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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 어느날 Nov 13. 2021

08) 서른셋, 잠시 멈추기로 결심하다.

아버지와 동생을 간호하기 위해 일주일의 연차를 냈다. 4년간의 직장 생활 동안 휴가를 이틀 이상 내본  처음이었다. 여갈 일과  일을 나눠갈 회사 구성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고맙게도 회사 동료들은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있는 일주일 동안 나의 마음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요동쳤다. 방황하는 마음을 빨리 붙잡고 듬직한 큰아들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가도, 병실에서 동생과 아버지를  때면 또다시 죄책감과 좌절감에 마음이 흔들렸다.


방황을 가장 빠르게 멈출 수 있는 방법은 한시라도 빨리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변화를 결심하거나 현실에 순응하거나. 대부분 자신과의 싸움이 그러하듯, 항상 포기가 가장 빠르고 편하다. 나는 가뜩이나 어지러운 내 현재에 변화를 주기보다는 '아직은 아니야'라는 변명으로 현실에 적응해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혼자 회사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고, 과한 욕심이 나를 망가뜨린 것이라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나만 내려놓고 나만 포기하면 모든 것이 다시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세뇌했다.




몇 달 후 2021년 새해가 왔다. 당연히 예전처럼 열정과 의욕으로 불태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좋은 동료들과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나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동생의 건강은 많이 좋아졌으니, 아직은 끝나지 않은 나의 방황만 끝내면 모든 것이 안정될 것이라 생각했다. 여전히 일은 많고 불안은 지속되었지만, 적어도 나의 탓은 하지 않으려 매일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새로운 한 해는 어떻게 보낼까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회사는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본사로의 인사발령. 어떤 언질도 없었다. 모든 직원이 본사 발령을 꿈꾸지만, 나는 이곳이 좋았다. 이곳에서 내가 해 온 일들, 함께 땀 흘린 동료들이 좋아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는 나를 더욱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현장에 남겠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으나, 내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2021년 1월 11일, 나는 이 날을 잊지 못한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무거운 발걸음으로 본사에 첫 출근을 한 날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선 한 달에 한 번 볼까 한 임원들이, 본사에는 눈만 돌리면 있었다. 현장에는 젊음이 있었지만 본사에는 소위 '어른'들이 너무 많았다. 담당 임원과의 짧은 면담, 팀원들과의 상견례 후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고요한 사무실에서 닭장 같이 모여 앉아 표정 없이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느꼈다.


'아 이게 모두가 꿈꾸던 본사이며 진짜 회사 생활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고 견디는 보통의 '회사 생활', 누군가는 부러워할 나의 이 상황에 나는 적응하지 못했다. 내 담당 임원은 같은 부서 동료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것이 일상이었고, 모두를 모아놓고 꾸짖으며 '월급 받을 자격'에 대해 설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매일 아침 사내 방송에는 항상 열린 문화와 인재 중심의 변화를 말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고객사로부터의 갑질, 그것을 버티지 못하는 담당자를 나무라는 상사, 보고를 위해 보고를 받는 리더들,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책임자들, 참다못해 떠나가는 젊은 동료들. 나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봐도, 수많은 어른들 중 내가 닮고 싶고 따라가고픈 '미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조직의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루에도 '도전'이라는 키워드의 영상을 수십 번 보며 억지로 나를 바로잡으려 발버둥 쳤다. 호기심 넘치고 도전을 좋아하던 나는 없었다. 밤에는 다음날 출근이 너무 싫어서 눈물이 난 적도 있다. 살면서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런 모습에 가장 놀란 건 나 자신이었다. 불안과 비관이 나를 집어삼켜가는 날들이 쉴 새 없이 이어졌기 때문일까, 내 몸과 마음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온몸이 간지러워서 마구 긁어댔다. 옷을 벗어 확인해보니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나 있었다. 처음에는 '뭘 잘못 먹었나?' '이 집에 벌레들이 있나?' 하며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하지만 몇 주 동안 두드러기는 가라앉았다 다시 생겼다를 반복했고, 쉬는 날에는 귀신 같이 없어지는 걸 알고 나서 이건 나의 문제임을 확신했다. 또 몸은 계속 불어갔다. 퇴근 후 매일 저녁을 배달 음식으로 폭식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의식하지도 못했다. 놀란 마음에 급하게 운동을 다시 했지만, 고작 몇 달 만에 형편없어진 체력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이끌어 출근을 한 어느 날, 우리 부서 담당 임원은 나와 내 선배를 호출했다. 그리고는 아침부터 인수인계가 잘 진행되는 것 같지 않다며 내 선배를 꾸짖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마치 내가 제대로 인계받지 못해서 이 일이 발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쥐어짜듯 조여왔다. 이때 나는 쓰러져가는 나를 마지막까지 잡아주던 마음이 끝내 무너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질 것 같은 불안감에 뭐라도 해야만 했다. 가장 먼저 심리 상담을 시작했다. 우리 회사의 복지 중 하나가 심리 상담을 위한 포인트 제공이었다. 회사에서 심리 상담을 복지로 제공한다고?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일이다. 상담 선생님은 처음부터 나의 부정의 기운을 걷어주려 부단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상태는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조여왔다. 심장의 문제일까 흉부외과도 가봤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출근하는 길에서도 가슴이 조여왔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회사 근처에 있는 정신의학과 진료를 예약했다.


50여 장이 넘는 설문지를 하고 30여분의 면담을 했다. 첫 진료에 의사가 판단한 나의 상태는 '극도의 우울증세와 불안 및 공황 장애'였다. 충격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몸과 마음에 이상 증세가 있음에도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현실에 순응하고자 결심했던 나이기에, 또 한 번의 좌절은 용납할 수 없었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버텨내고 이겨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내 의지를 가볍게 무시하듯 상태는 안 좋아지기만 했다. 처방받은 약을 먹어도 그때뿐이었고, 상담받는 날과 병원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 순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얼굴과 굽어버린 몸. 하루하루 나는 피폐해져 갔다. 그동안 내 몸과 마음이 여러 번 신호를 보냈음에도 매번 그것을 무시했다. 누구보다 소중한 건 나 자신임에도, 항상 모든 잘못은 더 열심히 하지 않은 내 잘못이라며 스스로를 상처 냈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음을 나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3월의 어느 날, 나는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아 아무 말없이 땅만 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좀... 쉬고 싶으신가요?"


평생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는 말로 대답했다.


"네.. 제 마음이 좀 힘든 것 같아요.... 쉬고 싶습니다."


마음이 무너지는 듯한 쓰라림과 함께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십 수년을 우울감과 함께 살아왔지만, 나의 인내와 노력의 끝에 행복이 있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앞만 보고 달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내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줬어야 했었고, 설사 내 잘못이더라도 나만큼은 내 편이 되어줬어야 했다. 어리석게도 이 모든 것을 내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쳐버린 내 몸과 마음을 돌보기 위해,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늦었지만 잠시나마 삶의 방향을 재정비하기로 결심했다. 참 많은 생각과 용기가 필요했지만, 어쨌든 소중한 내 삶이니까.


내 나이 서른셋, 그렇게 잠시 멈춰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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