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수진
기미돌방을 나간 이후, 수진의 일상은 고요했다. 한동안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마저 줄어들었다. 오픈채팅… 다시 시작해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끝내는 게 맞을까?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손끝으로 익숙한 경로를 눌렀다. 기혼방. 처음 발을 들였던 그 방이었다.
열린 채팅창에는 이전과는 다른 공기가 흘렀다. 닉네임들 대부분이 낯설었다. 새로운 얼굴들이 그 사이 방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부재한 시간만큼, 방 안의 풍경도 바뀌었다. 무심히 스크롤을 내리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한 가지 변화.
토이, 퇴장.
한때 수진에게 짧은 톡을 보내던 남자.
어느 순간 연락이 뚝 끊겼고, 지금은 아예 방에서도 사라졌다. 마음 한켠이 스치듯 시려왔다. 특별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작게 울리는 씁쓸함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식.
오리, 커플 해제.
그는 예전에 수진과 은근한 감정을 주고받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벙개 이후, 보미와 공개 커플이 되었고 수진은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키보드 너머로 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 그 관계도 끝이 났다. 다시 평범한 유저로 돌아온 오리는, 여느 때처럼 채팅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투 어디엔가 공허함이 스며 있었다. 수진은 괜스레 채팅창을 닫았다.
‘그때 우리 사이도… 그렇게 끝이 났을까.’
밤이 깊었다.
불 꺼진 방 안, 커튼 틈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오리: 잘 지내?
화면에 뜬 익숙한 이름.
수진은 핸드폰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내려놓았다. 톡 하나로 불쑥 들어온 그 사람. 그 순간, 어딘가 미세하게 이질감이 번졌다.
‘왜 하필 지금?’
그녀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은 길고, 침묵은 길수록 답장에 가까워진다.
커피: 응, 오랜만이네. 너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운 안부.
사이좋은 친구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눈 대화. 하지만 마음은 흔들렸다. 그녀의 눈은 다시 조용한 대화창 하나로 향했다.
혀니.
수진은 입술을 다물고, 오래전 그 밤을 떠올렸다. 손끝에서 시작된 감각. 온몸을 휘감았던 그 열기. 파도처럼 덮쳐왔던 그 순간. 몸 안에서 퍼져나가던 정체불명의 떨림. 욕망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그녀를 스며들게 했다.
‘나는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녀는 혀니와 함께한 그 밤을 통해 처음 깨달았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꺼내보지도 못했던 감각. 이성 너머의 본능.
그때, 다시 진동. 화면에 나타난 또 다른 메시지. 수진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런데—
마치 그 순간, 감각이 역류했다. 알 수 없는 젖은 감촉이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렀다. 기괴하리만치 명확한 감각이었다. 자신의 몸이 자신보다 먼저 반응한 것처럼. 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마치 그 기계가 자신을 엿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 안은 적막했고, 바깥 가로등 불빛이 고요히 떨렸다.
그 순간—
띠링.
‘채팅방 관리자가 회원님을 내보냈습니다.’
멍해졌다.
‘…뭐?’
방금 전까지도 평범하게 대화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강퇴. 수진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이유 없는 강퇴.
아무런 경고도,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기혼방에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활동해왔다고 믿었다. 물론, 오리와의 관계, 혀니와의 추억이 있었지만 적어도 공개적인 문제는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럼 누가, 왜?
운영진에게 따져 물어야 할까. 하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혹시 기미돌방에서의 활동이 알려졌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그녀를 신고한 걸까. 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수진은 끝내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감춰두었던 것들이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혼방에서 ‘커피’였고,
기미돌방에서는 ‘타임’이었다.
두 개의 이름, 두 개의 세계.
하지만 이제, 그 둘 다 소용없어졌다. 다시 새로운 방을 찾아야 할까. 아니면, 이쯤에서 정말 끝내야 할까.
그때, 다시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
혀니: 누나, 즐거운 톡 하세요.
담담한 한 마디.
감정도, 애착도 느껴지지 않는 그 말. 수진은 그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다, 결국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