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수진
수진은 더욱 채팅방에서 채팅을 자주했다. 모임이 올라오면 누가 참석하는지 살피기도 했다. 거의 매일 벙개 모임이있었지만, 두 번째 모임 때 생각이 나서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살피기도 했다. 벙개모임에 나간 후 사람들이 채팅방에서 채팅하는 내용도 다소 달라지는게 보였다. 확실히 오톡방에는 여자보다 남자 구성원의 비율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예쁜 사람이 벙개모임에 나간 후에는 채팅방에서도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듯한 남자들이 보였다.
벙개 이후, 오리와의 개인적인 연락이 계속 이어졌다. 점차 개인톡이 많아졌고 대화도 깊어졌다, 오리는 자연스럽게 수진의 일정과 생활에 대해 묻곤 했다. 수진 역시 그와의 대화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리: 커피야, 우리 보기로 한거 언제볼까? 낮이 좋아? 아님 저녁이 편해?
수진: 넌? 언제가 편한데? 나는 크게 상관없어. 미리 약속 잡으면 돼.
오리: 이번주 금요일 저녁 어때?
수진: 저녁? 너 일부러 우리 동네까지 오게?
오리: 원래는 그럴까 했는데, 혹시 부담되면 중간지점에서 볼까?
서로 유부남, 유부녀인 것을 고려해, 굳이 수진의 집 근처에서 만나기보다는 인근 다른 동네에서 보기로 했다.
만남 당일, 수진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써서 옷을 골랐다. 심플하지만 여성스러운 니트를 입고, 살짝 화장을 고쳤다. 남녀가 단체로 만나는 것도 신세계였지만, 남자와 단 둘이 만나는 건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약속 장소는 술과 식사가 가능한 작은규모의 가게였다. 오리가 가끔 친구들과 가는 곳이라고 했다. 오리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함께 술을 마셨다. 대화는 자연스러웠고, 술잔이 오가면서 조금씩 긴장도 풀렸다.
오리: 너랑 이렇게 단둘이 술 마시는 것도 신기하다.
수진: 그러게. 생각보다 우리 자연스럽지 않아?
오리: 응, 뭔가 오랜 친구랑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술이 들어가며, 두 사람은 서로의 삶과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결혼 생활에서 느끼는 답답함, 소원해진 관계, 그리고 점점 잊혀 가는 설렘들. 술기운이 도는 분위기 속에서 대화는 점점 더 솔직해졌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지만, 둘 다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오리: 2차로 가볍게 한 잔 더 할래?
수진: 어디서?
오리: 이 동네 호프집 같은 데 있지 않을까?
그러나 순간, 수진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라도 동네니까 아는 사람을 마주친다면? 단둘이 술을 마시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보인다면? 여럿이 모이는 자리라면 모를까, 이렇게 단둘이 있는 걸 누군가 본다면 어떤 소문이 돌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호프집 대신 술도 마실 수 있는 노래방으로 가기로 했다.
술과 안주를 시키고 노래를 예약했다. 신나는 노래를 몇 차례 부르고, 발라드 음악을 예약해놓고 서로 술잔을 기울였다. 동갑이라서 아는 노래도 비슷하고 어린 시절 유행했던 노래를 틀어놓고 서로 흥얼거리기도 했다. 익숙한 노래를 부르며 노래에 따라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기도 하고, 두 손을 마주잡기도 했다. 술기운이 올라가고, 조명이 어두워지고 커피와 오리는 가까이 앉아 화면을 보며 같이 노래를 불렀다.
오리가 수진에게 술을 따라주고 수진은 술을 마시려다가 문득 오리와 눈이 마주쳤다. 술기운 때문인지, 노래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의 외로움이 통한 것인지,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호흡이 느껴졌다. 오리가 다가왔다. 망설이듯, 그러나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수진도 피하지 않았다. 입술이 맞닿았다.
순간, 수진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멈춰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몸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키스가 이어졌다. 갑자기 방안이 조용해졌을 때 둘의 몸이 떨어졌다. 그 사이 노래가 끝나있었다. 수진은 술이 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를 해야할 것 같았다. “아~ 취한다. 취해, 나 지금 내 정신 아니야, 아무것도 기억안날 것 같아. 댄스곡 부르자!, 댄스곡.”
댄스곡이 나오고 수진은 노래를 부르며 물을 들이켰다. 수진의 댄스곡이 끝날 때까지 오리는 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 수진에게 말했다. “진짜? 기억 안날 것 같아? 난 다 기억할 것 같은데. 난~”
오리의 말이 이어지지 못하도록 수진이 오리의 입에 손을 가져갔다. 오리는 수진에게 다시 다가오며 말했다. “커피야? 중독자 된 것 같아, 카페인에. 지금 너무 커피를 먹고 싶어.” 수진은 오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오리가 수진에게 다가왔고 키스가 시작됐다. 오리가 키스하며 수진의 가슴을 더듬었다. 수진의 몸이 기울었다. 둘은 노래방 의자에 쓰러지며 누웠다. 오리의 손이 수진의 티를 파고들며 수진의 맨 젖가슴으로 들어왔다. 수진은 오리의 목을 감쌌다. 키스가 끝난 후,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고, 노래 반주가 이어졌지만 수진은 몸을 일으킬수 없었다.
오리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
"커피야… 나 지금 너무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수진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요동쳤다. 술 때문인지, 외로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했다.
수진의 침묵에 오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잠깐만, 한 시간만 같이 있자.” 순간 술이 깨면서 수진은 돌연 겁이났다.
수진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리야, 나 물 좀 더 사다줘.” 수진은 오리가 카운터쪽으로 나가는걸 보고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오리에게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복도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는 수진을 보며 오리는 노래방 안으로 들어갔다. 수진은 화장실을 나와 곧바로 노래방 건물 밖으로 나왔다. 수진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잠시 발걸음이 머뭇거려졌다. 수진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안돼. 이대로 가야 해.’
하지만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리는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왜 나는?’
핸드폰을 쥔 손이 떨렸다.
밖으로 나와 오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진: 오리야, 미안해. 술이 너무 취했어. 먼저 갈게.
곧장 전화가 울렸다. 오리였다.
수진은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결국 받지 않았다. 손에 땀이 배어들었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는것 같아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대로 택시를 잡고, 집으로 향했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수진은 핸드폰 진동을 무음으로 바꾸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집으로 가는 길,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부재중 전화, 오리.
생각해 보니 둘은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다. 둘은 그저 채팅방에서 오리이고, 커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