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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Feb 14. 2023

우크레인전쟁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한국전쟁에서 그답을 찾을 수 있다.


우크레인 대통령 젤렌스키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등을 돌아다니며 백방으로 원조를 구하고 있다. 그의

정치적인 행보를 보면 한국전쟁 동안 이승만의 분신을 보는 듯 하다. 


우크레인과 러시아의 전쟁은 유크레인 군대가 러시아와 싸우고 있지만 유럽 연방과 미국(나토)이 유크레인 대신에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나토가 원조를 중단하면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우크레인 전쟁보다 더 명백한 대리전쟁이었다. 한반도에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이 싸웠다. 인공대신에 소련과 중공이 한국대신에 미국과 자유진영 국가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했다. 물론 한반도의 주인인 한국사람들의 전쟁 목적과 전쟁의 주체인 양진영 슈퍼 파우어의 목적이 같을 리가 없었다.


인공과 한국은 통일 된 나라를 원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남북의 국가를 반대 편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목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분단국가가 되어도 개의치 않는 다는 입장이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원하지 않아서 그것을 확인한 후에 김일성에게 남침 허락을 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스탈린이 채코 주재 소련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와 반대로 그는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원했다고 한다.  


당시 유엔 주재 소련 대사 말리크는 안전보장이사회에 결석하고 있었다. 유엔이 안보리 이사국으로 중국공화국(중공)대신에 중화민국(대만)을 정한 데 대한 항의 였다. 미국이 안보리에 유엔군 파병 안건을 상정하자 말리크는 스탈린에게 안보리에 출석해서 거부권을 행사 하겠다고 전문을 보냈으나, 스탈린은 출석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이 안건은 소련의 방해 없이 무사히 통과 되어 유엔군 파견이 이루어 졌다. 


스탈린은 미국을 한국전쟁에 주력하게 하여, 소련의 유롭에서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활동을 약화 시키려고 했다.  한편 그는 인공을 미국이 침략하여 멸망 시킬 것을 우려 했다. 한국군을 과대 평가 했고 항상 미국을 두려워 했다고 한다. 그는 인공을 소련과 중공 사이에 존속시켜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그에게 김일성이 원하는 적화통일은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인공의 장기적인 존속이 소련과 공산진영을 위한 최소한의 보루 였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접 충둘울 피하기 위해서 중공의 한국전 개입을 확인하고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 했다. 그리고 인민군에게 공군과 해군의 지원을 거의 해주지 않았다. 중공이 공군지원을 강력하게 원했으나 역시 만족할 만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적화통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고 그보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전쟁을 피하는 것 우선이었다. 


1950년8월초, 남침 한달여 만에, 인공은 부산주위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지역을 점령 했다. 그러나 미국 해공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인민군의 보급로를 철저히 파괴했다. 낙동강 전투에서 싸우고 있는 인민군은 사상사를 매울 보충병, 식량, 무기 등등의 보급이 거의 단절 되었다. 인민군은 적화통일 목전에서 괴멸 되었다. 만약 스탈린이 공군과 해군을 인공에게 원조 했으면 적화통일이 가능 했을 지도 모른다. 


낙동강 전투가 시작될 무렵, 트루만 정부는 한국전쟁의 목적을 남한영토 회복으로 정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개입의 이유를 남한이 일본방어에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소련과 미국의 전쟁 목표는 인공과 한국의 유지 였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둘로 갈라진 한민족은 통일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 했으나 외세가 조정하는 국내 세력의 분열을 막을 수 없었다. 1950년, 남은 수단은 전쟁 밖에 없었다. 김일성이 소련에게 남침을 구걸 했던 만큼 이승만의 북침 의욕 또한 김일성 못지 않았다. 다만 소련은 김일성에게 강력한 군대를 만들 만한 원조를 해주었던 반면에,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무력충돌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과 일제출신 국군 장성들의 호전적인 성향을 우려 해서 군대 다운 군대를 만들 만한 군사 원조를 하지 않았다. 


이승만을 비롯한 많은 남한 사람들은 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이 개입하자 멸공통일의 호재라고 생각했다. 특히 낙동강 전투의 승리와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은 남한 주도의 남북통일이 그들 눈앞에 보였다. 


1950년 10월, 중공군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유엔군과 국군은 북진 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평안북도 일부와 함경북도 일부를 제외한 인공 전지역을 장악 해서 남북통일이 목전에 있었다. 8월의 부산 주위 지역을 제외한 인민군의 남한 점령과 닮은 꼴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 인공에 들어와 있었고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패배한 유엔군과 국군은 총 퇴각하여 다시 서울을 내 주었다. 


청천강 전투에서 미군이 밀리고 있을 때, 8군 사령관 워커는 맥아터에게 평안남도 순천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여 반격 할 것을 제안 했다. 당시의 중공군 사정을 고려 하면 승산이 있는 작전 이었다. 수십년동안의 전쟁 끝에 겨우 중국공화국이라는 나라를 건국 한지 일년 만에 외국 전쟁에 뛰어든 중공군이었다. 겨우 5일 동안의 식량과 무기를 가지고 전쟁에 뛰어 들었다. 병사 3명당 한정의 소총를 지급 할 정도 였다. 애초에 모든 보급은 현지조달을 할 작정을 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들은 전투 중에 미군의 보급창고와 무기고를 파괴하지 않았다. 노획이 목표 였기 때문이었다. 방한복이 없는 그들은 포복하고 있다가 총을 겨누고 있는 자세 그대로 얼어 죽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미군의 화력과 보급은 그들 보다 훨씬 우세 했다. 보급이 충분하지 않았던 그들은 흥남에서 철수하는 미군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통일 보다는 38이남 영토 회복에 전쟁의 목적이 있었다. 미국에게 통일은 그리 절실 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장진호 전투의 소식을 들은 미국민은 전쟁 종식을 원했다. 


전쟁 발발 일년 여 만에 인공과 한국은 전쟁 전 영토를 대강 회복 한다. 그리고 휴전 회담이 시작 되었다. 이승만은 휴전 반대와 멸공통일을 외쳤다. 휴전협정은 시작한지 2년여 만에 조인 되었다. 중공, 인공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인 미군 대표가 사인 했다. 이승만은 조인을 거부 했다. 


미국의 말을 듣지 않는 이승만은 아이젠하우어 정부의 골치 거리가 되었다. 미국은 그가 독자적으로 반공 포로를 석방하자,  만약 그가 무력으로 북침을 하면 군사 쿠테타로 그를 제거 할 계획 까지 세웠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625004004


흔히 러시아-우크래인 전쟁을 푸틴의 전쟁이라고 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전쟁을 원치 않는 데 푸틴이라는 독재자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뉴앙스가 짙은 말이다. 푸틴이 옛 소련의 영토를 회복하여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야욕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 까? 


러시아는 나라의 존망을 놓고 서방과 대립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있다. 나폴레온의 침략, 영국과의 그레트 개임, 독일의 침략은 러시아라는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는 역사적 순간 들이었다. 스탈린이 미국을 두려워 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1991년12월26일 소련최고평의회의는 모든 소련공화국의 독립을 인정 한다는 선언문을 채택 했다. 러시아 주변 국가들을 병합하여 만든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 되었다. 레닌이 만들어 스탈린이 완성한 공산주의 제국이 망 한 것이다. 


이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양강 구도로 운영 되던 세상이 공산진영의 패망으로 자유진영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자유진영의 최강 국인 미국은 세계 유일한 슈퍼 파우워로 군림 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를 채택한 전 소련 공화국들은 향후 러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미국과 유럽의 보호를 원했다. 


미국와 유럽은 허약해진 러시아를 완전히 무시하고 거침없이 소련주변 유롭 국가들을 나토에 가입 시켰다. 러시아 사람들은 미국과 나토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한다고 느끼기 시작 했다. 푸틴의 러시아는 2008년 흑해 연안의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조지아를 침공 했다. 조지아의 친미 행보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 였다. 푸틴의 승리였다. 유크래인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자 러시아는 우크레인에 무력 행사를 시작 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사는 크리미아를 2014년에 병합 했다.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는 친러성향의 반군을 지원하여 우크레인 정부군과의 분쟁을 지속적으로 초래 하고 있다가 작년 24일 유크래인을 전면적으로 침략 했다. 


러시아는 조지아와 같이 우크레인에 친러 괴뢰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전쟁의 최종 목표 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지 일년 가까이 지난 지금 러시아는 우크레인에게 고전하고 있다. 러시아는 전쟁 초기의 목적은 포기하고 돈바스와 그레미아 지역을 러시아와 병합하는 데 만족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오는 24일이면 침략 1주년이다. 한국전쟁도 1년만에 전면적인 전투는 끝나고 휴전회담이 시작 되었다. 휴전회담은 무려 2년여가 걸렸다. 중공군과 인민군이 한 편이 되고 미군, 유엔군, 국군이 한편이 되어 실질적인 영토의 획장 없는 전투는 그 동안에 계속 되었다. 양측에 속절없는 사상자만 속출 했다. 스탈린이 사망(1953년3월5일) 한 후에야 휴전협정(1953년7눨27일)이 맺어 졌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우크레인에 군사원조를 해주고 있지만, 유롭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없이는 살 수가 없고 우크레인이 전투기, 탱크, 미사일 없이는 러시아를 이길 수가 없다. 러시아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우크레인은 없다. 그러나 서방의 핵무기는 러시아를 겨누고 있다. 양측의 세력균형은 팽팽 하다. 


우크레인 대통령 젤렌스키는 한치의 영토도 양보할 수 없다고 하며 전쟁의 최종 목표를 크리미아와 돈바스 지역을 되찾는 것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까지 그를 돕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남북통일을 위해서 중공군과 싸우지 않은 것과 똑 같은 이치이다. 


현재 미국과 유롭이 탱크를 원조 해주고 전투기를 만지작 거리는 이유는 휴전회담이 시작 되면 우크레인이 유리한 입장에서 회담에 임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짐작 해 본다. 푸틴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정권의 몰락을 예측하는 뉴스가 들리기도 한다. 스탈린의 죽음이 한국전쟁을 잠정적으로 끝냈던 것 처럼 푸틴의 죽거나 권좌에서 물러 나야 유크래인 전쟁이 끝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젤렌스키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이승만이 휴전동안 북진통일을 외치며 휴전을 반대 했던 것 처럼 젤렌스키도 그럴 가능 성이 높다. 그러나 푸틴이 합당한 조건을 제시하고 휴전회담을 원하면 젤렌스키가 뭐러고 하던 미국과 유롭연합은 젤렌스키에게 압력을 넣어 휴전회담에 임하게 할 것이다. 다행히 젤렌스키의 국민적인 지지는 이승만 보다 훨신 높다. 


한국이 국민의 소망과는 반대로 분단국가가 된것처럼 우크레인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동서로 나누어진 우크레인은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 처럼 강대국들의 완충지대 역활을 하게 될것이다. 인공이 러시아 그리고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친미 국가인 한국과의 완충지대 역활을 하고 있는 것 처럼, 우크레인의 돈바스와 크리미아 지역은 나토와 러시아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러면 우크레인은 한국에 이어 두번째의 강대국의 국익을 위한 분단국가가 될것이다. 


수십년이 지나면, 미국사람들은 우크레인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언제 한 나라가 될 것이냐" "왜 너희들끼리

싸우느 냐"고 물을 것이다. 미국에 사는 한국 교포들이 미국사람들에게 자주 듣 는 질문 처럼.  이것이 강대국 사이에 낀 지정학적 위치를 가진 약소국의 운명인 것일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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