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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탄에 잠기다.

by 이각형

무거운 마음으로 붓을 든다. 세상에 목소리를 전하는 기자도 공인도 아니어도 세밑을 뒤흔든 비극적 참사에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섣달 그믐에 마지막 햇빛이 서쪽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뭉친 어깨 근육처럼 먹먹한 가슴이 침묵하는 이의 가슴을 조용히 흔들었다. 한반도 이남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고개를 숙인 채 백지를 한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할꼬, 이 일을 어찌할꼬......


단언하건대 욕망의 출발점은 결핍이다. 갖고자 하는 것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대상으로 하는 법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랑의 여신으로 추앙받던 비너스 여신이 사랑을 하는 것은 비너스 여신의 내면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에 자신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찬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금전욕을 끝없이 추구하는 이는 결코 부자가 아니다. 반대로 소유한 재산이 얼마 없어도 금전욕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이다.

욕망의 질적인 차이를 차치하고, 욕망이 좌절될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며 동시에 고통은 슬픔을 낳는다. 이때 세상사가 자신의 뜻대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독주를 마시듯 비탄과 슬픔에 젖어버린다.

하지만 독주에 취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리가 만무하다. 인간은 슬픔을 극복하고자 하거나 어떻게든 벗어나길 소망한다.

슬픔의 종류와 정도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인간으로 하여금 한으로 맺히게 할 정도로 가장 극단적인 슬픔은 가족을 잃어버리는 일일 것이다.

가족을 잃어버린 비탄은 현재의 상실감만을 뜻하지 않는다. 현재를 넘어 아무리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미래의 가족애에 대한 갈망, 즉 미래의 박탈감까지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슬픔을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에 따라 적극적인 방법과 소극적인 방법으로 갈라진다. 좌절된 욕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대자를 인정하며 그를 향한 절대적 복종으로 슬픔을 치환하거나 시간이라는 치료제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슬픔을 극복하고자 한다.

슬픔을 넘어서기 위해 취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의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탄에 잠긴 사람들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에서도 그 사람이 지닌 세계관의 일부가 반영된다.

비탄 속에 고통받는 분들과 그 고통을 각자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두 간극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아니, 좁혀질 수가 없다.

경험하는 자와 관찰하는 자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동일한 경험이 없다면 관찰자는 경험하는 자의 주변을 맴돌 뿐이다.

이 두 간극의 틈새는 언제나 거리를 갖는다. 이 틈새의 거리는 비극의 정도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인격의 수준을 간접적으로 일러주기 마련이다.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박탈감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들 앞에서 과연 그 누가 인류애를 버리고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낼 수 있으랴. 타인의 고통을 나의 것인 양 현실감 있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 그 상상력이 바로 교양이다.

지금은 비껴갔지만 언제라도 자신에게 닥쳐올 수도 있는 비극을 얼마나 현실감 있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바로 인격이다. 상상력이 있는 만큼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비록 무경험자가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슬퍼하는 사람과 동일할 수 없다. 주변인은 그저 고개를 떨군 채 침묵할 뿐이며 그것이 비극이 비껴간 사람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침묵을 깰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세상에 벌어진 참담함을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리가 아니라고 믿었다.

이 일을 말하기 전에 다른 말을 먼저 한다는 것은 개인의 양심상 할 수 없는 일이다. 통탄할 일이 세상을 삼키고 있다.

가족을 잃은 비극적 슬픔의 한가운데에 계신 그분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내게 그분들든 적어도 비가시적인 세계가 아니다.

아, 지금까지도 말이 너무 많았다. 고개를 떨구고 이제라도 침묵을 통해 애도에 동참할 따름이다.

이 일을 어찌할꼬. 이 일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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