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오래 달리기

태어나 처음으로 쉬지 않고 달린 날의 기록

by 제이앤

나는 지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젖었다. 운동을 끝나고 바로 씻으려다 지금 이 감격이 씻고 난 후에도 여전할까? 고민하면서 노트북을 열었다. 고민이 든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것이라 여기는 편이라 바로 움직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이 전에 썼던 것처럼, 나는 오래 달리기는 젬병인 사람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성적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부 꽤나 하는 사람이고 싶었던 학생이었음에도 오래 달리기만큼은 '차라리 F를 주십시오!'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니고서야 일생에 가닿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사실 난 단거리로는 언제나 1등이었다. 전교에서 각 반 1등끼리 달려서 가장 빠른 주자를 뽑을 때 처음으로 2등을 했다. 줄넘기로는 시범단이었고 힘으로는 제 덩치보다 훨씬 큰 상대도 쉽게 이겼다. 하지만 오래 달리기만큼은 초등학생 때부터 해낸 적이 없다. 단거리와 달리 내 앞으로 달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것 같았고, 경쟁심에 속도를 내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기분. 그럼 나는 곧장 주저앉아 운동장에 누워버리고 마는 것이다. 속도를 내며 달리는 내게 (학창 시절 유일하게 촌지를 요구한) 담임선생님의 "쟤 봐라, 촌년 달리기 한다."는 목소리가 손가락질과 함께 어린 마음에 창처럼 꽂히던 기억이 불현듯 지금 올라온다. 그래, 그게 첫 '오래 달리기'였다. 지금은 오랜만에 떠오른 기억이지만 아마 난 꽤 며칠 그 말을 가슴에 꽂고 다녔을 것이다. 뽑아다 버린 것 같은데, 통증은 사라졌더라도 흔적은 남아있나 보다.


그것 때문에 오래 달리기를 못하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나는 술래잡기에서도 시간이 오래 걸리면 제 발로 술래를 찾아가 잡아달라고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것은 며칠 밤을 새도 놓지 않는 끈기도 있는데, 왜 내겐 오래 달리기가 쥐약이 되었을까.


어쨌든 시작은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서'였다. 하고 싶은 일이 많으니 바쁘게 움직인다. 와중에 애들 교육도 내가 직접 시키고 싶다. 기왕 시킬 거 학원보다 더 잘 가르치고 싶다. 꿈은 이렇게 욕망이 되고 욕심이 되었나 보다. 체력은 한정적인데 일이 늘어나다 보니 감정이 삐죽삐죽 올라왔다. 사포같이 변하는 내 모습이 싫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내 마음의 문제'인 것 같다. 하나를 하고 있으면서 다른 대여섯 가지를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많으니 하는 일이 많고, 그러다 보니 마음의 여유부터 바닥이 났다.


애초에 내 마음의 여분이 얕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인내심이 좋은 편이 아닌 건 나도 알고 내 주위 모든 사람들도 안다. 부끄럽다. 마음의 여유는 어디서 올까? 생각해 보니 일단 체력이 떨어지면 브레이크가 고장 나는 것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꿈이 많아서, 행복하고 싶어서, 체력을 길러야 했다.


체력을 기르는데 좋은 운동이 뭘까 생각해 봤다. 마침 내가 발 담그고 있는 단톡방 사람들은 다 러닝을 시작했다. 아니지. 원래 모두 러닝을 하고 있었는데 내 눈에 그제야 들어온 것이다. 러닝을 하면 튼튼해진다고 한다. 체력이 길러진다고 한다. 다하고 나서 뿌듯함이 크다고 한다. '아, 그렇군. 그렇담 나는 다른 운동을 해야겠군. '하고 그동안 넘겼는데, 나도 몇 분만이라도 해볼까?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뛰는 영상을 보니 그렇게 활기차 보일 수가 없었다. 저 활기. 나도 있었는데. 어디에 꽁꽁 처박아뒀더라?


그래, 까짓 거 해보자. 해보고 싫어지면 포기하지 뭐.

러닝 입문을 도와준다는 어플을 깔았다. 30분 달리기를 목표로 하는 초보 코스를 들어갔다. 시작할 때 5분을 걷고 난 후, 1분을 뛰고 1분 30초를 걷는 것을 반복한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AI코칭의 목소리는 지침이 없었다. 아주 잘하고 있다며 칭찬만 해준다. 내가 달리지 않아도 녹음된 칭찬은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신기하게도 약간의 힘이 되었다. 28분가량의 운동을 끝내고 인증샷을 올리니 실재하는 단톡방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가 쏟아졌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격려해 줄 수 있을까? 아니, 기계 뒤에 가려서 할 수 있는 것들인가? 어쨌든 지금 나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됐다. AI코치는 내일 달리기를 하지 말라고 한다. 몸에 충격이 많이 가는 운동이니, 꼭 하루씩 건너뛰라고 했다. 그래서 다음날 약간의 가고 싶은 마음을 가볍게 눌렀다. 그렇게 주 3회 달리기에 4주 차에 들어섰다.


달리는 중에 갑자기 오른쪽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진다. 식은땀이 나지만 운동을 멈추면 안 될 것 같아 억지로 뛰었다. 아니. 도저히 안될 것 같아. 남은 10분은 그냥 걸었다. 이틀 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배가 아플까 봐 무서워 뛰기가 겁이 났다. 어쩌지?


고민하다 단톡방에 글을 썼다. 배가 너무 아파서 뛰기가 무서워졌다고. 돌아오는 답변은 합창처럼 같은 말이 올라왔다. "그냥 견디세요. 한 번은 겪어야 해요. 그리고 걷(다) 뛰(다)하지 말고 천천히 3Km만이라도 쭉 뛰어보세요."


그리고 그 3Km를 뛰어야지 마음먹은 날은 토요일 저녁, 바로 오늘이 되었다. 평일에 뛰다가 포기하거나 배가 아프면 왠지 더 러닝이 싫어질 것 같았다. 사실 비논리적으로 그냥, 오늘 밤으로 마음먹었다.


가기 전 나한테 있는 가장 달리기 편한 옷들로 갈아입었다. 마치 마라톤 대회를 나가는 사람처럼. 워치를 챙기고, 에어팟을 집어넣으며 "나 3Km 정말 뛸 수 있을까? 못 뛰면 어떡하지? "를 열 번은 외치고 비장하게 문을 나섰다.




뛰다가 너무 재미없어지면 넷플릭스라도 틀어놓고 생각 없이 다리만 움직여야지, 하는 생각에 패드도 챙겼다. 나이키 런 어플을 켜서 거리 목표를 3km로 설정했다. 목표달성했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달려야지. 30분 이상 걸릴 각오 해야지.


원래 걷뛰를 할 때 러닝머신 속도를 7.5Km에 맞춰놓고 뛴다. 하지만 걷기를 못하니 7Km로 맞췄다. 온갖 기계에 할 수 있는 세팅은 다 해본다. 누가 보면 인생 마지막 달리기 이거나, 올림픽이라도 나온 것 같을 것이다. 하지만 비웃지 마시라. 오늘의 쉬지 않고 '온전한 오래 달리기'는 내 인생의 시작이 될 수도, 한동안 없을 달리기가 될 수도 있다. 중도 포기할 나를 달래줄 마음까지 먹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내겐 엄청난 일이었다.


10분이 되는 데 한참 걸렸다. 시간은 어찌나 느리게 가는지. 12분이 되는데 왜 난 40분이 지난 것 같은지. 시간은 어째서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제멋대로 흐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느새 2Km를 넘었단다. 1Km만 타면 되겠지. 한 8분 걸리려나?


자세에 집중하며 달렸다. 엉덩이를 뒤로 빼지 않고, 팔을 가볍게 흔들며, 상체를 수직으로. AI코치가 알려주던 방법을 상기하며 달리다 보니 드디어 "목표를 달성했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왔다.


야호! 내가 해냈다! 그런데...

아직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음... 1Km만 더 달려보자!

그렇게 나의 온전한 달리기는 조금 더 이어졌다. 달리면서 나도 나 스스로에게 놀랐다. 3Km만 되면 신나서 곧장 기계를 끄고 집에 와서 성공했노라 떠벌릴 줄 알았다. 내가 더 달리고 싶어 할 줄이야? 40년이 다 되어가도 나도 나를 여전히 모른다.


4km가 되었고, 나는 인증용 캡처를 한 뒤, 쿨다운 버튼을 눌렀다. 정말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땀 흘리는 걸 너무 싫어하는 나인데, 지금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서있다. 내가 해냈다. 내가 해냈다. 해냈다, 내가!


끝나고 나오니 올 때 내리던 가랑비가 굵어졌다. 짧은 거리지만 무시하고 맞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살짝 뛰었다. 난 '온전한 오래 달리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아! 이대로 비를 맞으며 계속 뛰고 싶다!는 마음이 불처럼 올라온다. 하지만 이번엔 마음을 따를 수 없었다. 시간이 늦었다. 푹 쉬어야지. 그리고 월요일 아침, 또 4Km를 달려야지, 내가.



흠뻑 젖은 운동복이 추워서 벗어두었다. 이제 씻으러 가야 한다. 이렇게 내 마음을 저장하려고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난 이미 글을 다 썼다. 뿌듯하고 뿌듯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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