 놀란 얼굴을 했다.

“괜찮아?”

“응.”

묘지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정은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앞에서 서진이 꽃을 내려놓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젖은 돌 위로 빗물이 가늘게 흘렀고, 서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정도 그 곁에서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침묵은 차갑지 않았다. 누군가의 오래된 사랑 앞에서, 함부로 발소리조차 크게 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까웠다.

돌아오는 길에 서진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

“왜.”

“내 안에 남아 있는 슬픔까지 같이 있어줘서.”

유정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서진이 잡고 있던 손의 온기가 오래 남아 있었다. 기쁜 마음은 대개 쉽게 나눠지지만, 슬픔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녀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누군가의 오래된 아픔 곁에 가만히 있어주는 일, 어쩌면 사랑은 그런 데서부터 생활이 되어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세월은 물처럼 쌓였다.

몇 번의 이사와, 몇 번의 계절과, 몇 번의 상실과 작은 회복이 있었다. 유정은 두 번째 책을 냈고, 서진은 오래된 극장을 복원하는 큰 프로젝트를 맡았다. 둘은 더 이상 젊은 연인처럼 매일 사랑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더 깊은 방식으로 서로를 알고 있었다. 누가 먼저 지치는지, 누가 아플 때 더 말이 없어지는지, 누가 비 오는 날 커피보다 차를 찾는지, 누가 슬픈 영화를 보고도 울지 않다가 설거지하다가 갑자기 등을 굽히는지. 함께 산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이었다. 영혼 같은 큰 말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결을 오래 알아가는 일.

그리고 어느 날, 아주 오래전 처음 만났던 그 서점 앞을 다시 지나게 되었다.

서점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간판은 조금 바랬고, 주인은 더 늙었으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책장 배치도 조금 달라졌지만, 비 오는 날의 적막만은 여전했다. 두 사람은 처마 아래에 잠시 섰다. 마침 정말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 처음 봤을 때 기억나?”

유정이 물었다.

서진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람의 조용한 확신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날 네 얼굴을 오래 기억했어.”

그 말을 듣자 유정은 결국 웃고 말았다.

“네가 외로운 곳은 대개 아름답다고 했었지.”

“그런 말도 했나?”

“했어. 그 말, 나 혼자 오래 기억했어.”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 말, 지금은 조금 고쳐야 할 것 같아.”

“뭐라고?”

그는 처마 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한 번 보았다.

“그날 예뻤던 건, 이 서점이 아니라 너였어.”

그의 말에 유정은 웃었다.

둘은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종이 냄새, 젖은 우산 냄새, 책장을 넘기는 소리. 마치 시간이 둥글게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온 것 같았다. 주인은 유정을 기억했고, 서진은 시집 한 권을 골랐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유정은 문득 처음처럼 물었다.

“포장해 드릴까요?”

서진은 웃었다.

“아니요. 누가 오래 사랑하다 건네놓은 책 같아서요.”

유정은 결국 웃으며 그의 팔을 가볍게 쳤다.

빗소리 사이로 웃음이 번졌다. 바깥의 도시는 여전히 복잡했고, 삶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었고, 비는 여전히 때때로 너무 오래 내렸다. 그래도 이제 유정은 그렇게 살아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비가 오래 온다고 해서 꼭 무너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 어떤 밤들은 끝끝내 젖은 채 지나가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한 번 닦아주고, 말없이 우산을 조금 더 기울여주고, 끝내는 함께 집 쪽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산 아래에서 유정은 서진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감각이 있다면 아마 이런 쪽일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이 내 손 안에 있다는 것. 따뜻함과 체온, 뼈와 힘줄의 작은 굴곡, 비를 맞고 난 뒤의 차가움까지 전해지는 감각.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끝날 것을 알면서도 놓을 수 없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날 밤, 잠들기 전 유정은 창문을 열어두었다.

봄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커튼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서진은 그녀의 곁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다. 잠든 얼굴은 늘 어린 시절을 닮는다. 세상의 모든 긴장과 역할을 잠시 벗어놓은 얼굴. 유정은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이목구비가 잘생겨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것들을 안고도 끝내 누군가를 다시 사랑해 낸 사람이어서.

그녀는 그의 이마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췄다.

비는 계속 내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제 예전처럼 끝없는 상실처럼만 들리지 않았다. 오래된 슬픔 위에도 다른 계절의 빗물이 내려앉을 수 있다는 것 같았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새로 시작되는 날들이 같은 지붕 아래서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같았고, 한 번쯤 무너졌던 사람들끼리도 생각보다 조심히 서로를 안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창문 밖 가로등 불빛이 빗물에 번져 방 안으로 희미한 은빛을 들였다. 유정은 그 빛 속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일도 비가 올지 모른다. 다시 맑아질지도 모른다. 삶은 늘 그 사이를 흔들리며 지나갈 것이다. 그래도 어떤 날에는, 비가 오래 와도 괜찮았다. 끝까지 다 알지 못하는 것들 가운데에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늘 맑은 날에만 오는 것이 아니었고,

기억은 지운다고 해서 깨끗이 사라지는 종류도 아니었고,

사람은 상처를 다 없앤 뒤에야 누군가의 곁에 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은 다시 손을 내민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한 번 놓쳐본 적 있는 손으로,

또 비가 올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아마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데서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끝나지 않는 빗속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끝내 놓치지 않으려는 데서.

그리고 그 마음이 살아 있는 한,

세상에는 오래도록 아주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남는다.

빗소리보다 조금 더 낮고,

심장보다 조금 더 따뜻한 온도로.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