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인 Oct 17. 2021

이름 없는 하루가 모여 봄이 되었다

23주 2일생을 낳았다

2021년 3월 14일  재태주수 32주 생후 64일


일요일인지 월요일인지 평일인지 주말인지 생일인지 딱히 모르겠다. 이날이 어떤 날인지 모른 채 시간이 흐르고, 그렇게 이름 없는 하루가 모여 봄이 되었다.


최고급 기계에 의존하고도 호흡이 불안정했던 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점점 안정을 취하고 있다. 찍어온 영상에서 처음으로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기관삽관을 오래 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울 수 있는지 몰랐는데 꼬물꼬물 자기 할 일을 한다는 게 신기하다. 동네병원, 대학병원 주치의 선생님과 교수님. 고비고비마다 순서대로 아기가 더 이상 사는 걸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 의사 선생님들을 비웃듯이 살아내고 있다. 대단하다. 그 덕분에 나도 힘을 내서 집에서 다시 요리도 하고 혹시나 처분하게 되면 감당하지 못할까 봐 사지 못했던 아기용품들을 하나씩 사고 집 정리를 하느라 좀 바빴다. 그리고 날씨도 따뜻해지고 산후조리도 얼추 된 것 같아서 밖으로 나가 공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엄마랑 갈비도 사 먹고 핫초코도 사마셨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내가 안정적으로 집안일을 시작하고 기운을 내자 남편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 모든 건 버티고 있는 아기 덕분이다.


주변에서 신생아용품에 절대 돈 많이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놔서 당근을 하기 시작했다. 산책 겸 동네 돌아다니면서 저렴하게 물건 사고 다니니 뭔가 할 일이 생겨서 좀 나았다.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몰라서 최대한 돈을 아끼고 있다.




2021년 3월 22일  재태주수 33주 생후 72일


오늘 기관삽관을 고 양압기로 바꾸는 걸 시도해보는 날이다. 그새 애기 목구멍이 커져서 태어날 때 넣었던 산소관이 작아졌는데, 어차피 관 교체해야 하니까 한번 직접 관을 넣는 게 아닌 코로 산소를 넣는 걸로 시도해본다고 했다. 그런데 오후가 되어 사진 찍을 겸 가서 물어보니 어젯밤과 오전에 호흡이 불안정해서 발관을 안 하기로 했다고 한다. 호흡기를 뺏다가도 애기가 적응하기 어려워서 다시 삽관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해서 쉬운 일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지만 시도도 못한 것이 실망스럽다. 그래도 그전에는 우려스러운 부분이 스무 가지는 되었었는데, 이제는 눈, 동맥관개존증, 혈전, 흉터의 균 정도로 몇 가지밖에 없다.


남편은 저번 주 금요일부터 아프더니 계속 아프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회복되어가고 있는데 남편은 일하느라 스트레스가 축적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아기가 안정세로 돌아서니 그동안 밀려있던 긴장이 풀려서 더 아픈 것 같다. 따로 시간 내서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야근, 밤샘도 많은 직업이라 이 와중에 먹여 살리겠다고 일해주는 게 고맙게 느껴진다. 그나마 재택근무인 게 운이 좋았다.




2021년 3월 24일  재태주수 33주 생후 74일


오늘은 아기 면회 날! 아기가 누워있는 인큐베이터로 갔는데 어머나! 아기가 양압기를 하고 있었다. 저번에 발관하지 못한걸 오늘 처음 시도해봤다고 한다. 처음이라 그런지 아기가 호흡을 엄청 힘들게 하고 있었다. 기관삽관은 관을 입을 통해서 넣는 거라 얼굴이 잘 보였는데, 양압기는 코에 강한 압력으로 기구를 압박해야 해서 얼굴 전체에 띠를 두른다. 그래서 얼굴이 팅팅 붓고 가면을 쓴 것처럼 잘 안 보이는 점은 좀 아쉬웠다. 그 사이에 엄청 통통해져서 살가죽 같은 부분이 이제 다 살로 채워졌다. 점점 미니 인간에서 아기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면회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괜히 기분이 좋아 지하철 역사 안을 구경하고 집에 왔다. 진짜 봄이다. 봄볕이 추위와 함께 죽음의 그림자도 모두 걷어낸 것 같다.

이전 17화 우리 둘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