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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앨리스 Aug 30. 2024

너 뭐 좀 안 됐음 어때요

평범한 위인전, 만들고 싶어요

"앨리스야, 그래도 살면서 뭐가 되었든 한두가지쯤은 너에게 업적이라고 말할 만한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출산을 한 것도 아니고, 커리어적으로 뭔가를 쌓은 것도 아니고...

살다가 아주 나중에,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너만의 뭔가는 해야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지인과 만나 대화하다 나온 얘기다.

제목이 이러니까 혹시라도 이 글의 결론이 아, 그 지인의 말은 틀렸다. 나는 그냥 안하고 살거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거 아니예요.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럴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를 잘 모르고, 나를 아껴주지도 않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너가 뭔데, 라고 발끈했을 수도 있지만

오래 보고, 오랫동안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던 지인이 해준 말이라 고마웠다.

요즘같은 시대에 바쁜 시간에 생각해서 말을 해줘봐야 손해 안 보면 다행인데도 이런 얘길 해주는 사람이 나한테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맞는 말이다. 나는 가정을 이룬 것도 아니고, 나의 자손을 키운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커리어적으로 정점을 찍거나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기부나 봉사활동으로 소외계층에게 도움을 준 것도 아니다. 나의 사회적 가치는 냉정하게 거의 0에 수렴한다. (사회적 가치만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백수는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살면서 내가 뭔가를 이뤘다는 것이 꼭 사회적으로 아주 가치로운 일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에게 그 뭔가, 뭔가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다 늙어서 생을 돌아봤을 때, 아이고 나는 일찍 은퇴해서 잘먹고 잘 살았지...생각하면 마냥 뿌듯하고 행복할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란 사람에게 인생의 업적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꼬꼬마 시절 나는 학교 방송반이었다. 매일 아침 등굣길에 30분정도 음악과 함께 아침방송을 준비해야 했고 때로는 퇴굣길 방송도 준비해야 했다. 음악도 준비하지만 가장 큰 일은 대본을 쓰는 일이었다. 아무리 길지 않더라도 매일같이 30분의 방송분을 준비하려면 많은 소재거리가 필요했다. 초등학교 방송의 소재란 한정적이다. 뉴스나 시사는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연예계 소식도 안 된다. 건전하고 교육적인 것만 가능한데 그렇다고 너무 재미없어서도 안 됐다. 교장 교감선생님이 들어서 검열당할 내용이 아닌 가장 확실한 소재는 "위인전기"였다. 하도 많이 쓰다보니 그때 나는 위인전 한 세트를 순서까지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었다. 그분들은 한분도 빠짐없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발자국을 남긴 정말로 "대~~~단한" 분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꼭 그걸 의식적으로 생각하며 산 건 아닌데 나는 어릴때부터 엄청나게 바쁘게 살았다. 뭔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육상을 해서 체전에 나가고, 매일 방과후 클럽활동을 한시간 반씩 하며 뛰고(동적인 거였지만 자세한 건 생략), 방송반을 했고, 학급간부도 했고, 공부도 제법 했다. 그런 생활 패턴은 대학교에서도 이어졌다. 학생으로서 성과의 가장 확실한 지표는 성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활의 모든 리듬을 학업성적에 맞췄다. 대학생일 때는 내가 그래도 '나름' 지성인이니까, (비웃어도 좋다. 그때 그렇게 생각한 게 사실이니까) 거기에 맞는 활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고, 꾸준히 봉사활동도 했고 아르바이트 개념의 경제활동도 했다. 그러면서 동아리 활동도 세 개나 했다. 요즘 말로 갓생 살았던 것 같다. 주말에도 봉사다니느라 쉬지 못했으니까. 그러면서 뭔가 희미하지만 생각했다. 나는 그래도 세상에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뭘 하더라도 남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아 마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말이다. 


 물론 그런 생각은 졸업 후 긴 무소속 생활과 수험생 기간을 거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회사원"이라는 신분에 정착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그렇다. 부끄럽게도 나는 꿈도 야무진 아이였다. 회사생활에 10년 넘게 쩌들면서 조직과 사회에 환멸도 느껴봤고 상처도 당연히 받았다. 그만둘 때 이놈의 지긋지긋하고 구질스런 월급노예신분에서 벗어나 너무나도 통쾌했다. 


 무소속 백수가 된 지 거의 1년이 되어가는 지금 시점엔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백수가 된 후에 누리는 기쁨은 생각보다 좋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 블라인드를 걷으며 하늘을 본다. 창문을 열고 오늘은 온도와 습도가 어떤지 천천히 만끽한다.  그 순간의 기쁨은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궂은 날씨에 쾌적한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매일 겪어도 매번 짜릿해. 새로워. ㅋㅋ 하지만! 그 와중에 생각한다. 이런 기쁨과 행복한 순간을 못 누리고 매일같이 같은 자리에 출근해서 고된 시간을 보내고 퇴근해 가정생활을 유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정말 노예이기만 한 걸까. 그저 나사못처럼 볼트와 너트처럼 아주 큰 기계에 작은 부품 역할을 하며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을 포기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노예라고 보는 게 맞나?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뼈를 깎고 희생하며 버티는 사람들은 정말로 대단한 존재들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 이후로, 나는 출근하는 차들을 볼 때 예전같은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나쁜 것은,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홀대도, 건강악화도, 행복한 시간의 희생도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막대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혹은 관리자들이었다. 나에게 만약 자식이 있었다면 내가 위인전기를 만들어서 읽히고 싶다. "이순신" 도 위대하고 "유재석" 님도 위대하다. 하지만, 진짜 위대한 존재들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알려줄 것 같다. 이를테면 35년동안 한 회사에서 일한 옆집 아저씨 이야기. 충청도 어디쯤 사시는 오토바이 타는 싱글할머니 이야기. 소년원 출신의 빵만드는 청년 이야기. 귀촌해서 농사를 짓지만 매번 실패 중인 부부 이야기 같은.  그런 책은 어디 안 파나? 사실은 나한테 필요한 책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난 아직 뭐도 안 됐고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뭐도 아닌 사람 1이지만 그래도 조금 덜 불친절하고 아주 가끔은 그래도 주변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위로와 축하를 전할 수 있는 그냥 인간 1이 되고 싶단 거다. 

그것보다 더 큰 뭐, 인생의 업적, 그것은 아직은 먼 이야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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