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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 어느날 Nov 12. 2021

07) 나는 틀렸다. 그렇다고 달라질 수 있을까?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신념이 상처를 입었고, 오랜 다짐이 물거품이 되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한 이 기분에서 벗어나려면 난 적어도 한 가지는 지켜내야만 했다. 나는 큰 아들로서의 내 다짐은 지켜내고 싶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 어머니와 동생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리고 바로 그 주에 아버지의 담당 의사를 만나서 기증자 교체 방법을 문의했다. 의사는 조금은 놀란 듯 그리고 약간의 동정을 느낀 듯 말했다.


'아드님의 마음은 알겠는데, 간 이식 수술이라는 게 많은 유관 부서와 일정을 맞춰서 하는 거라 날짜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아요. 그리고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모든 수술 일정이 지연되고 있어서, 이번에 미루면 다음 일정은 한 참 뒤가 될 수도 있어요...'


아무 말 없이 땅 만 쳐다보다가 정말 방법이 없냐고 다시 물었다. 의사는 이번엔 조금 확고하게 말했다.


'지금 아버님 상태가 너무 안 좋습니다. 아드님 다시 검사하고 수술 일정을 다시 잡는 건 권장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내 고집만 부릴 수 없었다. 정해진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에 동의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또다시 가족을 위한 내 도리를 다 하지 못했다. 허무함과 죄책감, 좌절감이 몰려왔다.


아버지와 동생은 입원한 지 이틀 만에 수술실에 들어갔다. 여섯 시간 정도 걸릴 거라던 수술은 열 시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길어지는 수술에 어머니는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래 걸리네, 뭐가 잘못됐나 보다.'


나는 그 말에 '그런 말 하지 마, 잘될 거야' 같은 위로를 하지 못했다. 나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어머니와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애초부터 결과가 안 좋을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얼마 전 아버지의 말이 이따금씩 떠올라서, 아버지가 한 번의 기회는 더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다 모여서 이식 수술 여부를 논의하던 그날, 어머니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매몰차게 이야기했다.


'기어코 자식새끼들 배를 가르니까 속이 시원해? 결국 이 사달이 나버렸는데 살고는 싶나 보지?


배에 복수가 가득 차고 얼굴은 못 알아볼 정도로 부어버린 아버지는 바닥만 보며 앉아있었다. 그 모습이 참 가슴 아프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 어머니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알코올 중독은 사회악으로 분류될 정도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때문에 우리 가족은 평생을 마음속에 울분을 간직한 채로 살았다.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정신 병원을 몇 번이나 다녀와도 그때뿐이었다. 피를 토하며 응급실을 실려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술을 이겨내지 못했다. 간 이식을 한다고 달라질까? 의사도 이야기했다. 간 이식을 잘 받아도 알코올 중독은 꽤 높은 확률도 다시 발생한다고. 아버지가 수술 후 건강하게 지낼 거란 보장도 없는데, 어머니는 자식들의 몸에 칼을 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만히 듣고 아버지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래... 자식한테 이런 짓까지 하고 또 그러면 사람 새끼가 아니지... 내가 진짜 잘할게..'


그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세던 아버지의 약한 모습에 어머니도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수술은 열두 시간 만에 끝났다. 걱정하던 것과 달리 수술은 잘 끝났다. 동생은 먼저 끝나서 안정을 취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상태를 지켜본 후 일반 병실로 옮기기로 했다. 너무 아프다고 끙끙대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나의 짐을 넘겨버렸다는 생각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불편한 마음에 병원 밖으로 나가 정처 없이 걸었다. 힘없이 걸으며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열심히 한 만큼 보답받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건 더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십 수년을 간직해 온 신념이 무너지는 것에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고, 내가 느낀 죄책감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회사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회사가 좋아서였냐고? 결단코 그렇지 않다. 이곳에서 힘들게 일한 만큼 인정받고 보답받을 것이며, 그것이 언젠가 내 가족에게 평온과 안녕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내 가족을 지키기는커녕 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회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부지런히 쌓아놓고 있었다.


'아.. 이게 세상인가? 내가 그동안 너무 철이 없었나? 낭만에 젖어서 살았던 걸까?' 회의감이 몰려들었다.

'정말 다들 이렇게 산다고? 이게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고? 나는 이렇게는 못살겠는데..?' 두려움도 몰려왔다.

'이게 진짜 내 잘못이라고..? 왜 죄책감이 이렇게나 드는 거야..? 나는 인정을 못하겠는데..?' 억울했다.


나는 틀렸다. 아무리 합리화를 하고 변명을 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 태도와 노력이, 그리고 인내하고 희생한 시간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나의 시야가 넓지 못했고 방향이 엇나갔을 뿐이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너무 멀리와 있었다.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다른 길이 있다 해도 그 길은 옳은 길일까? 또다시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길은 아닐까...?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서른셋 청년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전 07화 06) 회사는 애초에 나의 인생에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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