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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인 Mar 02. 2024

눈이 내리는 홀리함과 언홀리함 I

 


 집을 필요로 할 때 여행을 떠나곤 했다. 내게 집은 언제나 여행에서 있었고, 그것은 여행 속에서만 있는 것이라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집이란 건 도착의 시간을 필요로 하니까. 어딘가에 도착해서 머무르고, 쉬고, 이야기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는 집과 같은 안도감이 있었다.


          

 나의 ‘원래 집’에서의 시간들이란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왠지 어서 출발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고 적당한 때가 언제일지 꼽으면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유리들이 날카롭게 깨지고, 누군가 갑자기 나가거나 들어오고, 누군가는 평생을 걸고 사력을 다해 무기력해져야 지탱되는 공간.


          

 언젠가 지인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누움’이란 단어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고 했고, 나는 그녀가 집 안에서 정말 바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듣자마자 깊이 동감했다. 그곳에서 나의 가족들이 대개 한 일이란 재빨리 떠나는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엄마는 내가 서러운 하루를 보냈거나, 오랜만에 본가에 왔거나, 방 안에서 그녀가 퇴근할 때만을 기다렸거나에 상관없이, 내가 식사를 하려고 맞은편에 앉으면 재빨리 설거지를 하러 자리를 떴다. 아빠는 한창 내 장난들을 받아주다가도, 누군가 부르면 단숨에 고개를 돌리곤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은 어느 정도 성인의 꼴을 갖추자마자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 애인에게로 떠날 채비를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다행이었게도 이내 돌아왔다. 그러니 나 역시도 내게 하나뿐인 제도상의 집에 거주해 오는 동안 어딘가로의 출발을 욕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떠남’으로만 이루어진 공간을 떠나기 위해서.


          

 한 번은 로키산맥을 마을의 한쪽 벽처럼 두고 있는 포트콜린스에 머물렀다. 내가 있었던 집은 아이들로 하여금 직접 집 앞의 눈을 치우게 하는 곳이었는데, 처음엔 그 장면에 놀랐다. 우선 한국이었다면 그런 폭설을 열 살이 갓 넘었을 뿐인 두 아이들에게 다루도록 하지 않을 것이었다. 좀 걱정스런 마음으로 거실에서 한동안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이내 깊은 안락감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눈을 치우다 넘어지고, 또 나를 향해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아이들은 내가 이곳에서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디선가 엄마와 다른 가족이 지켜봐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많은, 온 마을을 뒤덮은 폭설이 순전히 자기들끼리 외롭게 책임져야 할 몫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위태로워 보이는 날씨 속에서도 편안하게 치운다.’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는 혼자 제주에 갔다. 공항 근처 도로에서는 그곳이 한국이 아니라, 무법적이기로 소문난 어느 해외 여행지인 것처럼 차들이 질주했고 여간해서 신호를 잘 지키지 않았다. 공업용 트럭과 택시가 주를 이뤘고 이따금 허니문카 같은 관광객들의 차가 지나다녔다.


         

 보행 신호에 내가 길을 건너려고 하면 눈치를 봐서 조금씩 다가오거나, 차와 부딪히지 않을 만큼의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의 등 뒤로 쌩하고 출발해 버려서 꽤나 서슬 퍼런 인상을 받았다. 오싹해진 마음은 홀로인 여정에서 외로움으로 변모했다.



( 2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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