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
늦은 오후의 운동장은 계절이 다 지나간 뒤에도 한동안 그 계절의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 곳 같았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걷혀나간 자리엔 공기만 남아 있었고, 철봉의 차가운 광택과 모래 위에 얇게 눌린 발자국들이 그날의 끝을 가만히 증언하고 있었다. 바람은 그 넓은 빈터를 한 번 훑고 지나갈 때마다, 이미 끝난 이야기들의 표면을 들추듯 모래를 사각사각 밀어 올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소인데도, 이상하게 그런 곳에는 오래전의 약속이 가장 쉽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시작할 때보다 잊어갈 때 더 많은 흔적을 남기는 법이어서, 운동장 한 귀퉁이에 묻힌 작은 상자 하나쯤은 그 자체로 그 시절 전체를 대신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이는 스물아홉이 되어 그 학교 앞에 다시 서 있었다. 교문은 바뀌어 있었고, 낡은 담벼락 대신 밝은 회색의 낮은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으며, 운동장 가장자리의 느티나무는 그사이 키를 더 키운 채 가지를 넓게 펼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 나무가 하늘을 가리는 줄 몰랐다. 그 아래 서보면 세상이 다 보이는 줄 알았지, 무엇인가 가려진다는 감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무는 더 크고, 하늘은 조금 멀고, 그 아래 선 사람은 예전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꼭 그만큼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오래 접혀 있던 자국이 십자가처럼 남은 종이였다. 연필로 그린 조악한 운동장 약도가 있었다. 본관 건물, 조회대, 느티나무, 농구 골대, 그리고 오른쪽 아래 작게 표시된 별표 하나. 별표 옆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열다섯 번째 봄이 오면 여기서.
글씨는 민주의 것이었다. 서이는 그 글씨를 보고 있자니 늘 같은 지점에서 숨이 조금 막혔다. 열다섯 번째 봄. 그 봄은 이미 왔고, 지나가고, 또 다른 계절들에게 밀려난 뒤였다. 민주는 그 약속을 적을 때 정말로 열다섯 해를 상상했을까. 열다섯이라는 숫자는 열셋이나 스물보다 훨씬 막연해서, 아이들이 쓰기엔 더 믿음직스럽고 어른들에게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숫자 같았다. 그때의 우리는 아주 멀리 있는 미래를 하나쯤 정해두어야 현재의 다정함이 덜 불안해진다고 믿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학교에 들어오려면 사전 허가가 필요했다. 서이는 며칠 전 행정실에 전화를 해 졸업생이라고 말했고, 오래전 묻어둔 물건을 찾으러 오고 싶다고 설명했다. 상대는 조금 웃는 목소리로, 요즘도 그런 걸 찾으러 오는 분이 있네요, 하고 말했다. 서이는 그 말에 함께 웃었지만, 전화를 끊고 한동안 웃을 수 없었다. 요즘도. 그 말은 어쩐지 모든 것을 가볍게 만들었다. 오랜 약속과 오래된 부재가, 한 번쯤 있을 수 있는 추억의 이벤트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맞을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누군가에겐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고, 누군가에겐 애초에 기억나지 않는 사건. 하나의 시간은 늘 사람 수만큼 다른 무게를 갖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방과 후 수업이 끝난 아이들 몇이 멀리서 공을 차고 있었다. 교무실에서 안내를 받고 나온 젊은 행정실 직원이 삽 하나를 들고 와 건네주었다.
“대충 위치만 아시면 잠깐 찾아보셔도 돼요. 공사하면서 흙이 좀 뒤집혀서, 정확한 자리에 그대로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없을 수도 있겠네요.”
“네, 그럴 수도 있어요.”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려다 이내 멈췄다. 미안해할 일은 아니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세월과 공사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삽을 받아들었다.
“괜찮아요. 없으면 없는 대로.”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자 생각보다 낯설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이곳에 오기까지 그녀가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를 생각하면, 그 말은 제 입으로 내뱉은 가장 성숙한 거짓말처럼 들렸다.
느티나무 아래 흙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삽 끝이 몇 번 튕겨 나갔다. 서이는 운동화를 흙에 깊게 박고 몸무게를 실어 삽을 눌렀다. 흙이 조금씩 벌어졌다. 삽질을 할수록 바람보다 먼저 올라오는 것은 냄새였다. 오래 눌려 있던 흙의 냄새, 젖지 않았는데도 어딘가 축축한 냄새,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동시에 들어 있는 냄새. 그것은 대개 기억과 비슷했다. 건드리지 않으면 조용하지만, 한 번 파고들면 훨씬 넓은 곳에서 밀려 나오는 것.
흙을 세 번쯤 뒤집었을 때, 서이는 자신이 왜 하필 오늘 여기에 왔는지 다시 떠올렸다. 날짜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날짜와 전화 때문이었다.
사흘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지 않으려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전화를 받았다.
조금 가라앉고 쉰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서이니?”
그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오래전부터 없어졌다. 회사에서는 성으로 불렸고, 집에서는 대개 아무 호칭 없이 말이 오갔다. 친구들도 어느새 이름의 끝을 둥글게 말아 부르지 않았다. 서이는 몇 초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세요?”
“나 연정이.”
그 이름은 겨울 유리창처럼 갑작스레 맺혔다가 서서히 선명해졌다. 연정이.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민주와 서이, 그리고 연정 셋은 늘 붙어 다녔다. 급식 줄에서도, 수행평가를 준비할 때도, 청소시간에 빗자루를 나누어 들 때도. 세 사람의 걸음은 묘하게 맞아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늘 같은 보폭으로 복도를 지나곤 했다. 어떤 우정은 서로를 좋아한다는 확인보다, 오래 함께 걷다 보니 발소리의 간격이 비슷해지는 일에서 시작된다. 서이는 그렇게 믿었다. 그때의 우리는 우리를 설명할 말이 없어서, 그냥 친구라고 불렀다. 친구라는 말은 늘 부족하고도 충분했다.
“너 번호 안 바꿨더라.”
“아직 그대로야. 그러는 너는, 어떻게 내 번호를 찾은 거야?”
“옛날 연락처 다 뒤져서. 사실… 민주 어머니한테 들었어.”
민주 어머니. 그 말을 듣자 서이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느티나무였다.
이름 하나가 장소를 불러오고, 장소가 다시 한 시절을 데려오는 식이었다.
서이는 잠시 말을 고르다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잠깐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정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두어 번 입술을 떼었다 붙이는 기척만 희미하게 번졌다.
“이번 주가… 민주 기일이더라고.”
서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휴대폰을 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기일이라는 말은 무섭도록 명확했다. 죽은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매년 같은 자리에 돌아온다. 생일과는 다르게, 그것은 앞으로 더 나아가는 날짜가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로 되감기는 날짜였다. 서이는 달력을 보지 않아도 그 주가 어느 주인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고, 지나가는 일상에 바느질하듯 자신을 붙들어 매며 살았다.
“그래서?”
“갑자기 생각났어. 타임캡슐.”
그 한마디에 서이의 배 속 어딘가가 서늘하게 비었다. 민주가 죽은 뒤, 셋 중 누구도 타임캡슐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아니, 꺼낼 수 없었다. 그 상자에는 분명 민주가 넣은 것도 있었을 테니까. 언젠가 셋이 함께 열자고 묻어둔 것을, 둘만 남아 열어본다는 생각은 너무 쉽게 배신처럼 느껴졌고, 너무 늦게 찾아간다는 사실은 또 다른 형태의 비겁함 같았다.
“열 건지 말 건지 모르겠어서. 근데 너한테는 말해야 할 것 같았어.”
연정의 목소리는 자꾸 희미해졌다 선명해졌다. 마치 지하철이 터널과 지상을 오갈 때처럼.
“같이 갈래?” 그녀가 물었다.
서이는 즉답하지 못했다.
“나… 생각 좀 해볼게.”
“그래. 근데 나 못 갈지도 몰라.”
“왜?”
연정은 잠시 말을 멈췄다.
“나 병원에 있어.”
그 후에 이어진 설명은 서이의 귀에 오래 남지 않았다. 수술 날짜, 검사 결과, 입원 일정, 별것 아니라는 식의 웃음, 그런데 별것 아닌 일은 아닌 것 같은 침묵. 전화는 길지 않았는데도 끊고 나니 해가 한참 기울어 있었다. 서이는 한동안 창밖만 봤다. 도로 건너편 빌딩 유리창에 마지막 햇빛이 걸려 있었고, 그것이 너무 환해서 오히려 금방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사람의 몸도, 우정도, 약속도, 어쩌면 그런 빛과 비슷한 것인지 몰랐다. 분명히 존재했는데 오래 볼수록 사라짐이 먼저 예감되는 것.
다음 날 아침, 연정에게 메시지가 왔다.
미안. 못 갈 것 같아. 너 혼자라도 가보면 좋겠어. 괜히 이런 말 꺼낸 건가 싶기도 한데.
그리고 조금 뒤에 하나가 더 왔다.
민주 어머니가, 네가 한 번 다녀오면 민주도 좋아할 거라고 하셨어.
서이는 답장을 오래 쓰지 못하다가 결국 이렇게만 보냈다.
다녀올게.
그것이 오늘이었다.
삽날 끝에 단단한 것이 툭 하고 걸리는 감각이 전해졌을 때, 서이는 잠시 손을 멈췄다. 정말 있는 걸까. 아니면 지나가는 돌조각이나 버려진 물건일까. 허리를 굽혀 흙을 손으로 헤치자 검은 비닐에 감긴 한 귀퉁이가 드러났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니 손바닥만 한 과자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는 선명한 빨강이었을 것이 분명한데, 지금은 흙과 습기를 먹어 검붉은 갈색에 가까웠다. 뚜껑 모서리는 조금 찌그러져 있었고, 스티커 자국이 반쯤 남아 있었다.
서이는 순간 웃음이 났다. 너무 초라해서였다. 우리가 그토록 영원할 것처럼 묻어둔 것이, 고작 이런 상자라니.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정확하다고도 느꼈다. 우리의 우정은 세상을 바꿀 선언 같은 것이 아니라, 교실 뒤편 문방구에서 살 수 있는 값싼 과자통에 더 가까웠다. 손쉽고 소박하고 조금 우스웠지만, 그만큼 실제였다. 과장되지 않은 것만이 오래 남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녀는 상자를 꺼내 운동장 가장자리 벤치로 옮겼다. 행정실 직원은 멀리서 괜찮으냐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고,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있고 싶었다. 벤치 위에 상자를 올려두자 햇빛이 비스듬히 뚜껑에 걸렸다. 흙먼지가 미세하게 반짝였다. 서이는 손수건으로 겉을 닦아냈다. 뚜껑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모서리를 조금씩 들어 올리고 힘을 주자 갑자기 툭 하고 열리며 오래 갇혀 있던 냄새가 흘러나왔다. 종이 썩는 냄새와 플라스틱 냄새, 아주 희미한 화장품 냄새 같은 것. 어쩌면 누구의 필통에서 배어든 향이었을지도 몰랐다.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접힌 편지 세 장, 머리끈 하나, 작은 거울, 놀이공원 자유이용권 반쪽, 필름이 다한 일회용 카메라의 빈 몸체, 색이 바랜 구슬 팔찌, 그리고 투명 비닐에 넣은 사진 한 장. 사진 속에서 셋은 교복 위에 체육복 상의를 걸치고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민주가 가운데였고 연정이 왼쪽, 서이가 오른쪽이었다. 세 사람 모두 햇빛 때문에 눈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하다 웃음이 터진 찰나였는지 표정이 다 정돈되지 못한 채 흩어져 있었다. 그 정돈되지 않은 웃음이 이상하게 완전해 보였다. 사진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삶에서 미처 고쳐 입지 못한 순간을 붙잡아 두는 일이었다.
서이는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편지 세 장을 꺼냈다. 겉에는 각각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이가 읽을 것. 연정이가 읽을 것. 우리 셋이 같이 읽을 것.
글씨를 보아하니 맨 앞 두 장은 각각 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쓴 듯했고, 마지막 한 장은 민주 글씨였다. 서이는 먼저 자기 이름이 적힌 편지를 펼쳤다. 종이는 습기를 먹어 조금 울어 있었지만 다행히 글씨는 읽을 만했다.
안녕, 미래의 서이야. 너는 아마 키가 지금보다 더 컸을 것 같고, 머리는 길렀을 것 같아. 그리고 지금보다 덜 울 것 같아. 나는 네가 어떤 어른이 될지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지금처럼 연필심이 자꾸 부러지는 일로 너무 속상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혹시 우리가 친구랑 멀어져도 이상한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 사람은 원래 멀어지기도 한다고, 그래도 한때 진짜였으면 그걸로 된 거라고. 근데 솔직히 안 멀어졌으면 좋겠어. 민주랑 연정이랑 계속 친했으면 좋겠다. 너는 맨날 말 안 하고 혼자 생각해서 우리가 답답할 때가 있거든. 그러지 말고 말해. 너는 말 안 하면 아무도 몰라.
끝에는 아주 작게 덧붙인 문장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랑 너무 싸우지 마.
서이는 헛웃음을 흘렸다가 곧 눈을 감았다. 그 시절의 자신이 그렇게 써두었을 줄은 몰랐다. 말 안 하고 혼자 생각해서. 그건 지금도 그대로였다. 사람은 바뀌기도 하지만, 어떤 핵심은 길게 그림자를 끌며 따라오는 법이다. 그녀는 편지를 접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그 몇 줄이 이상하게 아팠다. 미래의 자신에게 하는 소원인 척하면서, 사실은 현재의 자신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었던 아이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연정이의 편지였다. 읽어도 되는지 잠시 망설였지만, 겉면에 서이도 봐도 됨 이라고 작게 적혀 있어 펼쳤다.
미래의 연정에게. 너는 아직도 남 눈치 보면서 웃고 있니. 그러면 안 돼. 할 말 있으면 해야 돼. 특히 서이랑 민주한테는 숨기지 말기.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거 부끄러워하지 말기. 나는 커서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면 동물병원에서 일해도 좋다. 아무튼 손으로 뭔가 만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남들이 이상하다고 해도. 그리고 혹시 셋이 싸운 적이 있으면 무조건 먼저 화해해. 누구 하나 없어지면 진짜 이상할 것 같아. 상상만 해도 싫다.
마지막 문장에서 서이의 손이 멈췄다. 누구 하나 없어지면. 상상만 해도 싫다. 어릴 때 쓴 문장은 예언이 아니라 단순한 두려움이었을 텐데, 시간이 지난 뒤 읽으면 마치 너무 가까이 스쳐 지나간 불길처럼 느껴진다. 서이는 종이를 천천히 접었다. 연정은 결국 그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되었고, 남 눈치를 보는 습관도 완전히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병원에 있다는 말을 하며 결국 먼저 전화를 건 것은 연정이었다. 늘 망설이던 사람이 이번에는 먼저 전화를 걸었다. 서이는 그 한 걸음이 생각보다 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편지를 펼치기 전, 서이는 한참 숨을 골랐다. 민주의 글씨는 항상 또렷했다. 자음과 모음이 반듯하게 제 자리에 있었고, 문장 끝에서도 망설임이 적었다. 민주가 늘 결단력 있는 아이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사소한 선택 앞에서 오래 고민하는 편이었지만, 막상 마음을 정하면 그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흔들리면서도 글씨는 반듯하다. 속이 어지러울수록 바깥을 곧게 세우는 버릇이 있는 것이다.
우리 셋이 같이 읽을 것.
첫 줄 아래에 그렇게 다시 써 있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서이는 이 편지를 끝까지 읽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손은 이미 종이를 펼치고 있었다.
안녕, 미래의 우리야. 이걸 읽을 때 우리 셋이 진짜 어른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나는 어른이 되면 뭐가 달라질지 잘 모르겠어. 아마 돈이 생기고, 밤늦게까지 안 자도 혼나지 않고, 학원 안 가도 되고, 그런 거겠지. 근데 나는 어른이 되어도 우리 셋이 한 번쯤은 다시 만나서, 오늘처럼 운동장에 앉아 있었으면 좋겠어. 꼭 대단한 사람이 안 되어도 괜찮고, 다들 좀 달라져도 괜찮아. 그냥 만나서 너희 둘이 아직도 서로 말 끊고 얘기하는지 보고 싶다.
여기서 서이는 웃었다. 민주가 늘 그런 식으로 둘을 놀리곤 했다. 서이와 연정은 이야기하다가 종종 동시에 말을 해서 서로 미안해했고, 그때마다 민주가 중간에서 “둘이 결혼해라” 하고 말해 셋이 웃었다. 그런 우스운 문장 하나가 편지 속에 살아 있었다.
그리고 혹시 그때 우리 중 한 명이 여기 없더라도, 나머지 둘은 와서 읽었으면 좋겠어.
서이는 문장을 다시 읽었다. 햇빛이 종이 위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눈이 잘못 읽은 줄 알았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없더라도.
그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왜 이런 말을 쓰냐면,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을 하거든. 사람은 평생 같이 못 있을 수도 있잖아. 이사 갈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고, 아프거나 죽을 수도 있고. 근데 그렇다고 그전까지의 시간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누가 없더라도 남은 사람이 그 사람 몫까지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이건 슬퍼하라는 말이 아니라, 잊지 말라는 말이야. 잊지 않는 건 계속 울라는 뜻이 아니고, 그 사람이 있었던 자리에 바람이 지나갈 수 있게 조금 비워 두라는 뜻이야.
서이는 더 이상 곧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상체가 천천히 굽어졌다. 편지를 쥔 손이 떨렸다. 그 사람이 있었던 자리에 바람이 지나갈 수 있게 조금 비워 두라. 어떻게 열다섯 살의 아이가 이런 말을 쓸 수 있었을까. 물론 지금 읽는 자신이 더 많은 뜻을 덧입히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민주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우정이란 꼭 붙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 누군가의 자리를 억지로 메우지 않고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다정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백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여백이야말로 오래 버틴다는 것.
바람이 불었다. 느티나무 잎이 한꺼번에 흔들리며 빛을 뒤집었다. 서이는 눈가를 손등으로 눌렀다. 울음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크게 터지지 않고, 오래 닫혀 있던 문틈에서 물이 스미듯 천천히 나왔다. 그녀는 벤치 끝에 몸을 기대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먼 곳에서 아이들이 공 차는 소리, 체육관 문이 닫히는 소리, 교무실 스피커의 잡음이 들렸다. 삶은 늘 이렇게 이어진다. 누군가의 중요한 순간 곁에서조차 다른 것들은 무심히 움직인다. 그 무심함 때문에 오히려 사람은 견딜 수 있는지도 몰랐다. 세상이 함께 무너져 내리면 남은 사람은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편지 아래쪽에는 작은 봉투 하나가 붙어 있었다. 안에는 접힌 메모와 작은 열쇠가 들어 있었다. 메모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
체육창고 뒤 수도계량기 아래.
서이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기억이 났다. 타임캡슐을 묻던 날, 민주가“진짜 비밀은 따로 있어야 재밌지”하며 웃었던 것. 그때는 장난인 줄 알았다. 셋 다 과자통 하나를 묻고 흙을 덮으면서 손에 흙을 묻힌 채 깔깔 웃었고, 민주가 혼자 체육창고 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게 이 말이었나 보다.
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육창고는 예전보다 새로 칠해져 있었지만 위치는 같았다. 뒤편 좁은 길로 가자 벽 아래 수도계량기 철문이 보였다. 잠겨 있지는 않았다. 철문을 열어보니 안쪽 구석에 비닐로 감싼 작은 철제 상자가 있었다. 정말로 비밀을 하나 더 숨겨둔 것이다. 손바닥보다 약간 큰 상자. 방금 발견한 열쇠가 딱 맞았다. 서이는 상자를 들고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상자 안에는 MP3 플레이어 하나와 이어폰, 그리고 종이가 있었다.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건 우리 셋만 듣는 거야. 근데 고장 났을 수도 있음.
서이는 피식 웃었다. MP3 플레이어는 정말 오래된 모델이었다. 다행히 전원을 넣자 희미하게 화면이 켜졌다. 배터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기적 같았다. 이어폰을 꽂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 잡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와 웃음소리뿐이었다. 누가 녹음 버튼을 누른 채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민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녹음돼? 돼? 어, 된다.”
연정이의 목소리. “야, 진짜 한다고?”
서이의 어릴 적 목소리도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높고 얇았다. “하지 마. 나 이상하게 나와.”
민주가 웃었다. “이상하게 나와야 재밌지.”
잠깐 웅성거림이 이어지고, 누군가 이어폰 선을 잡아당겼는지 잡음이 났다. 그 뒤로 셋이 번갈아 말했다.
“미래의 우리에게.”
“안녕.”
“잘 지내?”
그리고 한참 웃음.
민주가 먼저 말했다. “나는 민주고, 오늘은 4월 11일이고, 우리 지금 타임캡슐 묻으러 왔어.”
연정이 끼어들었다. “민주가 자꾸 감독처럼 군다.”
“당연하지. 이 프로젝트 총책임자거든.”
“뭐가 총책임자인데.”
또 웃음. 그 웃음은 어떤 설명보다 정확하게 그 시절을 되살렸다. 친구들이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한 웃음이었다. 말보다 공기가 먼저 웃고, 한 사람이 웃기 시작하면 이유를 까먹어도 계속 이어지는 웃음.
잠시 뒤, 민주의 목소리가 다시 또렷해졌다.
“어쨌든, 미래의 우리. 만약 이걸 진짜 듣고 있다면, 우와, 신기하다. 나는 그때 우리가 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랜만에 만나도 금방 예전처럼 웃었으면 좋겠어.”
연정이 작게 말했다. “어색하면 어떡해.”
민주가 바로 답했다. “그래도 앉아 있으면 되지.”
“무슨 말이야.”
“친구는 꼭 말을 계속해야 친구인 거 아니잖아. 가만히 있어도 편하면 친구지.”
서이는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았다. 바람이 귀 바깥을 스쳤고, 이어폰 안쪽에서는 오래전의 바람이 다시 흘렀다. 시간은 이렇게 겹칠 때 가장 이상하다. 서로 다른 봄의 공기가 한 사람의 귀 안에서 만나면, 그 사이의 십오 년이 갑자기 얇아진다.
녹음은 계속되었다.
서이의 어린 목소리. “야, 그럼 나도 말할래. 나는… 나중에 우리가 다 바빠도 한 번쯤은 꼭 만나면 좋겠어. 누가 먼저 결혼하든, 서울 가든, 외국 가든.”
연정이.“왜 꼭 서울 가.”
“그냥 어른들은 다 서울 가는 줄 알았지.”
민주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너 진짜 촌스럽다.”
“너는 안 촌스러워?”
“나는 우주 갈 거야.”
“뭐래.”
“진짜. 안 되면 바다라도 갈 거야.”
우주와 바다. 민주가 그런 말을 하던 아이였다는 사실을 서이는 잊고 있었다. 민주에게는 늘 멀리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도망가고 싶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욕망이었다. 자기 밖의 넓은 곳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그래서인지 그녀는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이면서도, 어쩐지 정말 멀리 간 사람처럼 느껴졌다. 너무 멀리 가서 미워할 수도 없는 쪽으로.
녹음 끝부분에서, 셋은 갑자기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미래의 서이야, 아직도 울보야?”
“미래의 연정아, 아직도 싫다는 말 못 해?”
“미래의 민주야, 너는 진짜 우주 갔냐?”
그리고 마지막에 민주가 말했다.
“미래의 우리야. 만약 우리 중 누구 하나가 먼저 힘들어지면, 나머지 둘이 꼭 알아차려. 너무 늦지 않게. 이건 진짜 중요한 말이야.”
그 문장은 웃음 없이 나왔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그 뒤에 연정이“왜 갑자기 무섭게 말해”하고 타박했고, 민주가“그냥. 중요해서”하고 중얼거렸다. 녹음은 거기서 끝났다.
서이는 한동안 이어폰을 빼지 못했다. 정말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날 이후로 학교 복도와 교실의 공기는 형태를 잃었다. 누군가가 사라진 자리는 정확히 그 사람 크기만큼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중심으로 엮여 있던 모든 결이 함께 느슨해지는 방식으로 비어 간다는 것을 셋은, 아니 남은 둘은 너무 빨리 알게 되었다. 서이는 장례식장에서 연정을 거의 보지 못했다. 서로를 보면 더 울 것 같아서 일부러 시선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그 후로도 한동안은 같은 학교를 다니며 가끔 함께 급식을 먹고, 가끔 같이 버스를 탔지만, 둘은 민주의 부재를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침묵은 처음엔 배려였고, 나중에는 습관이 되었고, 끝내는 벽이 되었다.
고3이 되기 전, 연정은 전학을 갔다. 부모의 일 때문이라고 들었다. 연락하자는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약속은 이미 지켜지지 않을 예감을 안고 만들어진다. 서이는 대학에 갔고, 취업을 했고, 서울의 작은 원룸과 더 작은 회사들 사이를 옮겨 다녔다. 엄마와는 편지를 쓴 어린 자신이 바랐던 만큼 덜 싸우게 되었지만, 그건 화해라기보다 서로 지친 탓에 생긴 조용함에 가까웠다. 연애도 했고 헤어지기도 했고, 몇 번은 너무 바빠서 계절이 바뀌는 것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사이 민주를 생각하는 날은 점점 줄었다기보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날이 줄었다. 민주는 완전히 떠난 적도, 완전히 남은 적도 없는 사람처럼 그녀 안에 있었다. 가끔 버스 창에 비친 낯선 표정 속에서, 길가의 분홍빛 저녁 구름 속에서,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의 끝에서. 하지만 타임캡슐은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아니, 떠올려도 못 본 척했다. 그건 너무 명백한 문 같은 것이었고, 한 번 열면 다시 닫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벤치 아래로 느티나무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졌다. 서이는 핸드폰을 꺼내 연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찾았어.
조금 뒤, 답장이 왔다.
진짜?
응. 과자통이었어. 엄청 초라해.
연정은 곧바로 웃는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우리답다.
서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사진을 찍어 보냈다. 과자통 안의 물건들, 편지, 그리고 MP3 플레이어까지. 연정은 한참 답이 없었다. 병실에서 울고 있는 걸까, 아니면 간호사가 들어왔을까, 혹은 단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고 있는 걸까. 서이는 묻지 않았다. 대신 다시 천천히 사진을 바라봤다. 머리끈은 아마 연정 것일 테고, 작은 거울은 민주가 늘 들고 다니던 것과 비슷했다. 구슬 팔찌는 누가 봐도 서이 것이었다. 그녀는 한때 그런 싸구려 구슬들이 어른이 되면 꼭 보석이 될 것처럼 좋아했다. 어린 시절의 물건들이란 결국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한데, 이상하게 그 쓸모없음이 사람을 가장 정확히 설명한다. 실용적인 것으로는 한 사람의 취향이나 무릎의 높이, 웃을 때 귀가 먼저 빨개지는 버릇 같은 걸 담아낼 수 없으니까.
연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엔 서이가 먼저 받았다.
“사진 봤어?”
“응.”
수화기 너머로 울음 섞인 숨소리가 들렸다. 연정은 웃으려는 듯 한번 숨을 삼켰다.
“과자통일 줄 알았어?”
“전혀. 근데 너무 우리답더라.”
“응.”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의 기계음이 멀리서 삐, 하고 울렸다. 운동장에서는 공이 골대를 맞고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두 소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같은 빈틈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편지 읽었어?” 연정이 물었다.
“응.”
“내 것도?”
“겉에 읽어도 된다고 써 있었어.”
연정이 작게 웃었다.
“내가 그랬구나.”
“그리고 민주 편지도 읽었어.”
이번엔 더 긴 침묵. 서이는 벤치에 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바람이 조금 차가워지고 있었다.
“연정아.”
“응.”
“민주가… 누가 없더라도 남은 사람이 그 사람 몫까지 같이 있으라고 썼어.”
연정의 숨이 멎는 듯했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걔는 어떻게 그렇게 다 알고 있었을까.”
서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그랬다. 민주가 미리 알았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살아 있을 때부터 오래 남을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두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민주가 비워둔 자리마저도 어딘가 그 애의 방식처럼 느껴졌다.
“녹음도 있었어.”
“뭐?”
“MP3에. 우리 목소리.”
연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었다. “미쳤다. 진짜?”
“응. 너 그림 얘기했어.”
“아… 그만 말해.”
“민주는 우주 간다고 했고.”
연정이 이번에는 정말 웃었다. 짧게 터진 웃음 뒤에 곧바로 훌쩍이는 소리가 섞였다. 서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 엉킨 숨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목 안쪽을 조이던 것이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서이야.”
“응.”
“나 사실 많이 무서워.”
이 문장은 병보다 먼저 사람을 드러냈다. 서이는 눈을 감았다. 운동장에 아이들은 이제 거의 없었다. 저녁의 푸른 기운이 서서히 모래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알아.”
“아니, 너는 모를 수도 있어. 나 진짜… 별거 아닌 척했는데 무서워. 수술 결과도 그렇고, 그 뒤도 그렇고. 누구한테도 제대로 말한 적이 없어서.”
서이는 편지를 떠올렸다. 할 말 있으면 해야 돼. 특히 서이랑 민주한테는 숨기지 말기.
“이제 말했잖아.”
“지금이라도?”
“응. 지금이라도.”
연정은 한참 말이 없었다가 물었다.
“민주가 마지막에 뭐라고 했어?”
서이는 녹음의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전했다. 우리 중 누구 하나가 먼저 힘들어지면, 나머지 둘이 꼭 알아차려. 너무 늦지 않게.
연정은 그 말을 듣고 아주 오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서이는 병실의 천장과 운동장의 하늘이 어딘가에서 겹쳐질 것 같은 이상한 기분으로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이번엔 늦지 말자.” 연정이 먼저 말했다.
서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응.”
“나 수술 끝나면… 같이 듣자. 그 녹음.”
“그래.”
“민주 것도 같이.”
서이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대답했다. “응.”
그러고는 연정이 덧붙였다.
“그리고 너, 또 혼자 생각만 하다가 연락 끊지 마.”
서이는 웃었다.
“그 편지들, 나중에 나도 보여줘.”
“알겠어.”
통화를 끊고 나니 운동장은 거의 비어 있었다. 서이는 상자 속 물건들을 다시 하나씩 정리했다. 그런데 문득, 이것들을 그대로 다시 가져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임캡슐을 꺼내는 일은 종종 과거를 회수하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어쩌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어떤 것은 다시 묻혀 있어야 했다. 그래야 기억이 완전히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사람은 잊지 않기 위해서도 조금은 놓아두어야 한다. 모두 손에 쥐고 있으면 결국 현재를 살 수 없게 되니까.
그녀는 편지 세 장과 MP3 플레이어만 가방에 넣고, 나머지 물건들은 상자에 다시 담았다. 과자통 아래쪽 빈 공간을 정리한 뒤, 가방 속 수첩에서 한 장을 찢어 새 편지를 썼다. 글씨가 마음만큼 빨리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적었다.
안녕. 열다섯 해를 지나 다시 온 서이야. 우리는 둘이 왔어야 했는데 오늘은 나 혼자 왔다. 그래도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어. 연정이랑 통화했고, 너 목소리도 들었어. 너 말대로, 누가 없는 자리를 억지로 막지 않고 조금 비워 두니까 바람이 지나가더라. 그 바람이 생각보다 차갑지만은 않았어.
우리는 아직 미완성이야. 너는 멀리 갔고, 연정은 지금 아프고, 나는 여전히 말보다 생각이 많아. 그래도 오늘은 조금 다르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늦게라도 연락하고, 무섭다고 말하고, 같이 있어주고. 그게 어른이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친구를 잃지 않는 방법에 더 가까운 것 같아.
혹시 또 십오 년 뒤에 누가 이걸 열면, 그때의 우리는 오늘보다 덜 후회하고 더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셋이었든 둘이었든 하나였든, 서로 있었던 자리를 함부로 메우지 않고도 계속 살아냈으면 좋겠다.
민주야, 우주는 어땠니. 연정이는 아직 그림을 좋아할 것 같고, 나는 아직도 울보지만 예전보다 덜 숨으려고 해.
우리의 우정은 아마 완성된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거야. 늘 여백이 있었고, 그 여백 사이로 계절이 드나들었지. 근데 이제는 알아. 우정은 빈틈이 없어서 오래가는 게 아니라, 그 빈틈에 서로를 가둘 필요가 없어서 오래가는 거라는 걸.
다시 묻고 간다.
이름을 적고 날짜를 적은 뒤, 종이를 접어 상자에 넣었다. 서이는 느티나무 아래 처음 팠던 자리 옆에 조금 더 얕은 구멍을 새로 냈다. 과자통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흙을 덮었다. 삽으로 두어 번 표면을 다진 다음, 손바닥으로 마지막 흙을 눌렀다. 흙은 낮의 온기를 거의 잃고 있었다. 서늘했다. 그 감촉은 이상하게 사람의 이마를 짚어보는 손과 비슷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손.
해가 거의 기울어 교사 창문마다 불이 하나둘 켜졌다. 서이는 운동장 중앙 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교문을 향해 걷는데, 몇 걸음 못 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느티나무는 저녁빛 속에서 더 어둡고 단단한 실루엣이 되어 있었다. 그 아래 작은 상자가 다시 묻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까. 아무도 몰라도 괜찮았다. 어떤 것들은 발견되기 위해 묻히는 것이 아니라, 묻어두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기억하기 위해 존재한다.
학교 앞 정류장에는 퇴근 시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각자의 얼굴에 각자의 피로가 얹혀 있었고, 그 위로 저녁 공기가 고르게 내려앉고 있었다. 서이는 버스를 기다리며 연정에게 음성 파일을 전송했다. 용량이 커서 시간이 걸렸다. 전송 막대가 조금씩 차오르는 동안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랏빛과 회색이 섞인 구름 틈으로 아주 옅은 별 하나가 먼저 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는데도, 먼저 보이는 별은 있었다. 너무 희미해서 눈을 돌리면 금세 놓칠 것 같은 별.
그것을 보고 있자니 민주가 우주에 가겠다고 말하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어쩌면 멀리 간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이동이 아니라, 누군가의 저녁 하늘에 그렇게 먼저 희미하게 떠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늘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알아본 뒤로는 아무리 옅어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우정도 비슷했다. 가까이 붙어 다니던 시절이 지나고, 함께 늙어갈 거라 믿던 계획이 무너지고, 누군가는 먼저 사라지고, 누군가는 병실에 누워 있고, 누군가는 뒤늦게 운동장을 다시 찾는다. 그래도 어느 순간, 문득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빛이 남는다. 선명하지 않아도, 오래 못 봐도, 분명히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빛.
버스가 오기 전에 연정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수술 끝나면 너랑 민주 목소리 먼저 듣고 싶어.
그리고 잠시 뒤 하나가 더 왔다.
우리 이번엔 진짜 오래 보자.
서이는 휴대폰 화면을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오래 본다는 말이 예전처럼 영원을 뜻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자주 보자는 약속이 반드시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오래 보자는 말이 시간을 장악할 수 있는 주문도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건네는 일 자체가 사람을 살게 한다는 것도 안다. 오래란 실제 길이가 아니라, 놓지 않겠다는 방향일 때가 많았다.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오며 브레이크 소리를 냈다. 서이는 올라타 창가에 앉았다. 학교는 곧 시야에서 멀어졌다. 느티나무도, 운동장도, 묻힌 과자통도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텅 빈 느낌은 들지 않았다. 손끝에는 아직 편지의 얇은 결이 남아 있었고, 귓가에는 연정의 젖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붙어 있었다.
버스 유리창에 어둠이 서서히 비쳤다. 그 위로 서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예전보다 조금 야윈 얼굴, 더 이상 학생이 아닌 사람의 눈, 그런데도 어떤 각도에서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웃던 아이의 자취가 남아 있는 얼굴. 서이는 가방 안의 편지와 MP3 플레이어를 손끝으로 한 번 만져보았다. 딱딱한 모서리와 종이의 얇은 결이 손가락에 닿았다.
그녀는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 너머의 도시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는 아직 바람이 느티나무 아래를 스치고 있을 것이다. 조금 비워 둔 자리로. 언젠가 연정과 함께 다시 그 운동장에 올 수도 있겠다고, 혹은 끝내 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서이는 생각했다. 그래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 가운데서도 오래 남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오늘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버스는 강변 도로로 접어들었다. 저 멀리 강물 위에 저녁빛의 마지막 잔광이 얇게 남아 있었다. 서이는 창밖을 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는 이미 멀리 갔고, 누군가는 병실에 있고, 누군가는 이렇게 버스 창가에 앉아 있었지만, 손끝에는 아직 편지의 얇은 결이 남아 있었고, 귓가에는 연정의 젖은 웃음이 희미하게 붙어 있었다. 그 정도면, 오늘은 덜 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