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인 Oct 18. 2021

액막이

23주 2일생을 낳았다

2021년 3월 28일  재태주수 34주 생후 78일


재태주수 34주. 폐포가 생성되는 시기다. 양압기로 바꾸고 오히려 기관삽관 때보다 더 안정적으로 지낸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 남편과 춤을 췄다. 아기가 힘들어하면 바로 다시 기관삽관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하셨었는데 첫 시도에 벌써 4일째 잘하고 있다.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처럼 지내고 있는 건가?

지난 일주일 동안 끙끙 앓던 남편은 병이 나았다. 주치의 선생님이 아기가 너무 잘 지내서 이제 인큐베이터 관도 열 수 있다고 하셨다. 이렇게 좋아지다가는 원래 태어나기로 했던 5월에 집에 올 수도 있겠다. 어서 와~


몸이 회복됐는지 집에서 가만히 있기 답답하다. 사람들 안 만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가 예전부터 배워보고 싶던 민화 화실을 가보기로 했다. 내가 처음 고른 그림은 "호랑이와 까치"이다. 새해는 좀 지났지만 우리 집은 지금 액막이가 절실하니 새해 액막이 그림으로 유명한 호랑이와 까치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선생님이 꽃보다 쉬워서 초보자가 그리는 게 가능하다고 해서 고른 것도 사실이지만.. 화실에 들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단순하게 손을 놀리는 것에 집중을 하니 시간이 그나마 가치 있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림의 가장 큰 장점은 지금 내가 한 행동의 결과가 눈에 바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림이 완성되면 집안에 걸어두고 모든 액운을 쫓아낼 거다. 우리 집은 지금 복과 액막이가 절실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일곱 살짜리 조카도 보고 싶은데 자주 볼 명분이 없어서 괜히 영어를 가르쳐준다고 과외를 하기로 했다. 아기가 퇴원하기 전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조카랑 놀 생각이다. 그래도 나름 제대로 해보겠다고 유아 영어교재도 찾아보고 교습법도 찾아보다가 엄마들의 교육열에 좀 많이 놀랐다. 그런데 그들의 성공사례도 꽤나 그럴듯해서 (우리 애는 지금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아기를 어떤 유치원에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영어유치원이 월 200만 원이라는 소식에 고민은 금방 끝났다.


조카는 코로나라 어디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유치원과 집만 오가는 지루한 일상 속에 일주일에 하루 고모네 가는 게 꽤 즐거운 것 같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면서 제일 두려운 부분이 '억지로 했다가 질리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가 하기 싫어하면 진도를 안 나가고 놀이를 했다. 돈 받고 하는 과외면 부모의 니즈를 채워주기 위해 억지로 진도를 나갔겠지만 그런 압박이 없어서 나도 조카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2021년 4월 1일  재태주수 35주 생후 82일


오늘 만우절인데 사진을 찍으러 가보니 거짓말처럼 아기가 약한 양압기로 바꿔서 지내고 있었다. 이전 양압기로 얼굴을 압박해서 퉁퉁 부었던 얼굴은 부기가 바로 쏙 빠져있었다. 집에 빨리 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인큐베이터 관도 열었다. 스스로 체온조절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진짜 집에 빨리 올 수 있을 것 같다.




2021년 4월 7일  재태주수 35주 생후 88일


오늘 면회를 다녀왔다. 오늘 면회 때 처음 안아봤는데 너무 가벼웠다. 1.8kg이면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 무게 정도밖에 안된다. 너무 작아서 껴안듯이 안는 것도 아니고 물건을 들듯 두 손바닥으로 들어도 들린다. 장이 좀 꼬여서 금식한 지 5일이 되었다. 이러다가 응급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이 흔들린다. 폐가 안 좋을 때는 호흡을 도와주는 기계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좋아진다는 생각에 좀 의연할 수 있었는데 장이 나빠 또 수술하게 되는 건 너무 두렵다. 아기를 위해서 내 인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생긴다. 꽤 오랫동안 마음이 괜찮았었는데 다시 무너진다. 마지막 관문인 것 같아. 힘내.




2021년 4월 10일  재태주수 36주 생후 91일


장이 여전히 문제다. 아무래도 수술을 또 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도 나지만 남편이 감정이 주체가 안된다. 서로 대화를 안 한 지 이틀째다. 모든 것이 고갈된 느낌이다.


그래도 나는 아기가 버티는 이상 나도 버틸 생각이다. 나라도 무너지지 말고 버텨야 위기의 순간에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힘내 아가야.

이전 18화 이름 없는 하루가 모여 봄이 되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