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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오톡방 14화

14. 일상

40, 수진

by 장하늘

14.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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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은 저녁상을 차리다 말고 문득 손을 멈췄다.

거실에서 들려온 남편의 목소리가 그 순간, 허공을 갈라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 나 다음 주 필리핀 가야 해. 골프 좀 치고 올게.”

습관처럼 던지는 무심한 말투. 마치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일상처럼 태연했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 수진의 뇌리는 서서히, 그러나 또렷하게 파장을 일으켰다.

필리핀 골프 여행.

언제부턴가 정기적으로 반복된 일정. 늘 거래처 사람들과 함께 간다며 수진에게 미리 이것저것 챙기게 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런 말도, 부탁도 없었다. 모든 준비가 이미 그의 손 안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는 듯한 기분.

“누구랑 가?”

생각보다 단단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자신도 의외였다. 처음 던져보는 질문이었다.

잠깐, 남편의 말끝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금세 미소를 억지로 덧칠한 얼굴로 말했다.

“박 사장.”

수진은 입술을 천천히 깨물었다. 묵직한 감정이 이마 뒤편을 뚫고 올라오는 듯했다.

거실에서는 여전히 텔레비전이 흘러가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은 무심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화면을 응시했고, 초등학생 딸은 아버지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있었다.

그 광경은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마치 남편이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겉모습은 분명 가족의 일원인데, 그 속은 이질적인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박 사장… 여보라고 남편을 부르는 사람.’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해온 시간들.

이제 그 모른 척이 습관이 되었고, 감정은 무뎌졌다.

이혼이라는 단어는 늘 마음 한구석에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현실이라는 단단한 벽 앞에서 무릎 꿇고 말았다.

남편이 떠난 뒤, 두 아이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 벽은 그녀에게 너무 높고, 너무 차가웠다.

다음 날, 수진은 오랜 친구와 점심 약속을 가졌다. 따뜻한 햇살 아래, 식당 안은 사람들의 웃음으로 가득했다.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놓였고, 그녀의 입가에도 어색한 웃음이 머물렀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계속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의식하지 않아도 손끝은 자연스럽게 그 작은 화면 위를 더듬었다.

오픈채팅방을 떠난 지 벌써 석 달.

그러나 그녀의 감각은 여전히 그곳에 닿아 있었다.

외롭고, 공허하고, 뭔가 모르게 불완전했던 감정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욕망과 허무가 엉켜 있던 그 공간, 그 시간.

밤. 침대에 누운 수진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이 켜지자, 낯익은 이름이 떠올랐다.

혀니.

그와 함께한 그날 밤이, 한 겹 한 겹, 감각의 결로 되살아났다.

그의 손길, 숨결, 체온.

그것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다.

오리와의 미완이 혀니로 이어졌고, 혀니는 그녀의 내면 깊숙한 욕망을 건드렸다.

그것은, 분명한 욕망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혀니는 가끔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잘 지내?”

단 한 줄. 길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그 말은 매번 그녀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수진은 수차례 답장을 썼다 지웠다.

그러나 끝내 보내지 못했다.

혀니는 단순한 하룻밤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가 불러낸 감정은 설렘이 아니라, 위험한 갈망이었다.

그것은 욕망을 넘어선, 통제 불가능한 소유욕이었다.

다시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녀는 스스로를 잃을지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수진은 거울 앞에 섰다.

메마른 얼굴, 흔들리는 눈동자.

스스로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난 괜찮아.”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거울 속 그녀의 눈빛은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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