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Dec 25. 2021

겨울에 잃어버린 것들(Ⅰ)


겨울에 잃어버린 것들


나는 한 남자를 알고 있다. 그러나 굳이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 그 남자에게 하나의 고유명사를 붙인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조그만 한 컷의 삽화.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알 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한 컷의 삽화(揷畵)이다. 그 남자는 언제 보아도 가난하다. 그런데도 그가 언제나 부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그의 일생은 아주 어린 시절 변변히 자기 이름도 쓸 수 없었던 그런 어린 시절. 어느 겨울날 아침에 선고를 받았다. 그는 겨울에 아버지로부터 값비싼 모자를 선물로 받았다.



그 모자가 데이비드 크로켓 (David crockett)이 쓰고 다녔던 것 같은 수달피 가죽의 털모자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하얀 방울 술이 달린 산타클로스의 모자였는지 또 그렇지 않으면 셀룰로이드 안경이 달린 파일럿 모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시골에선 아주 보기 드문 모자, 서울 백화점에서 산 값비싼 겨울 털모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어느 겨울날 아침 이 모자를 자랑하려고 밖에 나갔다가 일생을 지배하는 그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얼음이 깔린 마을의 공터에 아이들이 모여서 팽이를 치고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그들의 팽이가 어떻게 생겼으며 또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시골 아이들은 장난감 가게에서 팽이를 사지 않는다.



돈이 없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시골 아이들은 팽이를 만드는 재미를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산에서 팔뚝만 한 나뭇가지를 잘라다가 배추 밑동을 깎듯이 낫으로 깎아 원추형을 만든다. 그리고 뾰족하게 깎은 팽이 끝에, 부서진 자전거에서 빼낸 쇠구슬을 박는다.


그것을 구할 수 없으면 못을 박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든 팽이에 손때가 묻고 길이 들면, 무슨 신경을 가진 곤충처럼 그것은 부드러운 날개 소리를 내며 도는 것이다. 똑같이 기계로 깎은 팽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 모양도 가지각색이고 도는 시간도 또한 제각각이다.


 아이들은 이 팽이를 가지고 시합을 한다. 그래서 가장 오래 돌고 힘이 세고 또 가장 길이 잘 든 팽이를 가진 아이는 마을의 영웅이 된다. 털모자를 쓴 아이는 지주의 아들이었다. 으레 팽이는 장난감 가게에서 사오게 마련이었다.



그 애는 다른 아이들처럼 나무를 어떻게 찍어야 하고 낫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 애는 나무 팽이를 만들지 못한다.


나는 그 남자의 비극을 알고 있다. 그 겨울날 아침에 일어난 사건을 그 운명과도 같은 사건을 나는 알고 있다. 털모자를 쓴 아이는 그 마을에서 제일 잘 도는 팽이를 갖고 싶었고, 가난한 소작인의 아이들은 포근하고 멋진 그 털모자를 부러워했다.


겨울이었다. 나무도 창문도 강물도 모든 것이 얼어붙은 허공을 가르고 울리면 팽이가 도는 것이다. 얼음판 위에서 무슨 신경을 가진 곤충처럼 팽이가 그리고 모든 것이 도는 것이다. 털모자를 쓴 아이는 황홀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경우 사건이 어떻게 전개됐을 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드디어 그 팽이와 값비싼 모자를 바꿔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이 수달피 가죽 같은 값비싼 가죽이었다 해도, 도는 그 팽이만큼 겨울 추위를 잊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금도 팽이보다 털모자가 더 귀중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이 더 값비싸다거나, 그런 모자를 살 만한 돈이면 시골 아이들이 깎아서 만든 그 따위 팽이쯤은 수백 개를 사고도 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겨울아침 햇살에 번쩍이는 빙판위에서 도는 팽이만이 그에게는 즐겁고 소중하고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움직이는 것, 겨울의 그 침묵에서 움직이는 것...



그 사건이 그의 아버지를 노하게 만들고 실망케 했다. 그는 많은 땅을 상속 받아야 할 맏아들이었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그 재산을 지키고 늘려야 할 장손이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가 실없이 값비싼 털모자와 팽이를 바꾸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와 집안 식구들은 모자 하나를 잃은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날 그는 심한 매를 맞았고, 아궁이의 장작불 속으로 그의 팽이채와 박달나무 팽이는 재가 되었다. 눈물 자국처럼 재가 되었다. 그 뒤에도 놀림을 당하고 유산을 탕진한 탕아처럼 경계를 받았다.



그 겨울날 아침부터 시작된 추위는 봄을 열 번이나 스무 번이나 맞이했어도 풀리지 않았다. 털모자와 팽이를 바꾸었듯이 그는 일생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기름진 많은 땅을 휴지나 다름없는 원고지와 바꾸었다. 땅을 탕진한 지주의 아들은 시인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많은 집과 많은 가구들을, 한 번 울렸다 영원히 사라지는 하나의 소리와 바꿔버렸다. 그는 음악가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화수분 단지처럼 하얀 쌀이 쏟아지는 정미소를 팔아서 허공 속에서 외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웃고 눈물을 흘리는 몇 시간의 열정을 사려고 했다. 그는 연극배우가 되어 무대 위에서 살려고 했던 것이다. 


삽화 illustrator / 이유근

털모자와 팽이를 바꾼 어느 겨울날 아침 햇살은 평생을 두고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털모자는 탐욕스럽고 기름기 많으며 목이 굵고 광대뼈가 나온 그 많은 사람들의 때 묻은 손으로 넘어갔다.


그 대신 그의 손에서는 하찮은 나무 조각일망정 무슨 신경을 가진 곤충처럼 끝없이 하나의 팽이가 돌고 있었다. 그는 시인도 음악가도 무대 배우도 되지는 못하였다.


한 줄의 아름다운 시, 흐느끼는 한 가닥의 선율, 폭발하고 타오르고 맞부딪치는 한 장면의 몸짓. 끝내 그런 팽이들은 얼어붙은 겨울의 땅, 그 미끄러운 삶의 땅 위에서 돌지는 못했다. 언제나 박달나무 팽이는 하나의 불꽃으로, 연기로 그리고 재가 돼버렸다. 그는 모자를 잃은 것뿐 이었다.



데이비드 크로켓이 쓰던 수달피 가죽 같은 털모자였는지, 하얀 방울 술이 달린 산타클로스의 모자였는지 혹은 셀룰로이드 안경이 달린 파일럿 모자였는지, 그 남자도 우리도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


다만, 그는 값비싼 모자를 팽이 때문에 잃은 것이다. 한 생애를 잃은 것이다. 그의 혈족을, 재산을, 집을, 땅을 잃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가 언제나 가난하면서도 또 무엇인가를 들고, 털모자 같은 것을 들고 팽이와 바꾸려고 두리번거리면서 도시의 겨울 골목을 지난 것을 본다.



술집의 창문들에서 하나씩 불이 꺼져가고 있는 겨울밤의 골목길을 그는 서성거리면서. 불타버린 잿더미를 들추고 하나의 팽이채와 박달나무 팽이를 끄집어내려고 한다.


그러다가 언젠가 빛나는 겨울아침에 그는 채찍을 다시 한 번 내리칠 것이고, 팽이는 곤충의 날갯짓 소리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며 것이다. 그리고 정말 겨울이, 그 추운 겨울이 끝없이 그의 발밑에서 돌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것이다.


- 李御寧 수필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메밀냉면 맛집기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