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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Dec 16. 2018

4. 색연필

- 애도 중

얼마 전에 끝난 KBS 미니시리즈 '최고의 이혼'은 시청률은 저조했지만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많았던 드라마였다.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하긴 했지만 몇몇 대사들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들이 많다. 그중 조석무의 할머니가 한 말이 있다.


"석무야. 이 할미가 항상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색연필이랑 똑같애. 소중한 색깔부터 먼저 사라지는 거야."


좋아하는 색깔이어서 자주 쓰면 빨리 닳아 없어지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 찾으면, 자주 기대면 없어질지도 모른다니. 듣자마자 입꼬리가 내려가며 슬퍼졌다. 원작에도 있는 대사인 지는 모르겠지만, 색연필과 사랑하는 사람의 비유는 아주 절묘했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써봤던 색연필. 적게는 6색, 12색, 24색, 32색까지 같은 색깔이어도 묘한 차이가 나는 흐린 주황색과 그냥 주황색, 그리고 진한 주황색을 모두 가지는 게 더 부자인 것처럼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종류가 있음에도 늘 쓰는 색만 썼기에 정말 그 색깔만 빨리 닳곤 했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색연필을 낱개로 따로 사는 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 가지 색이 떨어지면 다시 종합 세트를 다시 사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친구에게 빌려 썼던 기억이 있다. 집에서 숙제를 할 때에도 그 색깔을 써야 할 때면 다음날 학교에 가서 친구에게 빌려 해결하곤 했다. 지금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비웃을지도 모른다. "또 사면되지!"라며 깔깔거릴 수도 있다. 그러지 못했던 시절의 안타까움, 그래서 더 아껴 쓰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대사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부모님의 죽음은 어느 시점이 되면 꼭 오게 마련이다. 아주 어릴 때 부모의 죽음을 맞닥뜨려야 했던 사람도 있고, 사회 초년생일 때, 결혼을 앞두고, 중년이 되어, 혹은 같이 늙어가는 노년에 부모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간에 부모보다 앞서는 것보다는 더 나은 일이다. 몇 년 전 어머니를 묻으러 공원묘원에 갔었다. 죽어서도 태우는 순서를 기다리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대기실이 룸처럼 쫙 들어선 복도에 한 여인의 애끓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애, 뜨거운 거 싫어하는 데에~~~" 그 목소리를 들은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작은 봉우리로 변하기 직전까지 엄마는 아이가 뜨거운 음식을 싫어하는 것을 걱정하며 울부짖는다. 하지만, 자식은 그런 생각을 할까? 당장 장례를 치르느라 피곤에 절어, 그리고 너무 피곤한 그 새벽에 고양이 잠을 자고 일어나 끌려온 그곳에서? 그러니, 백 번 생각해도 부모님이 자식보다 먼저 돌아가시는 게 덜 죄송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엄마와 아빠를 11개월 차이로 먼저 보낸 나는 생각에 잠겼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나에게 색연필 같은 존재였을까? 과연 내가 좋아해서 함부로 마구 써버려서 먼저 가버리신 걸까? 현실감각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유치한 발상일 것이다. 처음에는 오래 아프시다 돌아가신 거였기에 잘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했다. 내 일을 아무리 잘해도 뭔가 마무리하지 못한 찝찝함을 5년 내내 느꼈었는데 그런 것들이 사라지니 되게 좋았다. 혼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게 미안해서 많이 웃지 못했다. 아니, 즐거운 척은 했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도 마음껏 했다.  누군가에게 너무 시원하다고 했더니 이런 대답을 들었다. 앞으로 점점 생각날 거라고. 그때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 따위는 안 할 거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생각나지도 않았고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독립한 지 오래되어 같이 살지도 않았으니 같이 살던 공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철퍼덕 앉아 울 일도 없었으며, 복구할 수 없던 경상비는 이제 오롯이 내 것이 되어서 좋았다. 잠도 아주 잘 잤다. 유일하게 짜증 났을 때는 TV에서 병원에 입원한 부모님이 있는 장면을 볼 때였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다른 채널로 돌리고 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주 조그만 일에도 엄마가, 아빠가 생각난다. 거리를 거닐다가 눈에 뜨인 등산복 차림의 마른 할아버지의 뒷모습에, 꼬부라진 허리를 억지로 펴고 뒤뚱뒤뚱 걷는 뚱뚱한 할머니의 뒷모습에, 털이 까슬까슬하게 붙어있는 황금빛의 여름 복숭아를 만나거나 겨울이 오기 전에 먼저 온 단감과 말랑말랑한 연시를 만날 때도 뜬금없이 우리 아빠가,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가 걷던 샛길을 우연히 걷다가 작은 배낭에 들깨, 참기를, 잡곡 등을 가득 채워 넣고 걷던 모습이 떠오르고, 오랜만에 어묵이 들어간 김치찌개를 맛보며 엄마 생각이 난다. 또, 명품 등산복 브랜드를 총집합해 80-90% 세일이라는 사람 혹하게 만드는 전단지만 보면, 쓸데없는 것들을 사놓고 싸게 샀다면서 자랑하기 바쁜 아빠가 생각나고, 손을 잡고 걸어가는 부녀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져 고개를 숙여버린다.


어렸을 때는 돌려쓰는 색연필의 안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얼마나 남아있는 줄 모르고 색연필이 나오는 한 신나게 썼다. 그러다 어느 날 톡 하고 색연필 입구에서 빠져나온 깨진 붉은색 조각이 미끄러운 책상을 굴러다니자 신경질부터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잘해줄 걸. 조금만 덜 비난할 걸. 조금만 화를 참을 걸. 조금만 핀잔을 덜 줄 걸.


1년이 넘어 한 번 꿨던 꿈에 건강했던 때의 부모님이 보였다. 엄마는 살아생전에도 짝사랑을 하더니 꿈에서도 신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빠를 멀리서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놈의 갑을 관계는 평생을 가는구나.


내 책상에는 오늘도 심이 부러진 빨간색 색연필이 놓여있다. 이제는 낱개로 사면되는데도 나는 아직도 새 걸로 사놓지 않은 상태이다. 그저 내 책상에 고이 모셔놓았다. 다시 사야 하는데. 그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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