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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Dec 27. 2023

세심한 건강검진센터 UX

저녁형 인간에게는 오후 건강 검진이 좋다.

급하게 생겨버린 다른 일정으로 예약된 건강 검진 일정을 바꾸어야 했다. 가능한 일정이 오후 밖에 없어서 오후에 건강 검진을 받게 되었다.

오후 검진 예약을 하려니 여러 가지 걱정거리들이 생겼다. 오후 1시까지 물을 못 먹는데 괜찮을까? 아침도 점심도 안 먹고 1시까지 있으면, 내가 그 굶주림을 견딜 수 있을까?

예약 변경을 해주는 담당자가 오후에는 대기 인원이 없어서 일사천리로 기다림 없이 빠르게 진행가능하다고 했다.

여러 가지 걱정과 다르게 오후 검진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첫 번째는 금식하는 시간, 오전 검진이면 전달 저녁 9시 이후에 금식해야 한다.

오후 검진은 밤 12시부터 금식하니까 나의 야식 생활 패턴과도 잘 맞았다.

아침형 인간이 아닌 나에게 오후 검진은 좀 더 정신이 똑바른 상태로 검진을 받게 된다.

그토록 하기 싫은 몇 가지 검진은 순서가 올 때까지 내심 스트레스였는데…

‘뭐 매년 하는 건데..’라며 처음으로 불안감이 사라졌다.

오후에 검진을 하니, 아침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인다.

검진의 두려움과 스트레스로 온 사람들을 위한 섬세한 UX가 느껴졌다.

건진 센터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돌멩이들이 깔린 흐르지 않는 고여 있는 맑은 물이 가장 먼저 보인다. 너무나 평화롭다.

진짜 물인가? 고여있는 물이 이렇게 맑으려면, 매번 잘 갈아줘야 할 텐데 라는 쓸데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전이면 정신없이 움직이던 간호사 선생님들, 한 번도 본 적 없는 간호사 분들이 몇 명이 모여 약간의 수다 소리도 들린다.

3개의 층을 오가며 검진을 해야 하는 건진 센터였다. 계단은 천으로 만들어져, 뽀송하고 걸을 때 소리도 나지 않는다. 겨울이라 더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진다.

계단을 내려오며 여기가 건강 검진 센터가 아니고, 잘 사는 누군가의 집이라면, 이 계단을 내려가며 “아줌마”라고, 일하는 분을 부를 것 같은 분위기다.

찐부자라면 이곳을 건강 검진센터로 만드는 게 아니라, 3개의 층을 모두 사용하는 집으로 내려가며 올라가며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며, 아줌마를 불러 대는 라이프를 누리겠구나!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또 해본다.


40층에 위치한 이 검진 센터에 겨울에만 왔다. 40층에서 바라본 뷰는 그래서 언제나 겨울이었다. 높은 아파트 빌딩과, 얼어붙은 호수, 언제나 이곳에서 내가 기억하는 풍경은 겨울이다.

건강 검진은 미루고 미뤄, 연말 그것도 12월의 마지막 주에나 한다.

이곳에 다른 계절에 오면 어떨까, 봄이나 가을 40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더 멋지겠지.

검진센터 내에서는 언제나 편안한 음악이 흐른다. 음악에 흐르면 물소리가 나면 더 좋겠다!


위내시경을 한때는 수면 내시경으로 하지 않고, 비수면으로 그냥 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7만 원이라는 추가 금액을 내야 해서 1분만 참으면 되니까 라는 생각에 수면이 아닌 상태에서 진행했었고, 고통스러웠지만 1분 만에 나는 잘 해냈다. 수면을 하면 깰 때까지 갈 수가 없고 운전도 한참이나 못해서 나는 수면 없이 하는 내시경을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검사인 위 내시경을 할 때까지 불안과 두려움으로 언제나 모든 검사의 여정은 최악의 상황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달려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부터 인가 수면 내시경이 기본 구성에 포함되고 굳이 내가 수면 내시경을 하지 않겠다고 선택하지 않는 한 추가금액 없이 수면내시경으로 진행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는 건강 검진의 마지막 단계인 수면 내시경은 검진의 전체 여정을 숙면으로 마무리하는 약간의 기대가 되는 검사가 되었다.

수면 없이 1분만 참으면 7만 원 절약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가치였다.

하지만 나의 전체 건강 검진 여정에 있어 감정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요소이다.

건강 검진 패키지가 가격이 올라가더라도 수면내시경을 기본으로 하고 가격을 내려주는 것 없이 비수면을 옵션으로 변경했다. 이것은 전체 검진 고객의 UX에 고객의 감정 변화를 이해한 신의 한 수였다.   

그렇게 나의 건강 검진의 경험은 큰 불안감과 스트레스 없이 마치고 건진 센터에서 보내준 죽집 쿠폰으로 동지에 못 먹은 팥죽을 누리며 오후의 건강 검진을 마무리했다.

오전에 받아오던 건강검진을 오후에 받게 되며, 여러 가지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다.


시간만 달라져도, 같은 곳, 같은 경험은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내년에는 겨울이 아니라, 가을에 오후 검진을 받아볼 예정이다.

계절이 다르면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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