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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댁 고양이 Nov 21. 2023

찬바람 불면, 이모들이 찾아왔다네.

[장수댁]

집사가 그린 배추입니다.


찬 바람에 콧등이 시린 계절이다. 이맘쯤, 떠오르는 어릴 적 기억 하나가 있다. 강원도 어느 산골에 자리한 우리 집. 주변은 산으로 둘러 싸여 조용했다. 앞 논두렁은 서서히 얼어붙고, 앞마당도 추위에 단단하게 굳어있다. 짙푸른 수풀도 제 색을 잃어버리고 이젠 창백함을 자아낸다.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온 거다.


조용하던 우리 집이 순간 왁자지껄해진다. 서울에 사시는 큰 이모, 작은 이모가 아침 댓바람부터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김장을 하러 온 거다.


우리 집은 앞마당이 넓었다. 고즈넉한 정자 하나 지어도 될 정도로 널찍했다. 마당 한쪽에는 소금에 숨이 푹 죽은 배추 200여 포기가 전날 저녁부터 고이 쌓여 있다. 식당을 하는 우리 집과 이모네 식구들이 먹을 양이다. 배추에 속을 넣을 때 사용할 널찍한 고무 대야도 대여섯 개 쪼르르 놓여있다.


고무줄이 짱짱히 들어간 아주 편한 옷을 골라 언니와 마당 한쪽에 앉는다. 이날은 어린이도 예외 없다. 언니와 내 몫은 잔심부름이다. 아직 10살도 채 안돼 김장은 무리다. 그래도 김장이 끝난 후 삼겹살을 맘 편히 먹으려면 양심상 뭐라도 도와야 한다. 한쪽 대야에 수북이 쌓여 있는 김장 속을 보니, 벌써 아찔하다. 이걸 언제 다하나!


배추에 김치 속을 넣던 이모들은 슬슬 입을 털기 시작한다. 대부분이 남편 자랑, 아이 자랑이다. 아들 준영이가 과학시험에서 최상위권 문제를 혼자 맞혔다느니, 건축일을 하는 이모부가 이번에 보너스로 얼마나 받았냐느니.


눈치 빠른 우리 엄마는 이모들의 속내를 이미 간파한 듯, 절인 배추 뭉텅이를 들이댄다. 놀지 말고 빨리하라는 신호다.


몇 시간을 쪼그리고 배추에 양념 옷을 입혀주고 나서야 허리를 편다. ‘뚜두둑’. 다들 삭신이 쑤신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다. 바람도 세차 진다. 다시 콧등이 시리다. 그제야 연례행사인 김장이 서서히 마무리된다.


(30여 년 후….)


퇴근길이다. 만리동 시장의 한 마트에 촘촘히 쌓인 싱그러운 배추가 보인다. ‘더 추워지기 전에 김장을 해야 하는데.’ 요 며칠 벼르고 있다가 토요일 아침, 망에 든 배추 세 포기를 배달시킨다.


남편은 집에 없다. 당직이라 회사에 갔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건 심심하다. 이런 날은 김치 하기 좋다. 결혼 후 몇 차례 김치를 해본 터라 마당이 없어도 배추 절이는 노하우가 생겼다. 유튜브를 검색하면 뭐든 다 찾는다.


그래도 가끔은 마당이 있는 집이 그리워진다. 어릴 땐 그게 참 당연했는데, 그건 시골에 사는 특혜였다. 그래도 여전히 시골은 싫다. 시골은 춥고, 심심하고 재미없다. 그땐 남편도 없었다. 그래도 바쁜 삶을 살다가 어쩌다 떠오르는 그 시절은 왠지 되돌아가 보고 싶다. 이런 걸 ‘향수(鄕愁)’라고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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