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라

내가 좋아하는 소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

by 장하늘

탄탄글쓰기 -4주 차 (세 번째 과제: 소소하지만 나에겐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

장하늘


제목 : 뜨라

"커피 골라주세요!"

"난 아아"

"나도"

"나도 아아"

"난 뜨아"

"나두 뜨아"

"아아 셋, 뜨아 둘, 뜨거운 라테 하나 주세요."


커피를 좋아하게 된 건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대 믹스 커피가 나오기 전 집집마다 커피는 상비약 같은 필수품이 되었다. 당시 집에 손님이 오면 커피를 타는 것이 곧 인사가 되어있었다.


커피 2 :설탕 2: 프림 2 사람마다 커피, 설탕, 프림 비율이 달라서 취향별로 커피를 타주면 센스 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음식에만 손맛이 있는 게 아니다. 비율을 똑같이 해도 타는 사람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졌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커피는 일명 다방커피라고 불렸다. 왜 맛에서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손맛에 의해 그 맛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아무래도 맛있게 커피를 타는 사람은 커피, 설탕, 프림 이외에 뭔가 마법을 부리는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어릴 때 내가 탄 커피가 유난히 맛있다고 칭찬하는 분에게 "제가 사랑 한 스푼 더 넣었습니다."라며 애교 섞인 멘트를 날렸던 게 기억난다.


어린 시절 추억소환뿐 아니라 커피는 세월이 지나면서 나에게 늘 새로운 매력을 어필한다. 일명 다방 커피(커피, 프림, 설탕을 조합)에서 새로운 단계로 레벨 업 된 것이 원두커피였다.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들이 원두커피를 마시며 커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이후 또 다른 세계로 이끈 것이 지금의 아메리카노형식의 커피다.


커피숍이란 장소에서 지금의 커피를 만난 건 20살 때이다. 어엿한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 된 95년도에 커피숍이 블록마다 수를 놓듯이 계속 생겨났다. 처음 커피숍에 들어갔을 때를 잊을 수 없다.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진한 커피 향으로 몸이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매혹적인 커피 향에 이끌려 커피숍을 자주 찾았다. 커피숍을 찾을 때마다 커피는 어쩐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다소 깐깐하고 단아한 여자처럼 다가왔다. 또 어느 날은 터프하면서도 부드러운 매력적인 남자로 느껴졌다. 커피 잔 안에서 얌전히 머물러 있다가 커피를 마시면 내 주변에서 강강술래를 하면서 진한 향을 풍기며 자신을 뽐냈다. 또 어느 날은 뮤지컬배우가 눈앞에서 춤과 노래를 부르듯이 한 편의 공연을 선보였다. 커피는 자주 나를 환대하며 코가 아닌 가슴을 매료시켰다.


커피종류가 많아졌다. 커피를 잘 모르던 시절 처음으로 카페라테를 시켰다. 에스프레소가 내려지면서 진한 향이 퍼지고 머릿속을 간지럼 태우는 듯했다. 이어서 우유를 데우는 기계소리가 쉭쉭. 치직 소리를 내며 스팀을 뿜어냈다. 커피 잔 안에 피어난 아름다운 모양이 예술작품으로 나타났다. 잔을 보는 순간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드디어 나는 최애 커피를 만났다. 뜨거운 카페라테만큼 나를 매혹시킨 커피는 없다. 커피에만 국한된다고 하면 서운할 정도다. 모든 ‘음료 중에 최고 좋다!’라고 한정지어도 부족하다. 뜨거운 카페라테는 나에게 어느 순간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커피숍에서 뜨거운 카페라테에 모양을 내주는 건 아니지만 카페라테는 여전히 예쁜 모습을 만들어주는 커피숍들이 많다. 요즘도 종종 커피 잔에 특히 아름다운 모습이 피어나면 마시기 아까워하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면 넘칠 듯 잔속에서 그림이 흔들거린다. 아깝다고 감상만 할 순 없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매력을 어필한다. 입 근처로 잔을 가까이 가져오면 우선 코를 자극한다. 향이 진동하면서 몸속으로 흡입된다. 한 편의 예술작품이 코를 타고 몸속으로 흡수되는 것 같다. 향긋한 커피 향과 보드랍고 포근한 우유 향에 취해 미소를 머금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몸 안에 뜨거운 액체가 흘러들어 가는 길목의 느낌을 알알이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햐~ 역시. 라테다.


남들에게 어쩌면 보잘것없는 단순한 커피가 나에겐 아주 특별한 이벤트다. 그렇게 된 건 사실 돈 때문이다. 20대 직장인일 때 커피는 언제든 시켜 먹을 수 있는 사소한 행위에 불과했다. 그런데 20대 초반에 임신과 결혼을 하고 빠듯한 생활을 하면서 몇 년 동안 커피를 마실 수 없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한 달에 한번 정도 카페라테를 마셨다. 당시에 500원짜리 머리끈도 아까워서 못 사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3000원 정도 하는 카페라테는 아주 큰 사치였다.


다른 건 포기하더라도 그 사치만은 놓지 않았다. 빚에, 돈에 늘 궁핍했지만 소득이 적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돈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 시절 나에게 카페라테는 스스로에게 해주는 최고의 배려로 선물이고 행복이었다. 나는 요즘도 종종 시간을 내서 혼자라도 커피숍에 간다. 창이 넓은 커피숍을 좋아하고 혼자 갈 때는 늘 책을 한 권 이상 들고 간다. 일행이 있어도 좋고 혼자여도 좋다. 뜨라를 시키고 자리에 가서 앉는다. 비슷한 커피더라도 똑같은 커피는 없다. 늘 시킬 때마다 다른 커피가 내손에 놓인다. 커피 잔을 받아 들고 스스로에게 선물을 한 듯, 포장지를 뜯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뜨거운 카페라테와 만난다.

한여름에도 나는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내돈내산일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카페라테를 마신다. 이건 순전히 가격 때문이다. 아메리카노 가격에 비해 라테는 두 배 가까이 비싼 경우가 많다. 지난해 주식과 코인이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나의 주머니는 탈탈 털렸다. 쏘 해피한 파이어족을 즐기기로 결심한 지 불과 2년도 채 안된 때였다. 막상 돈이 없으니 스트레스가 쌓일 것 같아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처음엔 아르바이트라도 시작할까 고민하다가 15년 전에 영원히 안녕하고 떠난 채권추심회사에 23년 1월부터 입사했다.

직장상사와 외식을 하러 가서 상사는 짜장면을 시키는데 눈치 없이 나만 고추잡채를 시킬 순 없다. 그렇지만 나는 아주 눈치 없는 몰염치한처럼 커피를 시킬 때 카페라테를 시킨다. 어쩌면 직장이라는 장소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료와 밥을 먹을 때는 조금 다르다. 동료들은 점심밥은 더치페이를 하지만 커피는 돌아가면서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내가 계속 카페라테를 시키는 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양심이 없는 게 되어버린다. 점심식사 커피는 더치페이가 좋다. 더치페이할 때는 행복하게 라테를 선택한다. 그리고 내가 커피를 살 때는 반드시 카레라테를 시킨다.


9월까지 다닌 회사에 친해진 사람들이 있다. 편한 사람이 커피를 사줄 때는 뜨거운 라테를 찬양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라테를 시키기도 했다. 2023년, 불과 지난달까지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뜨거운 열기로 땅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도 뜨거운 카페라테를 시켰다. 다소 의아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취향이 뚜렷해서 커피를 마실 때 눈초리는 감당한다. 어차피 보통 사무실에 가져와서 먹거나 시원한 커피숍에서 먹기 때문에 여름에도 크게 덥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1월부터 다녔던 회사를 9월 달 마감을 마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10월, 연휴를 끝내고 이어서 바로 이직한 회사에 출근했다. 첫날은 혼밥을 했다. 출근 첫날 은 기존 분들은 모두 오후 2시가 돼서 출근했다. 이전부서에서 나처럼 옮겨온 분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분들께 인사를 드렸다. 전날 인사드린 분이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자고 하셨다. 이전 회사에서 밥 때문에 나름 고생했는데 밥 멤버가 있다는 게 마음 놓였다. 점심시간 회사건물을 나와서 충정로역 골목길로 들어서니 밥집이 미로 속 개미굴처럼 즐비하다. 일행들을 따라 식당을 들어가서 확인했더니 총 여섯 명이다. 테이블 두 개를 차치하고 셋, 셋이 앉았다. 메뉴는 주꾸미돌솥비빔밥. 음식 맛도 괜찮고 밥 멤버가 충분해서 참 좋다.

간단한 인사와 점심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점심 식사 후 사무실로 직행하는 것은 옮긴 회사의 풍경이다. 모두 할 일들이 바빠서 그런지 식사 후 점심시간을 채워서 쉬지 않고 바로 일을 하러 간다. 커피 한잔씩 대접하기 위해 커피취향을 물었다. 날씨 탓인지 얼죽아만 있지 않았다. 제법 차가운 공기는 가을을 다 먹어버리고 바로 겨울로 배설하려는 듯하다. 그전에 가을을 충분히 느끼고 싶다. 여름과 달리 가을의 모습은 확실히 뭔가 다르다. 장소가 달라져서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계절 때문에 느껴지는 생경함이 크다. 점심시간이면 거리에서 시끄럽게 귀청을 때리던 매미도 모두 사라졌다. 빼곡한 건물들을 떠나듯 구름은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더니 출근길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답답했던 열기가 모두 사라진 점심시간 거리에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치며 움직인다. 마치 병정놀이를 하는 걸음걸이다. 숨을 들이쉴 때 여유가 생겼다. 들숨과 날숨이 따로 필요 없다는 듯 숨 쉬는 것이 여름과 사뭇 다르다. 자연스럽다. 신선한 공기, 바람, 사람들의 옷차림, 그리고 살갗에 와서 닫는 선선하고도 스산한 가을 냄새. 가을이 깊어진다.


식당을 나와 사무실로 가는 길에 커피숍이 여러 개가 보였다. 제법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보고 나도 그 줄에 합류했다. 마치 고속도로 공중화장실의 줄 같아서 우스웠다. 커피를 시켰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새로운 일들이 채워질 것이다. 이곳에서도 새로운 인연들이 쌓일 것이다. 카페라테가 아주 오랜 시간 나에게 선물이고 친구였던 것처럼, 이곳에서 만나는 이들도 그런 벗이 되길 바라본다. 햐~ 커피 향이 진하게 풍긴다. 역시 커피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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