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 위의 앨리스 Oct 01. 2024

퇴사 1주년의 소회


 10월이 되었다. 바로 작년 딱 이맘때부터 회사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실제 퇴사일은 좀 차이가 있지만 지나고 보니 퇴사 후 3개월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새 집에 이사했고, 시간이 많아졌으며, 날씨가 좋았고 주위에 큰 문제가 없었다. 살면서 그런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딱 그럴 때 미친듯이 여행을 다녔던 건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퇴사 후 1년. 지인들은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갔느냐고 말하지만 나는 되게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백수가 뭔 일이 많았겠냐 하지만 되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루하루 쳇바퀴 굴러가던 삶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다.

무엇보다 확실히 회사 다닐 때보다는 내적으로 단단해진 것 같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든 흔들리지 않는 걸 느낀다. 직장인일 땐 그렇지 못했다.  


경제적으로는 운이 좋게도 잔고의 변동이 없었다. 새 집에 필요한 것들이 있어 지출도 많았고, 여행을 다니며 쓰기도 많이 썼는데, 이래저래 잘 방어했다. 이것도 심리적으로 흔들림없이 지낼 수 있던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운이 좋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늘 그렇지는 않을테니 앞으로의 대비가 필요하다.


 퇴사를 후회해본 적 있느냐는 질문이 온다면 단연코 아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하겠다. 1년동안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회사를 다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도 아니고, 오히려 회사에서 받는 긍정적인 부분(월급, 사회적 소속 등)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더 많았을 것 같다. 친한 동료들은 퇴사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회사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아마 내가 회사를 계속 다녔더라면 1년 전과 별로 크게 변함없는 일상을 살고 있었겠지. 그만큼의 소득을 올리지는 못하지만 회사에 다니며 소모할 에너지의 훨씬 더 적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경제활동을 하고 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남은 시간과 에너지로 내가 하고싶은 것들에 투자할 수 있어서 삶의 질은 훨씬 올라갔다. 


 삶의 질이 좋으면 생각도 바뀐다.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여유가 좀더 나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그 전에는 쉽게 짜증날 일도 크게 개의치 않게 된다. 부정적인 주변인의 언행에 전 같으면 스트레스를 받거나 발작버튼이 눌렸을 수 있는데 지금은 좀 편안해졌다. 저 사람이 왜 그런가를 생각은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례한 사람은 그 사람의 문제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일상 면에서나 감정적 면에서나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시간의 여유는 경제적 여유만큼이나 많은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직장인일 때 가장 로망이 바로 아침이나 오전에 커피타임을 가지며 여유를 부려보는 거였다. 회사에 있을 때 지쳐있던 날이면 "조퇴할까?" 백번 넘게 생각하며 온갖 소음과 커피냄새로 가득 찬 어느 카페에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그게 그렇게 간절했다. 사람, 일, 상황에 치이다보면 정말 많이 지친다. 지금은 고요한 시간을 즐긴다. 집에 혼자 있으면 고요한 정적이 있는 시간. 아직은 지루해본 적이 없다. 1년동안 5개 나라에서 짧게는 4일 길게는 1달 가까이 여행했다. 타일공으로 이민와서 누구보다 돈을 많이 버는 20대 초반 아가씨도 만났고,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돈은 덜 벌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여행지만 다니며 가이드하는 전직 전문직 아저씨도 만났다. 낯선 풍경은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한다. 회사원일 때 만났던 사람들과 다른 배경 다른 삶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는데 항상 단일 레일만 달리는 지하철 같았다면 지금은 비행기 타고 다니는 느낌이다. 시선이, 마인드가 자유로워졌다. 또 타국에 있는 조카도 달려가 안아보고, 엄마와 긴 여행도 많이 했다. 나중을 생각하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백수라서 뭔가 위축된 적은 없다. 이건 은퇴자들마다 좀 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 없다. 비혼자들에게 사람들이 결혼 안 하냐고 묻는 것과 같은데 백수라고 하면 다들 그냥 인사처럼 물어본다. 앞으로 뭐해먹고 살 거냐고. 예전 같음 되게 거슬려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세끼 밥 한끼로 줄이고 살면 잘 살아진다고 대답하면 사람들도 크게 나의 삶에 관심 없다. 해외 입국심사 할 때도 리타이어 했다고 말하면 골방 끌고가서 심문할 줄 알았는데 그런 적 없다. 있는 그대로 잘 대답하면 오히려 즐거운 여행 되라며 도장 쾅 찍어주더라. 얼마 전 유기견 임시보호를 신청했는데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썼다. 부자는 아니지만 사료나 병원값 낼 정도 여유 되니 걱정마시라고 했더니 바로 통과되었다. 퇴사 전 신용카드를 서둘러 갱신하라는 글을 읽었던 것 같은데 작년도 소득이 반영되어 그런지 24년도에 만료가 몰려있던 내 카드는 알아서 갱신되어 배달되었다. 


 얼마 전 집에 들인 견생 3개월차 하숙멍멍이가 아침일찍 일어나라고 삑삑이 공을 침대 주변에 잔뜩 물어놓고 삑삑거리면 반강제로 일어나 이닦고 산책가방 챙겨서 노예처럼 밖으로 나가게 된다. 월급노예에서 벗어난 지 지1년만에 또 개린이의 산책노예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아침마다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눈처럼 내리는 흰털을 열심히 청소하다보니 집은 더 깨끗해졌으며 쉬아와 응가패드를 치우느라 쓰레기도 더 자주 갖다 버리게 됐다. 털쟁이 네발짐승 친구의 보들한 털과 체온을 다리에 느끼며 즐기는 낮잠은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이것도 퇴사 전이라면 불가능했을 일상이다. 


 매 분 매 순간마다 행복한 건 아니었지만 1년, 꽤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앞으로의 1년은 좀더 알차고 활기차게 보내볼 생각이다. 40초반인 내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적지도 않다. 하지만 앞으로의 시간 중 가장 젊은 때다. 순서 없이 예고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자연의 숙명이다. 뭐든 할 수 있을 때 하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살 것이다. 맘에 들지 않는 일상을, 감정을 안고 그저 감내하며 습관처럼 살아내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우니까. 바람이 제법 시원해졌다. 창문을 열고 향기도 맡고 바깥소리도 들으며 커피한잔 들고 글이나 끄적이는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하고 행복하다. 

이전 17화 10개월차 백수의 소비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