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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Jul 18. 2022

긴 감상 1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먹고, 마시고, 자는 본능에만 의존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개별적인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생각을 인식한다. 인간은 '자아'를 가진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동물이 하지 않는 투쟁을 일생에 걸쳐서 하게 된다. 바로 '의미를 찾기 위한 투쟁'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삶의 우연성이 주는 신비함도, 특별함도, 존재의 이유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전체가 아니라 '나'라는 개별적인 주체를 인식한다. 그렇기에 내 삶이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삶을 살아간다는 건 분명히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힘이 드는 일이다. 헤쳐나가야 하는 수많은 인생의 과제,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는 어려움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쾌락의 정도와 고통의 정도를 가감했을 때 우리 삶은 고통의 방향으로 조금 더 향해 있을지도 모른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 '작별인사'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닮았지만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 달마가 인간 삶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들은 의미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까 고통의 의미라고 하셨지요? 고통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들은 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고통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달마는 인간이 의미를 참 좋아한다고, 그래서 고통에도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좋아해서 고통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삶에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삶의 고통스러운 부분을 설명할 길이 없기에 의미를 찾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 삶은 차라리 없었던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달마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고통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 우리는 왜 노력하는가, 왜 고통을 무릅쓰고서도 도전하고, 왜 아플 것을 알면서도 관계를 시작하고, 왜 고통스러운 삶을 멈추지 않는가, 이 모든 질문에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 모두의 투쟁이 서려 있다. 삶에 고통이 있더라도 그 끝에 의미만 존재한다면, 그 의미만 찾을 수 있다면 인간은 행복하게,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같은 소설에서 인간의 마음을 조금 더 닮아 있는 휴머노이드 철이, 그리고 복제 인간인 선이는 삶의 의미를 부정하는 달마의 생각을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이유를 찾는다. 선이는 이렇게 말한다.


"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간에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궁극에는 우주를 지배하는 정신으로 통합된다"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선이는 우주라는 더 거대한 존재에서 인간 삶의 의미를 찾는다. 우리는 저 거대한 존재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우연히 얻었기에, 그 기회를 소중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종교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과도 비슷하다. 인간의 삶의 의미를 고민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간이 자아를 가지기 시작한 이후 삶의 의미는 우리들 생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이고, 투쟁이었다. 하지만 우리 삶 안에서는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기에 인간에게는 종교가 필요했다. 더 큰 존재, 더 의미 있는 존재를 상상했고 그들의 의미에 기대어 자신들의 삶이 의미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를 종교에서 찾고 있다. 종교는 인간의 역사를 때로는 피로 물들이기도 하고, 지금도 수많은 싸움이 종교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주는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삶의 의미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삶의 의미, 그게 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고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종교가 사라질 수 없는 이유이다.


물론 종교나 거대한 자연, 혹은 다른 절대자를 상상하고 그의 힘에 빗대어 우리 삶의 의미를 찾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건 삶을 적극적으로, 도전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의미를 찾는 것이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더 큰 존재에 기대지 않고도 우리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선이의 말에서 또 한 번 찾아볼 수 있다. 선이는 철이에게 그들과 함께 다니다가 죽음을 맞은 민이의 삶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도 민이를 기억하고, 나도 민이를 기억하지, 민이는 그렇게 우리 기억 속에서 살아 있으면 돼. 억지로 다시 만들 필요는 없어"


선이는 민이의 삶에 의미를 찾아준 것이다. 민이의 삶은 선이의 기억 속에서 그 의미를 얻었다. 그리고 우리들 삶이라고 다르지 않다. 내 삶이 의미 있는 이유는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에게서 온다.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들과 나의 관계, 그들의 기억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가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나에 대한 타인의 기억'이다. 역사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듯이, 내 삶의 역사는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시간이 지나 나라는 존재는 죽고 사라진다고 해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들의 기억 속에서 내 삶은 의미를 얻는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찾아 끊임없이 투쟁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 삶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것, 나와 그들 사이에 만들어지는 나라는 사람의 역사를 더 아름답게 꾸미는 것,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따뜻하고 소중한 존재로 기억되는 한 우리 삶은 의미 있다. 사람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건 사람뿐이다.


삶의 의미는 관계의 역사에서 온다.




할아버지, 당신께 이 글을 드립니다.

우리들 기억 속에서 영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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