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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않는 기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가고있다.

애빌린의 역설

by 썬피쉬

아내와 유튜브를 볼 때가 있다. 먹방 콘텐츠를 튼 적이 있다. 나는 별로였지만 아내가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한참 보더니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별로인데 자기는 재미있어?” 나도 재미없었다. 서로 좋아할 거라 착각했을 뿐, 결국 둘 다 즐기지 못했다.

외식도 그렇다. 내가 썩 끌리진 않지만 아내가 좋아할 거라 생각해 선택한 식당. 막상 가보니 아내는 내가 먹고 싶어하는 줄 알고 온거지. 별로였다고 했다. 이럴거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 고를걸 후회가 든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택을, 서로가 원한다고 믿고 따른 셈이다. 이게 바로 애빌린의 역설이다. 집단이 서로를 배려(?)하다가, 결국 누구도 원치 않는 길로 가는 상황.

한국 교육도 비슷하다. 학생, 부모, 교사 모두가 전력질주한다. 학원과 과외, 스펙 쌓기와 시험 준비, 줄 세우기와 평가. 그런데 묻고 싶다. 이 경주를 정말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더 큰 문제는, 모두가 달리는 순간 생긴다. 내가 전력질주하면 앞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옆사람도, 뒷사람도, 앞사람도 똑같이 전력질주한다. 그래서 결과는? 모두가 제자리다. 순위는 그대로인데, 남는 건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뿐이다. 한국 교육은 거대한 러닝머신이다. 열심히 달리지만 풍경은 바뀌지 않고, 체력만 소모된다.

이게 바로 애빌린행 KTX의 아이러니다. 모든 좌석이 만석인데, 목적지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곳. 학생은 지쳐 있고, 부모는 지갑이 바닥났고, 교사는 탈진했다. 그런데 기차는 여전히 달린다. 모두가 원할 거라 착각하며, “나만 내리면 낙오될까 봐” 서로 눈치만 보면서.

웃픈 건, 이 상황에서조차 “조금만 더 달리면 대학 간다”, “조금만 더 버티면 행복해진다”라는 말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종착역에 도착하면 남는 건 성취가 아니라 후회, 그리고 번아웃이다.

해법은 사실 단순하다. 기차 안에서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나도 원하지 않아.” 그 순간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바꿀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한국 교육은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모두가 달리니까, 나도 달려야 한다는 집단 착각 속에서 발버둥칠 뿐이다.

결국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한국 교육은 모두가 전력질주하지만, 결국 제자리.

남는 건 탈진, 잃는 건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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