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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Nov 11. 2023

3. 박연준 <고요한 포옹>

더 짙은 초록이 되자

친구야. 네가 한아름 꽃다발을 안고 오는 모습이 가을날에 잘 어울리는 거 알고 있니. 네가 준 노란색, 하얀색 소국과 분홍 장미, 그리고 보라색 리시안셔스를 적당히 나눠 아이 방에 꽂고, 식탁과 내 책상 위에도 두었어. 꽃을 만지고 있는 시간이 좋더라. 오늘 저녁을 기억하면서 말이야.


너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어. 나도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야. 고명재 시인의 친필 사인이 있더라. 뭔가 특별하잖아. 박연준 작가의 <고요한 포옹>을 읽다가 도서관에 가서 고명재 시인의 책을 가져온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어. 이 책 마지막 챕터가 고명재 시인에 대한 글이었거든.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글, 그야말로 유혹하는 글이더라. 그래도 <고요한 포옹>에서 제일 좋았던 글은 연두, '연두의 노력'이었어. 우울에 대한 글이야. 작가는 이렇게 속삭인다. 들어봐.


작아지세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고 작아져 사소함에 복무하세요. 우울할수록 스스로를 너그러이 봐주세요. 그날 하루 커피 한 잔 마시기, 깨끗이 얼굴 씻기, 공들여 한 끼 챙기기를 하자고 설득하세요... 연두의 노력, 그뿐입니다.


생각나? 존엄을 지키자 약속했던 거. 그래서 가난하지만 이쁜 잔에 커피를 내려 천천히 마시고, 좋은 음악을 골라서 듣고, 이쁜 것들이 보이는 길을 찾아서 산책하자고 했던 거. 지금도 종종 우울이 발목을 잡을 때가 있지만, 이제 우리의 연두는 초록으로 짙어졌지. 웬만한 건 넘길 수 있는 초록 말이야.


아참. 책 이야기로 돌아가야지. 그래서 고명재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읽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어. 난 그의 '수육'이라는 시에 매혹당했거든.


색을 다 뺀 무지개를 툭툭 썰어서 간장에 찍은 뒤 씹어 삼킨다. 죽은 사람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 것, 입속에서 일곱 색이 번들거린다.


무지개래. 무지개. 수육을 삶으면 지방이 녹아 나오는 그거 있잖아. 시에서 만나니까 그게 죽은 이의 삶 같더라. 그의 시는 계속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사랑을 떠올리게 해. 그래서 산문도 궁금했지. 나도 이제 읽기 시작했으니까 너랑 속도가 비슷할 거야. 다음엔 그 책 이야기해 줘.


친구야. 네가 준 꽃이 새삼 이쁘다. 오늘이 지나기 전에 이 말을 전하고 싶어. 우리 더 짙은 초록이 되자고. 굿 나잇.

박연준<고요한 포옹>, 마음산책, 2023.4.(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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