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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오톡방 03화

3. 벙개

마흔, 수진

by 장하늘

오톡방


3. 벙개




수진은 그날 이후 더욱 채팅방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낮이면 조용히 채팅방을 들여다보았고, 남편이 늦는 날이면 밤에도 자연스럽게 그곳에 머물렀다. 낮과 밤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달랐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익숙해졌다.

낮의 채팅방은 인사로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커피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누군가 먼저 말을 걸면, 또 다른 누군가가 가벼운 농담을 덧붙였다.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룰렛을 돌리거나 숫자를 맞히는 단순한 게임이었지만, 사람들은 이벤트 결과에 일희일비했다. 수진도 몇 번 참여했고, 운이 좋았던 날은 커피 쿠폰을 받았다.

그리고, ‘벙개’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임. 거의 매일같이 일정표에 새로운 벙개가 추가되었고, 공지사항에 장소와 시간이 공유되었다. 참석 인원을 확인하면 항상 몇 명 이상이 등록되어 있었다.

그날 밤, 채팅방에는 벙개에서 있었던 일들이 화제였다.

“어제 대박이었다.”

“진짜? 무슨 일 있었는데?”

“나 2차까지만 갔는데, 3차 분위기 어땠어?”

대화는 빠르게 오갔다. 수진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자신은 어느 순간 대화에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함께 나눈 시간 속에 자신은 없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꾸준히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채팅방에서 오래 머물렀다가, 또 어떤 이는 며칠 머물다 조용히 사라졌다.

어떤 날에는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걔, 벙개 갔다가 뭐 좀 있었나 봐.”

“그러게, 술 마시고 실수했다던데?”

“누구랑 엮였나 보지.”

그렇게 떠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뒤늦게 퍼졌다.

전날 벙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누군가는 취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떠난 사람들 중에는 남녀 문제로 조용히 사라진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채팅에 참여하면서 수진은 자연스럽게 자주 보던 사람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몇 번 대화를 나눈 사람들 중에는 수진에게 벙개에 참석하라며 직접 확인 약속을 요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보다 더 강한 건 호기심이었다.

남편은 늘 늦었고, 수진이 누구를 만나든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타입이었다. 채팅이 재미있어지면서 수진은 점점 더 자주 톡방에 참여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신입이 들어왔다. 마침 수진이 채팅방을 보고 있을 때도 새로운 신입이 입장했다.

신입 절차가 진행되었고, 신입은 얼굴 공개까지 마친 후 무리 없이 자리 잡았다. 수진은 신입이 들어오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커피: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호수: 지목해 주세요.

토미: 커피님이요.

새로운 신입이 수진을 지목했다.

이곳의 규칙에 따르면, 신입이 들어오면 자신의 사진을 공개한 후, 대화창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을 지목해야 했다. 지목당한 사람은 ‘답공(답례 공개)’으로 자신의 사진을 올리는 방식이었다.

수진은 이제 채팅방 분위기에 익숙해졌고, 이미 여러 장의 셀카를 찍어두었기에 자연스럽게 사진을 올렸다.

호수: 오~

토미: 와우

오리: 오~~~ 커피 드디어 사진 보네, 반갑

혀기: 존예~

서기: 역시 커피

우산: 커피님 예뻐요

자두: 커피 존예

별것 아닌 농담에도 기분이 상기되었다.

이 공간이 판타지처럼 느껴졌지만,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때, 채팅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오리: 커피 동갑이네. 내일 뭐 해?

커피: 아무것도 안 해. 그냥 집에 있을 듯.

수진이 답하자, 오리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오리: 그럼 내일 보자.

커피: ?

커피: 난 신입인데.

뜻을 이해하지 못한 수진이 물음표를 남겼다.

채팅방 규칙에는 ‘남녀 신입 간 1:1 만남 금지’ 조항이 있었다.

오리: 아, 내일 벙개 하려고. 벙개 내가 주최할 테니까 참여하라구.

수진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벙개에 한 번은 참석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언제쯤 나가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채팅방을 나와야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채팅방 규칙에 따르면 ‘3주 이내에 벙개나 오픈 모임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규칙을 어기면 강퇴라는 것. 이제는 수진도 그 시스템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수진은 결국 짧은 답을 남겼다.

커피: 그래.



이후, 곧바로 벙개 공지가 채팅방에 올라왔다.

다음 날, 수진은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머리를 세팅했다. 거울 앞에서 옷을 입어보고 다시 벗기를 반복했다. 어떤 가방을 가져가야 할지, 루즈 색은 옅은 게 좋을지, 진한 게 나을지 고민하며 화장을 고쳐 했다.

약속 장소는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호프집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왠지 준비하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이게 뭐라고… 마치 데이트라도 가는 것처럼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화장을 하면서, 거울을 보며, 수진은 아주 오랜만에 **‘여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실감했다.

벙개 시간이 오후 7시.

수진은 6시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다.

집을 나서다 대문 앞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비친 자신을 보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시간을 흘끗 확인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미리 발라둔 루즈를 지우고 좀 더 짙은 색의 루즈를 발랐다. 손과 귀, 그리고 머리카락에 향수를 살짝 뿌렸다. 마지막으로 아끼는 가방을 손에 쥐고 다시 집을 나섰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호프집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쭈뼛거리며 채팅창에 글을 남겼다.



커피: 입구에 도착했는데, 누구 먼저 와 계시나요?

오리: 입구로 나갈게.

톡을 확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덩치가 크고 순한 인상을 가진 한 남자가 나타났다.

오리: 커피? 난 오리, 어서 와.

다른 사람들도 오고 있어. 다들 곧 올 거야.

자리에 앉아, 동갑인 오리와 자연스럽게 닉네임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맥주와 소주를 시키고, 먹태와 오뎅탕도 함께 주문했다.

사람들이 한 명씩 도착하며 자리가 채워졌다.

벙개에 참석한 인원은 총 일곱 명.

남자 넷, 여자 셋.

모두 서로를 소개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오리 40, 토미 43, 소라 39, 투투 42, 토이 37, 커피 40.

모두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수진은 속으로 갸우뚱했다.

‘이게 뭐지? AI 프로필보다도 심한데? 하지만… 이 방에서 나만 속았던 건 아니겠지.’

수진은 몇 번 얼공(얼굴 공개)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얼굴들은 채팅창에서 본 사진과 사뭇 달랐다.

뽀샵 때문일까.

어플을 사용한 사진과는 달리, 현실 속 그들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판타지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 속 동창 모임 같은 분위기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뿌니 38이 들어왔을 때 수진은 순간적으로 놀랐다.

뿌니는 채팅창에서 얼공을 자주 했던 사람이었다.

사진 속 모습은 너무나 예쁜 여자였는데…

실제 모습은 살집이 있고, 피부가 좋지 않았으며, 키도 작은 편이었다.

수진은 뿌니의 실물을 보며 묘한 자부심을 느꼈다.

술자리가 깊어지면서, 남자들은 자리를 옮겨가며 자연스럽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고 있을 때, 오리가 수진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수진은 망설임 없이 번호를 교환했다.

그렇게, 참석한 모두가 자연스럽게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처음엔 거리감이 느껴졌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나에게 더 가까워졌다.

아니, 내가 그들에게 가까워진 걸까?’

수진은 자신이 이 자리에 동화되고 있음을 느꼈다.

평소 술을 좋아하지만 주량이 많지 않은 수진은 처음엔 맥주만 마셨다. 그러나 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맥으로 바꿨다. 달큰한 술이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술자리가 깊어지자 2차로 노래방에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술을 깨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수진도 따라 나섰다.

잠시 집이 걱정됐지만, 남편은 술 약속이 있다고 했고, 아이들은 수진의 귀가에 신경 쓸 리 없었다. 남편이 술 약속이 있는 날은 보통 새벽 2시 이전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래방에 도착해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마이크를 처음 잡은 것은 뿌니였다. 뿌니는 노래를 참 잘했다.

사방이 막힌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금세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노래와 술, 분위기에 취했다.

순식간에 예약된 노래들이 쌓였다.

오리가 수진에게도 한 곡 예약하라고 권했다.

익숙한 멜로디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투투 오빠와 소라는 앞에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술기운은 이미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수진은 어릴 때 자주 불렀던 18번 노래를 불렀다.

뿌니는 노래뿐 아니라 춤도 잘 췄다.

수진도 그들과 함께 어깨를 들썩였다.

발라드 음악이 나오자, 토미 옵과 소라는 부르스를 췄다.

오리가 수진에게 부르스를 권했지만, 쑥스러운 수진은 농담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노래방에서 이렇게 놀았던 게… 도대체 얼마 만일까?

기억조차 아득했다.

밤 12시가 다 되어 노래방을 나왔다.

토미 옵과 소라는 집에 간다며 먼저 인사하고 떠났다.

수진도 집에 가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오리가 3차로 가볍게 맥주 한잔 더 하자며 붙잡았다.

다섯 명이 3차로 향했다.

더 이상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수진은 맥주만 시켰다.

그러나 술기운 때문인지, 오랜만의 일탈 때문인지 기분이 상기되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오리 40, 투투 42, 토이 37, 뿌니 38, 커피 40.

서로 닉네임을 부르며 마치 오래된 친구들처럼 친근해졌다.

일반적인 대화 속에 19금 농담이 자연스럽게 섞였다.

커피: 아~ 기분 좋다. 술도 맛있고, 먹태가 이렇게 맛있었나? 난 1시에 집에 갈 거야.


오리는 주말부부,

투투 오빠는 기러기 아빠,

토이는 별거 중,

그리고 뿌니는 1호가 일 중독자라고 했다.

1호는 배우자를 지칭하는 오픈채팅 은어였다.


3차 자리에서는 개인적인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수진은 문득,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기혼자였다.

그러나 모두가 어딘가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외로운 동지들.

그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처량하면서도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처음 만난 얼굴들이었지만, 이제는 친근함이 스며든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수진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불편했다.

자신의 가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남편과 자신도… ‘정상적인 부부’라고 할 수 있을까?

커피: 1호는 비즈맨? 아니면 베드맨? ㅋㅋㅋ

술기운 때문인지 수진은 자꾸 웃음이 나왔다.

1시가 되어 수진이 집에 가겠다고 일어섰다.

오리와 토이가 함께 나섰다.

오리는 벙주(벙개 주최자)였기에 자리를 마무리해야 했고, 토이는 자기 집 가는 길에서 조금만 돌아가면 된다며 수진을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수진은 부담스러워 사양했다.

커피: 나, 잘 가. 잘 갈 쑤 이써. 그럼, 걱정 마. ㅎㅎㅎ

집 도착하면 톡방에 톡 남길게. 빠빠2 들어가 들어가.

최대한 멀쩡하게 말하려 했지만, 발음이 조금 꼬였다.




오리가 손을 내밀었다.

수진이 손을 내밀자, 오리는 손을 지긋이 잡았다.

잠깐—

그 순간, 토이도 손을 내밀었다.

토이의 손이 덥석 수진의 손을 감쌌다.

거친 촉감.

그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상하다… 거부해야 하는데… 거부할 힘이 없어…

이건… 단순한 배웅일까?’

택시에 앉아 수진은 심호흡을 길게 내뿜었다.

술 냄새가 훅 하고 퍼졌다.

머리에 뿌린 향수 냄새까지 목구멍으로 파고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얼굴이 후끈거렸다.

수진은 택시 유리창을 살짝 내렸다.

눈을 감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머릿속이 엉켜버렸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술기운 때문인가.

아니면… 그 손길 때문인가?’

수진은 모든 생각에서 도망치듯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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